인물마다의 사정을 그려놓는 게 좋다고 말했었는데, 아, 너무 이 사정 저 사정 풀어놓다보니 어떤 인물이 어떤 사정을 가졌는지 기억하기 너무 헷갈리고, 그리고 글이 되게 산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몇 권 안되지만 그간 읽어온 스티븐 킹은 정리 정돈 잘 되어있다 느꼈었는데 이 소설 1권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산만하고 말이 많다'는 거였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가져가려는 것, 유머감각이야 살아있지만, 그렇지만 뭔가 산만해... 이 작품은 뭐랄까, 정리된 것보다는 의욕이 앞선 작품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머릿 속에 스토리 있어, 오오, 이거 대단해, 인물들은 이런 설정을 할거야, 자 써보자' 하면서 후다다닥 써내려 갔기 때문에, 쳐낼 걸 쳐내지 못한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이건 킹의 초창기 작품인 듯한데, 대체 언젯적 작품인가 보자, 하고 검색해보니, 오, 그간 내가 읽었던 킹의 작품들 중 가장 앞선 작품이었다. 그러니까 가장 젊은 시절의 킹이 쓴 것. 1986년 이라고 나와있다.
가장 최근에 인상깊게 읽었던 《별도 없는 한밤에》는 언제 쓴거지? 하고 찾아보니 2010년 이었다. 이 책, 《IT》을 읽은 지인이, 젠더 감수성 실망했다고 했는데, 별도 없는 한밤에 에서 나는 전혀 다르게 느꼈으므로, 그렇다면 스티븐 킹 개인이 그 사이에 변화를 거쳤다고 봐야할 것 같다. 더 나은 쪽으로 변화한 건 분명 사실인 것 같으니, 그 점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만, 이 책의 3권에서 있을 그 부분이... 아아, 읽기 싫기도 하고........ 어쨌든. 이제 겨우 1권을 다 읽었는데,
읽다가 592페이지에서 나는 '기분이 수꿀했다'는 문장을 마주친다. 네? 수꿀했다고요? 나는 이것이 당연히 오타일 거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뭐의 오타일까, 생각해보고 맨 처음 생각한 건, '꿀꿀하다' 였다. 그런데 이게 되게 뭐랄까, 긴장되고 두려운 상황인데 '꿀꿀하다'는 안맞잖아? 어떤 단어의 오타가 대체 수꿀하다로 날 수 있지? 하고 포스트잇 플래그를 붙여놓고 다음 페이지를 읽으려다가,
어? 어쩌면.... 내가 모르는 단어인 게 아닐까? 오타가 아니라, 원래 있는 단어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몰랐다고 오타라고 생각하는 오만을 부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나는 네이버 어학사전을 열어놓고 '수꿀'을 쳐본다. 뭐라 나오나 보자, 하고는. 그러자!!!!!
맙소사!!
있는 단어였어!!
게다가 '무서워서 몸이 으쓱하다'는 뜻의 단어였어. 그러니까, 이 상황에 되게 적절한 단어인 거야. 와우- 럴수럴수 이럴 수가!! 이런 단어가 있어? 아니, 이런 단어 어떻게 알고 이렇게 똭- 쓰지? 영어로는 호러블 정도의 단어라면, 스티븐 킹은 그냥 호러블로 썼을 수도 있을텐데, 번역하는 사람은 대체 어떻게 알고 '수꿀하다'란 단어로 바꿔 쓴거지? 오오, 놀랍다! 나는 이날까지 살면서 처음 봐!! 처음 읽었어!! 내가 처음 봤다고 오타라고 당연히 생각하려고 했어. 맙소사!! 오 마이 갓!! 지저스!!!
누군가 말하는 거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내가 써야겠다. 나는 꿈을 잘꾸고 그러다보면 악몽을 꾸는 날도 있기 마련. 그럴 때 친구들에게, '어제 무서운 꿈을 꿔서 진짜 수꿀했지 뭐야' 라고 하는 거다. 아니면 알라딘에 페이퍼를 이렇게 쓰는 거지. '어제는 수꿀한 꿈을 꾸었다'
아아, 잊을 수 없는 단어가 될 것 같다. 수꿀...
내가 이런 단어 예전에도 찾아서 페이퍼 쓴 기억이, 지금 갑자기!! 나는데, 그것은 '는개'였던 것 같다. 안개의 오타인가??? 하고 찾아봤다가, 진짜 있는 단어라서 깜놀. 그런데 그 페이퍼에 이미 알고 있는 단어라고 댓글 다는 사람들이 많았지.... 아아, 세상은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 투성이구나...
는개: [명사] 안개비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
물론, '는개'라는 단어 몰라도 된다. 사는 데 별 지장 없다. 는개라는 단어 모른다면, 그냥, '굵지도 않고 가늘지도 않은 비가 내려' 라고 하면 될것이다. '수꿀하다' 라는 단어도 마찬가지. '아 엄청 무서워서 쫄려' 라고 쓰면 뜻은 통하니까, 아니, 심지어 더 잘 전달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책을 읽었고!! 그러므로 책으로부터 습득한 단어를 기억해서!! 써나간다면!! 실생활에서 입밖으로 내뱉는다면!! 멋지잖아? 독서인의 가오가 있지.....움화화화핫.
그런데 수꿀이 자꾸 수꼴로 나올라고 한다. ㅠㅠ
이래서 자주 쓰지 않는 단어는 잊혀지고 자주 쓰는 단어는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오는 거야.
방금전에 문자로 사진을 하나 받았는데 짜장면을 점심으로 먹는 사진이었다. 아아, 그 사진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짜장면 너무나 먹고싶고.... 나는 오늘 페미니즘과 민주주의 강의 들으러 가는 날인데, 어제부터 너무 가기 싫어서... 친구한테 '오늘 가지말고 놀래?' 라고 물었지만, 인정사정없이 까였다.
'그냥 공부하러 가자'
어...............그렇지만..................가기 싫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짜장면 먹고싶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래서 머릿속에서 플랜을 여러개 돌려보고 있다.
플랜 A : 퇴근하자마자 회사 근처에서 후다닥 짜장면을 먹고 공부하러 간다.
플랜 B : 퇴근하자마자 회사 근처에서 후다닥 짜장면을 먹고 집에 가서 잔다.
플랜 C : 퇴근하자마자 그냥 집에 가서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고 와인을 마신다.
플랜 D : 퇴근하자마자 그냥 집에 가서 오뎅탕을 끓여서 소주를 마신다.
플랜 E : 퇴근하자마자 김밥 한 줄 먹고 공부하러 간다.
플랜 F : 퇴근하자마자 회사 근처에서 후다닥 짜장면을 먹고 집에 가서 치즈를 꺼내서 와인을 마신다.
플랜 G : 친구에게 공부하러 가지 말자고 재차 꼬셔본다.
아아, 나의 최종 선택은?!
인생은 혼란의 구렁텅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