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시사인을 읽다가 박근혜가 '수필가'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간 박근혜가 쓴 책이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수필가로 불리기도 하는 사람인줄은 미처 몰랐다. 내가 박근혜에 대해 모르는 게 어디 이뿐일까. 그간 드러나는 박근혜도 나는 다 모르고 있지 않았는가.

1990년대에 썼다는 수필집은 한 두권도 아니더라. 매일 책을 읽고 매일(은 아니지만) 글을 쓰는 나보다 더 수필집을 많이 냈더라. 




















이렇게나 글을 많이 쓰는 사람인데, 글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렇다면 글에 대한 욕심도 있었을텐데, 왜 연설문을 다른 사람 손에 맡긴걸까? 연설문이야 말로 자기 생각을 드러내기 가장 좋은 글이 아닌가. 대체 왜 박근혜는 다른 사람이 써준 글을 그대로 자신의 생각인양 발표했을까?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굳이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지 않더라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쓰는 이유가 대부분일 거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거라든가 자신이 생각하는 걸 글로 풀어냄으로써 스스로 정리해나간다는 의미. 게다가 그것이 책으로 나온다면, 언제 어디서 누가 내 생각과 느낌을 읽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쓰는 사람들이라면 더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된다. 한 권이 두 권이 되는 건, 그래서가 아닐까. 


게다가 글에서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드러난다. 내가 어떤 생각을 드러내고 또 어떤 생각을 감춘다 하더라도, 글을 읽다보면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아 이 저자는 이러이러하겠구나' 라는 나름의 판단을 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작가를 좋아하고 어떤 작가를 싫어하게 된다. 


오늘 아침엔 '존 쿳시'의 『슬로우맨』을 생각하면서 왔다. 책 속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게 됐지만, 그렇다해서 차선을 '대신' 선택하지 않았다. 나에겐 그게 아주 강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렇게 써준 존 쿳시가 나는 좋았다. '줌파 라히리'는 철저히 개인에 대해 생각한다. 자기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길 원하고, 세상의 어떤 굵직한 사건에 휘말리기 보다는, 지금 내가 여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에 집중한다. 나는 그런 점이 무척 좋았고, 그래서 내가 소설을 쓰게 된다면 줌파 라히리처럼 쓰고 싶다고 늘 생각해왔다. '다니엘 글라타우어'가 그의 소설에서 '에미'를 그려낸 것도 나는 무척 좋았다(에미는 언제나 당당했고 그렇지만 실수도 저지르는 여자였다!). '수키'는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캐릭터인데, '샬레인 해리스'는 수키를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여자로 그려냈다. 내가 페이퍼에서도 예전부터 언급했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리뷰를 쓰면서도 욕했었는데, '박범신'의 『은교』에는 정작 '은교'가 없었다. 거기엔 중년 남성과 노년 남성의 눈에 비춰지는, 철저히 성적 대상화된 십대의 소녀가 있었을 뿐이고, 은교라는 인물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그 책에서 저자가 남성의 성적 판타지만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가 박범신을 읽지 않는 이유고 싫어하는 이유였다. 글은, 어떤 문장으로 미화해도 결국 생각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시사인에서 <하늘의 섭리를 믿었던 '수필가 박근혜'>라는 타이틀로 기사를 쓴 '변진경 기자'는, 기사를 읽어보니 박근혜가 1990년대에 낸 수필집을 다 읽어본 것 같더라. 읽다보면 그 생각이 드러나 읽기가 힘들었을 것 같은데(라고 안읽어봐놓고 함부로 말하긔 ㄷㄷ), 다 읽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자,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박근혜의 수필을 읽은 한 평론가의 평에 대한 것이다. 대체, 문학평론가란 무엇인가? 읽지 못한(않은) 내가 뭐라고 하는 건 사실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평론이라면, 수필집을 읽지 않아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질 않는가. '이태동 문학평론가'는 박근혜의 수필을 읽고는, 박근혜를, 몽테뉴와 베이컨의 전통을 잇는다 평한다!!!!








밑에 양경언 문학평론가는 그런 평론에 비판을 했지만 글의 전문이 실리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태동 문학평론가는 정말 저렇게 느끼고 생각한걸까? 글은 읽는 사람에게 저마다의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니, 다른 사람들이 후진 글이라 해도 나에게는 좋은 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물론 나는 안다. 그렇지만, 정말 이태동 문학평론가는 박근혜의 수필에서 '부조리한 삶의 현실과 죽음에 관한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의 코드를 탐색해서 읽어냈'다고 생각한걸까? 그게 확- 느껴진걸까? 그래서 '인문학적인 지적 작업에 깊이 천착하고 있기 때문에 문학성이 있는 울림이 있다'고 깨닫게 된걸까? 정말 그런가? 진짜, 진심으로 그렇게 느낀건가? 인문학적 지식이란 게, 지적 작업이란 게, 그렇단 말인가?



이럴 때 극히 일부분만 인용하는 것은 부당하겠지만, 이태동 평론가가 그렇게 극찬한 [바른 것이 지혜이다]의 인용문은 시사인에 실려 있지 않아, [결국 한 줌, 결국 한 점]에서 몇 부분을 재인용해 보겠다.



"어디가 극락인가? …마음 한번 돌려 부처가 되듯이 인류가 마음을 돌리면 이곳이 바로 천국이요, 하늘 나라가 임하신 곳이 되는 것이다" -p.105


"하늘은 모든 것을 보고 또 알고 계시니 그 앞에서 거짓이란 있을 수 없다. …위대한 기도의 힘은 결국 지극히 깨끗한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즉, 그러한 마음에게만 하늘은 능력을 주시는 것이 아닌가." -p.115


"우리에게 진정 소중한 것들이 그렇게 커다란 도움을 주면서도 겸손하게 아무 말 없이 우리에게 봉사할 때 우리는 때 늦지 않게 그 소중함을 인식함이 중요하다. 공부를 안 하면 시험에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깨끗한 자연환경이나 건강, 신용, 마음의 평화, 풍요로운 노년기 등은 노력 없이 그냥 주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은연중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p.74



나는, 글쎄, 위의 인용문으로 지적인 글이라고 생각은 잘 안들고... 뭔가 약간..음, '내려놓은' 사람 같다는 생각은 든다. ㅎㅎ 그리고, 위의 인용문들을 읽고나니, 박근혜의 연설문은...어쩌면 박근혜가 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워낙에 하늘과 운명의 힘을 믿었던 사람인 것 같으니.....

그나저나 74쪽의 인용문을 보면, '공부를 안하면 시험에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박근혜도 생각했던데, 그런데 정유라는 왜  ........... 그만두자. 



내가 아직 몽테뉴도, 베이컨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지만, 박근혜가 몽테뉴와 베이컨의 뒤를 잇는지는 글쎄다. 하하하하하.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korean715 2016-12-01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몽테뉴의 저서들을 제목만 읽었으면 그럴 수도…

비연 2016-12-01 2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 허걱입니다 ㅜ

꼬마요정 2016-12-01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 제 댓글 날아갔어요ㅠㅠㅠㅠ

하도 요상해서 말을 이해 못 하는 통에 혹시나 진짜 심오한 건 아닌가 혼자 오해해서 그런 말 한 건 아닐까.. 이런 식으로 적었는데.. 날아갔어요ㅠㅠ 신비주의 전략이 아니라 진짜 아무것도 없는 사람인데 말이죠.

corgidrl 2016-12-01 2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근혜 아닌 순실 작품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