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드라마 『아이가 다섯』에서는 남주인 '안재욱'이 여주인 '소유진'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장면이 나왔다. 안재욱은 집 마당으로 나와 소유진에게 전화를 걸었고 소유진은 자신의 방에서 전화를 받다가 '당신 노래 잘한다던데 지금 좀 불러달라'고 말했다. 안재욱은 그래서 수화기 너머로 '젝스키스'의 <커플>을 나름의 발라드 버전으로 불러주었다. 소유진은 수화기 너머에서 연인의 노래를 들으며 행복해했다. 안재욱이 노래를 불러주던 장면을 그의 장모가 우연히 보게된다. 이 지극히 사적인 장면을.
그러자 이십대 중반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간혹 회사의 비상구 계단을 찾는데, 그때도 회사의 비상구 계단에 가고 싶어 빼꼼 문을 열었던 거다. 그런데 거기엔 이미 나보다 먼저 울 회사 남자동료인 L 이 와있었다. 내게서 등돌리고 있었으므로 그는 나를 보지 못했는데, 그는 수화기 상으로 상대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있었다. '신해철'의 <일상으로의 초대>였다.
나는 너무 놀라서 아무말도 못하고 그냥 문을 살짝 닫고 나왔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당사자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너무나 사적인 장면이기도 했지만, 회사에서 내가 아는 동료 L 은 누군가에게 노래를 불러줄만한 사람으로 상상되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러나 사실 동료로 만나거나 친구로 만난 사람이 연인으로서는 어떤 모습일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는 내게 그저 느리고 답답한 동료였는데 연인에게는 노래를 불러주는 사람이었던 거다. 우리는 그 사람과 사귀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이 어떤 모습의 연인일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십대 중반에 내가 사귀었던 남자는 주변인들로부터 싸가지 없다는 평을 듣는 사람이었다. 말투가 틱틱거리기 때문이고 도무지 다정한 말투를 쓰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조차도 처음 그에 대한 인상은 재수없다는 게 먼저였다. 말을 왜 저따위로 한담, 하면서. 말투 기분나쁘다고 말해야겠어, 라고 벼르던 참에 어쩐지 나도 모르게 그와 연인이 되어있었고, 연인인 그는 틱틱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말을 어찌나 잘듣는지, 나는 뿌듯하기까지 했더랬다. 나보다 나이도 훌쩍 많은 남자가, 성격도 나쁜 남자가, 내가 하라는대로 다 한다는 뿌듯함. 나한테 어쩌다 쌀쌀맞은 말투로 말할라치면 그저 나는 '너 지금 나한테 쌀쌀맞게 말하는거냐'는 표정으로 놀라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그는 이내 다정해졌다. 그의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다는 게 너무 짜릿했다.
시간이 지나 나는 그 직장을 관뒀고, 그때 상대에게 노래를 불러주던 L 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노래를 불러주던 그 상대와 결혼할걸까, 라고 혼자 쓸데없는 생각을 해보았다.
극중에서 소유진은 아이가 셋이고 안재욱은 아이가 둘이다. 한쪽은 이혼으로 그리고 한쪽은 사별로 각자의 배우자를 잃어 둘다 싱글인 상태인데, 아마도 이 둘이 나중엔 함께 살기 때문에 제목이 '아이가 다섯'이 된 게 아닐까 싶다. 뭐,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추측이다. 그런데 어제 내가 본 마지막 장면에서는 안재욱이 소유진에게 '나는 재혼생각이 없는데, 그렇다면 당신에게 나쁜 놈입니까' 라고 묻는다. 소유진은 자신이 다시 연애를 한다면 하고 싶다고 생각한 위시리스트를 만들어두었었는데, 그걸 연인이 된 안재욱에게 건네면서 맨 마지막 한줄을 찢는다. 그때 그 한줄에는 '함께 행복하게 살기'라고 적혀있었다. 자신의 처지와 또 안재욱의 처지를 아는 이상 결혼을, 그러니까 재혼을 바라는 게 어렵다는 걸 알고 있고, 그래서 혹여라도 그게 부담이 될까, 안재욱에게 건네기 전에 찢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소유진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라는 소원을 갖고 있었다. 안재욱은 현재 처갓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고, 그런 상황이니만큼 자신이 재혼을 말하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자신의 마음이 더 커지기 전에, 관계가 더 깊어지기 전에 '나는 재혼생각이 없다'는 것을 상대에게 알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해, 자신의 연인에게 그 생각을 알린다.
내가 1인1피자에다 내가 만든 알리오올리오 스파게티, 거기에 와인을 곁들여 보다말다 보다말다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소유진도 그 상황을 '알고는' 있었다. 그렇기에 마지막 한 줄을 건네지 못한 것이었고. 그러나 '알고있다'고 해도 정작 그 말을 들었을 때에는 서운했을 거다. 안다고 해서 다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니까. 본인이 재혼 생각이 없었다 해도 상대로부터 그 말을 듣는 건 또 다른 거니까. 서운하지만 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래 그렇지, 하면서.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서 관계가 더 깊어지고 마음도 더 깊어지면, 결국 안재욱의 마음도 바뀌지 않을까? 함께 살고 싶은 걸로?
어제는 일어나서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내 이름은 김삼순』을 보게 됐다. 이게 뭔 특집인지 몰라도 연속방송을 해주길래, 연속해서 세 편을 내리보았다. 교회를 갔다가 집에 돌아온 엄마는 소파에 앉아있는 나를 보시고는 '너 내가 나갈때부터 이거 계속 보고있는 거냐' 하셨고, 나는 '응' 했다. '야, 너 밥은 안먹고 이거 보고 있는거냐?' 하셨고 나는 '밥은 먹었어' 라고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단 뭘하든 밥은 먹는 거니깐요. 어쨌든,
당시에 꼬박 챙겨보진 않았어도 재미있게 보던 드라마였는데, 지금와 다시 보니 허술한 부분이 많다. 대사도 그렇고. 게다가 그 때는 완벽해보였던 삼식이가, 다시 보니 그냥 .... 한국남자더라. 삼순이 데꾸 무작정 화장실 들어가서 기습키스를 하는 것도, 어릴 때라면 두근거리며 봤을 것 같은데 하나도 안멋졌다. 게다가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보여주겠다'며 오천만원짜리 수표를 찢을때는, 그 허세와 유치함, 멍청함에 뒤통수를 세게 갈겨주고 싶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라, 라고. 내가 그를 사랑했다면 그 순간 정나미가 떨어졌을 듯. 그래서 삼순이도 그를 포기했지만..... 음... 그런데, 삼식이가 삼순이를 안아주는 장면이 너무 좋았다. 계속계속 생각났다. 역시 사랑하는 사람의 포옹은 힘이 세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삼순이는 삼식이를 잊겠다며 한라산 등반을 한다. 비가 세차게 오는데도 굳이 한라산에 오른다. 자기만의 의식이다. 나라면 비 오는 한라산에 오르지 않겠지만, 어쨌든 삼순이는 그렇게 삼식이를 잊고 싶었다. 그래서 정상에 올라 그 비가 오는데 세차게 부르짖는다.
삼식아 이제 너랑은 진짜 쫑이다!!
뭐, 그렇게 말한다고 정말 마음이 깨끗하게 쫑으로 가겠느냐마는, 어쨌든 그녀는 그녀만의 의식을 치른다. 그런데 그 곳에, 삼식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비가 오는데, 삼식이가, 한라산 정상에서 삼순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식이가 삼순이를 찾아 한라산에 왔다. 삼순이는 한라산에서 삼식이를 볼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를 잊으려고 갔지만, 그 곳에서 삼식이를 본다. 여기까지만 보고 내가 일자산을 가는 바람에 그 뒷편들을 보지 못했는데, 그 뒤가 어떻게 되더라... 어쨌든, 한라산에서 만나는 사랑하는 사람이라니. 삼식아, 내가 나의 일정을 알려줄테니 베트남에, 뉴욕에, 마이애미에, 벨기에에 먼저 가서 나를 기다려주지 않겠니?
아, 다른 얘긴데, 『아이가 다섯』에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 존대를 한다. 직장에서는 남자가 팀장이고 여자가 대리인데도 하대하지 않는다. 사적으로는 연인관계인데도 서로 존대한다. 이거 너무나 좋다.
그러니까 이 페이퍼의 결론은,
내가 주말 내내 텔레비전 앞에서 살았다는 거다. 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