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인 에어]에서 내게 가장 인상깊었던 인물은 남자주인공 '로체스터'였다. 그는 아직까지도 내게 인상이 강해서 그 이름을 잊을 수가 없는데, 소설의 끝에 그는 눈도 멀고 팔도 못 쓰게 되는데, 제인 에어를 만나서는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뜨겁게 고백을 하는 거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혹여라도 내가 못난 모습을 보이게 되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편이고, 또 내가 얼마나 잘났는지 잘난점을 드러내고 싶어서 안달하는데, 그런 나였다면 아마 내가 눈이 멀고 팔을 못쓰게 되었을 때, 위축됐을 것 같은 거다. 상대보다 내가 불편함을 갖고 있단 사실에. 나는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도 약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거다. 내가 사랑하는 상대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왜 그의 앞에 반드시 멋진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한걸까? 사실 사랑이란 감정 자체를 숨기는 것 보다는 당당하게 드러내는 게 훨씬 건강한 것임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다. 실제로, 나는 내가 혹시 알츠하이머 초기증세가 아닌가, 하고 의심했을 때, 신경정신과에 방문을 하면서, 그 당시 사귀던 남자에 대해 생각했다. 만약 내가 알츠하이머 초기증세라고 한다면, 그렇게 결론이 난다면, 그에게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가 나보다 더 건강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그를 편하게 놓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다. 만약, 그가 내게 그렇게 말했다면-난 아프니까 우린 헤어져-, 나는 대체 어떤 기분이었을까... 하아-

결론적으로 나는 알츠하이머가 아니었고, 닥터는 내게 '알츠하이머와는 아주 거리가 먼' 생활습관을 갖고 있다고 얘기했었다. 길가면서 책 읽거나 핸드폰 보지 말라는 조언만 듣고 돌아왔었지....

어쨌든 나는 내가 조금이라도 위축되는 상황이 되는 게 싫었고, 그런 나의 상황 때문에 상대가 불편해할까봐 염려했는데, 로체스터는 일단 그 모든 걸 제쳐두고 '나는 너를 사랑해'를 외치는 거다. 와, 진짜 너무 멋진 거다. 이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상대를 사랑한다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내가 이렇고, 내 상황이 이렇고, 어쩌고 하고 뒤로 숨는 게 아니라, 감추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밝혀야 한다고.


로자 룩셈부르크를 마주하면서 나는 로체스터 생각이 났다. 로자는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고 생각이 깊었는데, 단순히 똑똑한 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마주한 사랑에도 늘 당당했다. 요구할 게 있다면 요구했고, 사랑하고 있다면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 책을 다 읽고 하루를 지내면서 생각한 건,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똑똑하기만 해서도 안되고, 마음이 따뜻하기만 해서도 안된다는 거였다. 지금 우리나라 대통령은 대학시절 성적이 좋았고(우리는 이미 시사인에서 그녀의 대학시절 성적표를 본 적이 있잖은가), 증명된 바는 없지만 몇 개의 외국어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사실 정말 대통령이 똑똑한지 어떤지 증명된 바는 없지만, 어쨌든, 똑똑하다고 쳤을 때, 그러나 대통령은 제대로 사랑할 줄을 몰랐다. 지금도 모르고 있다.

로자가 노동자들의 편에 서고, 전쟁을 반대하고, 사람들 앞에서 뜨겁게 연설하며, 경제를 연구했던 이 모든 것들은, 인간에 대한 관심이었고 사랑이었다. 로자는 채찍으로 맞으며 일하는 물소 앞에서도 뜨거운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그건 녀석의 눈물이었죠.

루마니아의 그 아름답고 자유롭고 보드랍고 푸르른 초원은 이제 얼마나 멀어져 버렸으며 얼마나 돌이킬 수 없이 잃어버리고 만 것일까! 
그리고 여기, 이 낯설고 추악한 도시, 음울한 축사, 구역질나는 것들, 썩은 지푸라기들이 섞인 더러운 건초더미, 기이하고 두려운 인간들,
-온통 구타와 상처에서 흐르는 피...
아, 이 가엾은 물소, 내 가엾은 사랑하는 형제!
우린 둘 다 할 말도 잃은 채 무력하게 여기 서 있고, 똑같은 통증과 무기력과 그리움을 느끼고 있었어요. (p.144)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더 나은 곳으로 이곳을 바꿔야 한다는 강한 열정, 이 모든 것들이 그녀가 차곡차곡 쌓아올린 지식과 더불어 그녀를 자꾸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게다가 인상적인 건,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을 자신의 몸으로 어떻게든 해내려고 하면서, 사랑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녀는 젊은 시절부터 뜨겁게 사랑했고 뜨겁게 이별했다. 그녀가 사랑하고 이별하며 그 모든 감정들에 충실했던 것들은, 그녀를 한층 더 성숙하게 만들었다. 그녀 자체도 자신이 성숙해졌음을 느낀다. 어쩌면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모습은 지성과 사랑할 줄 능력-비단 연인을 향한 것만이 아니라-을 모두 갖춘 모습이 아닐까. 그런데 우리가 지금의 정치인들에게 환멸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어느 한쪽만 가까스로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 코르셋을 착용하는 대신, 코르셋을 벗어던져 허리 둘레가 넓어진 자신이 어떠냐고 묻는 사람이다.



그녀가 많은 책을 읽고 이해를 하고 생각을 하고 글을 쓰고 연구를 하는 모든 행위들을 하는 것도 분명 보통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난 면이 있지만, 그런 그녀가 더 돋보일 수 있는 건, 그녀가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는 그 모든 행위에 있어서도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으며 자신의 사랑 앞에 당당했다는 거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걸 알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 모든 감정들을 솔직히 인정하며, 그 감정들에 푹 빠질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우린 평생 함께할 계획이 천 개는 있었어요. 인생을 만끽하고, 여행을 다니며, 좋은 책을 읽고, 지금껏 못해봤으니 다가오는 봄을 경이로운 눈으로 맞아보고 싶었죠. (p.142)


실행될 수 없는 천 개의 계획에 대해 마음이 무척 아프다. 그녀와 함께 울고 싶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궁금해져서 그녀에 관한 책을 좀 더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검색을 해봤다.


















맨 처음의 책이 '평전'이란 이름을 달고 있어서 읽어보고 싶어졌는데 지은이가 '막스 갈로'라서 망설여진다. 내가 막스 갈로의 책을 읽고 뭔가 되게 지루하다고 생각했는데..뭐였지? 검색 좀 해보자..나폴레옹 이었나??









아하하하. 그래, 나폴레옹이 맞았어! 내가 저 다섯 권 읽느라 진짜 얼마나 힘들었는지, 원. ㅠㅠ

아 머리 아프다 히융.



최근에 읽은 이 책 [레드 로자]와 주말에 본 드라마 [아이가 다섯](제목이 이게 맞나??), 영화 [나이트 인 로댄스], 그리고 지금이 선거철 이라는 것 때문인지, 이 모든 것들이 섞인 복잡한 꿈을 꿨다. 꿈에,


나는 아들 둘의 엄마였다. 나는 사회생활이 굉장히 바빠서 아이들을 돌볼 짬이 별로 없는 것 같더라. 어쨌든 그 날도 집에 갔는데 어린 둘째 아들이 엄마는 항상 바쁘다며, 그런데 엄마를 봐서 너무 좋다며 안겨드는 거다. 나는 아이에게 폭풍 입맞춤을 해주고 잘자라고, 완전 사랑한다고, 내일 아침에 네가 자고 일어나도 엄마는 있을 거라고 말해준 뒤에 아이를 재웠다. 그리고 자려고 침대에 누웠고 금세 잠이 들려는데, 잠이 들려는 시점에서 나에게 남편이 있는건지 아닌지 잘 모르겠는 거다. 나 남편 있나? 아이들 혼자 키우나? 그래서 벌떡 일어나 두리번 거렸는데, 저 쪽 침대에 남자가 혼자 자고 있더라. 아, 남편 있구나, 그런데 왜 저기서 자지? 우리는 별거중인가? 아니면 그냥 침대 따로 쓰나? 하고 갸웃하다 다시 잠들었고, 그렇게 아침이 되었는데,


아이가 둘인지 셋인지 여튼 하나는 아닌 여동생이 우리집에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온 거다. 자신은 너무너무 바쁘다며 아이들을 좀 봐달라고. 그래서 나도 겁나 바빠 네 아이들을 돌볼 짬이 없다, 우리 애들을 네가 봐라, 하며 티격태격 하고 있으려니, 왜때문인지 하루종일 아무 할 일도 없는 나의 남편이 나와서는 걱정말라며, 아이들 모두를 본인이 보겠다고 하는 거다. 그래서 그러라며 고맙다고 우리는 각자 나갔다.


그런 여동생과 나는 한 동네에서 마주친다. 여동생은 선거운동 중이었다. 아하하하하. 동네 어른들은 여동생과 악수를 하고서는 참 훌륭한 사람이라며 칭찬들을 해댔다. 나 역시 선거운동중이었는데, 나를 뽑아달라는 건지 내가 지지하는 자를 뽑아달라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동네 사람들과 악수하며 인사를 나눴다. 내가 속한 정당은 내 여동생이 속한 정당과는 달랐는데, 동네에서 인사를 나누는 분들은 나를 보고는 '동생도 훌륭한데 언니는 더 훌륭하다'며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아하하하. 내가 이런 사람이다. 그러다가 아이들과 함께 놀다 집으로 돌아가는 나의 남편을 마주쳤다. 동네분들은 그를 잡고서는, '당신 와이프가 정말 훌륭한 사람이다, 그걸 당신이 꼭 알아야 한다' 라고 말했다. 음... 아이들하고 놀아주지 못하고 이렇게 바깥에만 나와있는데 내가 훌륭한걸까...라고 잠깐 생각하며 빨리 끝내 나도 아이들하고 놀고 싶은데..... 생각을 했다.



이게 로자와, 아이가 다섯인 드라마와, 당신을 가진 게 얼마나 행운인지 모른다면 그 사람은 바보입니다, 하는 영화를 봐서 꾼 꿈이었던 것 같다.



예전에 책 [람세스]에서, 이집트 왕 람세스는 왕비 네페르타리와 함께 정치를 한다. 왕비는 지혜롭게 그와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데, 아름답고 우아하며 게다가 정치적 안목까지 있는 그녀는 감히 내가 따를 수 없는 부류의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고, 그런 그녀를 보면서 나는 '야, 나는 왕비는 못하겠고, 그냥 왕의 세컨드나 해야겠다, 정치 같은 건 다른 사람이 하게 두고 나는 사랑이나 하고 살아야겠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보면 지혜로운 왕비와 그 왕비를 의지하는 왕을 보며 질투를 느끼기도 하겠지만, 내가 속 편하게 살려면 나는 그냥 사랑만 하고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아, 나란 인간은, 로자와 정말이지 얼마나 다른가... 나는 이렇게나 소박해서 민중 앞에 서서 이 모든 걸 뜯어고치자고, 일어서자고 말하는 대신, 초콜릿에 커피나 마시며 서초구 양재동에 쭈구리고 앉아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로자는 로자의 할 일이 있었고 나는 나의 할 일이 있는 거라고 생각해보지만, 사실, 내가 할 일이 뭔지 잘 모르겠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어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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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6-04-05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레드 로자 그냥 책표지만 봤을때는 만화인줄 몰랐는데, 다락방님 페이퍼를 보고 만화라는것을 알았어요. 그냥 글이었다면 못 읽을텐데, 만화라 좀 더 쉽게 접근할수 있을것 같아 읽어보고 싶어져요.^^

다락방 2016-04-06 08:40   좋아요 0 | URL
저도 만화인 줄 몰랐다가 만화인 걸 알게된 후에 구입했어요, 보슬비님. 만화라면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만화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으로 시작했다면 아마 다 못읽지 않았을까.. 싶더라고요. 그런데 이제는 좀 더 알고 싶어져서 평전에 도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쪽수가 어마어마해서 확 지르진 못하겠지만요. 으흐흐흐.

읽어보세요, 보슬비님. 이 책 좋더라고요.
:)

2016-04-06 0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06 0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6-04-06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드 로자, 정말 멋진 여자였네요.
사랑에서도 일에서도요.
자기 앞의 남자를 사랑할 줄 알고 종으로서의 인간도 사랑한 사람이네요.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만화라서 읽는 거 아니예요. 다락방님 페이퍼 보고 내용이 궁금해서 읽는거예요.

그리고 동생분 학교 선생님 제안.... 잘 진행되고 있죠? ㅎㅎ
저도 생각해 봤는데요(뭐 이래.... 나, 다락방님 매니저예요? 내가 스스로 막 생각해보나요?ㅎㅎ)
좋은 기회 같아요. 다락방님도 다락방님이지만 아이들에게도요.
조금만 용기내 보세요~~
전에, <순수의 시대> 페이퍼에서 소설에 대해 이야기한거 있잖아요.
그것만해도 한 시간은 족히~~ (뭐래.... 나 내용도 생각하고 있어요? )

다락방 2016-04-06 09:39   좋아요 0 | URL
네, 로자는 너무나 근사한 사람이었던 거에요. 종으로서의 인간도 사랑하고 또 물소에게도 공감할 수 있는 여자였죠. 게다가 똑똑하기까지 하니, 정말 멋진 여자였던 거에요! 세상엔 저런 사람도 있고 저같은 사람도 있고...(응?)

동생 학교는 얘기가 한 번 더 나오면 그때 한 번 만나서 `나한테 뭘 원하나요?` 물어볼 작정인데, 아직 그 뒤로 얘기는 없어요. 이대로 저는 묻힐지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프렌즈 위드 베네핏>영화 얘기로 시작해서 소설 무시하는 병신들에 대해 얘기해야지, 라고 생각했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