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얼마간 나는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 집에서 혼자 홀짝 홀짝 술을 마셨다. 때로는 와인이었고 때로는 소주였다. 그게 뭐든 일단 까면 한 병을 다 마셨다. 안주는 뼈해장국일 때도 있었고 방울 토마토일 때도 있었다. 아, 어제는 피자였구나. 친구들이 만나자고 해도 다 거절하고 그저 퇴근후 집에 가서 초라한 술상을 봐서는 홀짝홀짝 했다. 어느날의 안주는 너무 빈약했는지 다음날 아침에 속이 너무 쓰렸다. 평소에 숙취가 없던 나로서는 아아, 이건 뭔일이야 싶어서, 이러다가 술 못마시겠네, 걱정스런 마음에 당장 컨디션 한 박스를 주문해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속쓰리지 않게 컨디션 마시자, 하고. 술을 그만 마실 생각을 하진 않았었다. 그렇게 얼마간을 지낸걸까, 남동생으로부터 알콜중독자 되겠다는 걱정하는 소리를 듣고, 또 이미 엉망이 된 얼굴을 보고, 이 짓을 그만둬야겠구나, 생각했다.


라지만 그만두지 못했다. 술은 사랑이잖아요... 다 떠나가도 술은 남잖아요....


어쨌든, 

그 시간동안, 내가 술 마시는 동안,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내 곁에는 나와 함께 술마셔주는 일일드라마가 있었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나는 그 존재도 알지 못했던 일일드라마를 틀어두고, 그 앞에서 술을 마셨다. 평소에 텔레비젼을 보지 않고, 그래서 어느 연예인이 인기인지, 왜 인기인지 같은 걸 전혀 알지 못했던 나였지만, 어쨌든 최근에는 그렇게 집에 돌아가서 씻고, 술상을 보고, 일일드라마 앞에 앉았던 거다. 그래서 <우리집 꿀단지>라는 드라마의 고정 시청자가 되었다. 미리 말해두는데, 그 드라마는 엉망진창이다. 어쩌면 엉망진창이라서 뼈해장국과 소주를 앞에 두고 보기에 적절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적절한 게 무슨 상관이야. 뭐, 뭐라도 좋았다. 뭐가 하든 해라. 앞에서 떠들어라, 이런 심정이었으니까.






어쨌든 드라마에 나오는 여자주인공 '봄'이는 전통주 회사에 다니는 절대미각의 소유자이다. 나이도 어린데 술에 대한 미각이 장난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술을 잘도 연구해낸다. 그녀는 같은 회사에 다니는 '마루'와 결혼을 약속했다. 둘다 여차저차한 불행한 어린 시절을 겪었지만 어쨌든 현재 봄이는 이 전통주 회사 사장의 딸이고 마루는 가장 큰 주주의 아들이다. 이 둘은 젊은데 일에서도 어마어마한 능력을 발휘한다. 술을 연구하든 영업을 하든 완전 짱이다. 게다가 착실한 마음 씀씀이며 어른을 공경하는 태도,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도 진국이다. 뭐 하나 모자란 게 없는 젊은이들인 것이다. 이 회사에서 봄이 엄마가 누명을 쓰고 쫓겨나게 되고 다른 사장이 취임하는데, 그러면서 어마어마한 인재를 미국으로부터 스카웃 해오게 된다. 그 인재는 '제니'라는 이름의 마루 '전여친'이다. 아하하하하. 말도 안되는 드라마가 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이제부터 뿌려대는데, 이 '제니'는 스카웃 제의를 그냥 수락한 게 아니다. 다 전남친 마루를 다시 찾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녀는 이 회사에 오자마자 봄이를 마루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수를 쓴다. 업무상 봄이가 위기에 처했다며 마루를 자기가 머무는 호텔로 불러서는 그 자리에 봄이를 불러 함께 있는 모습을 보게 하는데, 이로 인해 봄이와 마루는 오해가 생겼지만 어쨌든 지금은 푼 상태다. 그런데 어제는 마루가 봄이에게 주기 위해 보석가게에서 귀걸이 산 걸 몰래 보고는, 제니가 바로 들어가 '방금 저 남자가 사간 거랑 똑같은 거 주세요' 해서는, 봄이 앞에서 똑같은 귀걸이를 한다. '마루는 나한테 줬던 거 다른 사람한테도 주네' 이딴 소리 해가면서.... 이게 어제 본 장면인데, 내가 보는 걸 옆에서 보던 남동생은 


누나 이런 거 보냐...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건 뭐 너무 말이 안되는 거라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거기서 끝이 아닌게, 마루가 봄이한테 오늘 할 얘기 있으니까 꼭 나와줘, 하고는 초대장을 줬는데, 이 제니라는 여자가 봄이 책상에서 그 초대장을 보고 봄이의 핸드폰도 보더니, 초대장에 쓰여져있던 장소인 까페로 자기가 가는 것이다. 마루는 거기에서 봄이에게 프로포즈를 할 작정이었고, 그 이벤트 준비로 바빴다. 촛불 여러개에 불을 붙이고 풍선을 불어놓고 하면서. 아마도 그 까페를 빌린 모양인데, 어쨌든 그 프로포즈 자리에 양가 식구들을 다 불렀었다. 이 자리에 제니가 먼저 나타나서는 '나 이제 미국으로 돌아갈게, 그래도 우리는 친구지' 하면서는 마루를 끌어 안는 거다. 그리고 그 때 봄이를 비롯한 식구들 등장하여 이 포옹장면을 보게 되고.......



남동생은 빡치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야, 이게 뭐냐 진짜 허접하다 이러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야, 그러지마, 내 술친구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면서 여자주인공이 가수라고 했다. 아 그래? 누구? 물었더니, 아 누구지 뭐지, 하면서 '너는 내 별빛' 하는 애들 있잖아, 그러길래 검색해보니 '시크릿'의 멤버였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오오, 여주가 가수였구나, 남주도 가수야? 물었더니 그건 모르겠단다. 어쨌든 그런 드라마를 나는 몇 주간 봐왔던 것이다. 봄이랑 마루 화이팅!!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니에 대해 생각했다.
헤어졌던 남자를 다시 차지하기 위해 그가 있던 곳으로 왔던 여자를. 그런데 이미 그에게는 여자가 있다. 자신은 그 남자를 '차지'하기 위해 왔기 때문에, 그 남자 옆에 있는 여자를 '치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자꾸 계속되는 오해를 만든다. 이 드라마의 가장 말이 안되는 점 한가지는, 이런 억지 생각을 하는, 말도 안되는 유아적 발상을 하는 여자가, 외국으로부터 스카웃해와야할 어마어마한 인재이며 팀장이라는 것이다. 다들 나보다 십 년이상 어려보이는 애긔애긔 한 사람들인데, 도대체 어디서 뭘 어떻게 공부하면 저 나이에 팀장이 되고 유능한 한 축이 되고 그러냐...뭐, 능력 차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치자. 어쨌든, 그래서 제니는, 그런 오해에 오해를 만들어 마루와 봄이 사이를 떼어놓으면,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야광토끼'의 노래 <can't stop thinking about you> 가사에 보면, 


만약에 내가 너를 그녀보다 먼저 알았더라면
그래도 넌 그녀를 택했겠지 난 그냥 아닌거지


라는 부분이 있다. 크- 절절하다. 그렇지만 저게 사실인 것이다. 극중에서 봄이는 제니에게 '나랑 마루가 헤어져도 마루가 너한테는 안가' 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이 사실인 것이다. 그가 나에게 '아니'라고 말했을 때는, 내가 '아니'기 때문인 것이지, '다른 사람 때문에'가 아닌 것이다. 


















영화 [세렌디피티]에서 남자는 결혼을 사흘 앞두고, 7년전에 잠깐 만났던 여자를 꼭 한 번만이라도 만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녀가 갔던 백화점에 가고, 그녀가 장갑을 샀던 매장에 가 어쨌든 그녀가 살던 집을 알게 된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그녀가 사는 곳으로 갔다가 허무한 장면을 맞닥뜨리는데, 결국 기운이 빠져서는 잔디에 누워, 자신과 함께 고생하고 비행기를 타준 친구에게 묻는다. 


내가 왜 이러는걸까?



그러자 친구가 대답한다.



넌 결혼하기 싫은 거야.



남자는 결혼을 약속했지만, 그녀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7년전의 그녀를 잊을 수가 없었다. 꼭 한 번은 다시 만나야 했다. 결혼이 다가올수록 그런 마음이 더 강해졌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랬을까? 왜 그녀 생각이 간절했을까? 그는 물론 결혼을 약속한 여자를 나름대로 사랑했겠지만, 충족되지 않았던 거라고 본다. 집중하고 충족할만한 상대는 아니었던 거라고. 어딘가 공허하고 비었던 거라고. 꽉 채워주지 못했던 거라고. 그래서 자기의 결혼이 정말 해도 되는건지, 확신을 갖고 싶었던 걸거다. 그건 결혼을 약속한 여자의 잘못은 아니다. 그저 그런 거다. 여자도 마찬가지. 남자친구한테 프로포즈를 받았고 예스라고 말했지만, 7년전의 그 남자를 꼭 만나고 싶었다. 여자도 자신이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반드시 그래야했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처음 만났던 장소를, 상대가 있다고 생각되는 장소를 무작정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여자 역시 그게 필요했다. 그를 꼭 한 번 다시 만나는 게. 이 또한 약혼한 남자의 잘못은 아니다. 남자와 여자의 상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겐 꽉 차는, 완벽하게 충족되는 사람일 수도 있다. 문제는, 각자의 약혼자가 자신과 결혼할 상대를 충족된 상대로 여겼다면, 그때 벌어진다. 나는 너로 인해 충만했고 충족했고 꽉 찼어, 그런데 너는 내게 결혼을 취소하자 말해, 라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한 쪽은 충족되고 한 쪽은 충족되지 않는 일이?



남자와 여자는 서로 만났다. 우연이 반복되고 어쩌면 운명이었을지 모를 그들은, 서로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어, 상대를 찾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까지 더해져서, 결국은 서로를 만났다. 그들은 자신들의 만남을 기념하여 기념일을 되새기고 축복한다. 그들은 이제 더이상 다른 사람을 찾지 않도록 서로를 완벽하게 충족시켜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로부터 이별통보를 받은 상대들은, 이제 어떻게 될까? 어쩌면 '잘됐어' 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어쩌면 '그래 우리에겐 이 헤어짐이 나았을 거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또 어쩌면 '어디서부터 잘못되어서 이런 일이 생긴걸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고 또 어쩌면 '나에게 그(녀)는 더할나위 없이 충만한 상대였는데 이제 그 사람이 내 인생에 없으니 내 삶도 여기서 그만 정리해야겠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는 내게 속한 남자가 아니라 그녀에게 속한 남자였다. 죽자, 나는 생각했다. 죽자. 내게 닥친 고통에 맞서 죽음만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p.105) 












다시 <우리집 꿀단지>로 돌아가서, 제니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르겠다. 내가 혼자 마시는 술을 끊는다면 아마 제니를 다시 볼 일도 없을 것이고,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도 볼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영화였다면, '모니카 마론'이 [슬픈 짐승]에서 그랬듯, 죽자, 내게 속한 남자가 아니라 그녀에게 속한 남자이니 죽자,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녀가 그렇게 애를 써서 봄이와 마루 사이를 떼어놓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게 떨어뜨려놔서 자기한테 설사 온다해도, 그 이후의 삶이 행복할 것 같지가 않아서다. 그리고 그렇게 좋지 않은 일에 자기의 에너지를 쏟지 않기를 바란다. 일에서도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진 그녀인데, 거기에서 받은 긍정적 기운을 다른 연인의 불행에 다 쏟으려고 한단 말인가. 그녀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한편 묻고 싶어진다. 그렇게 해야만, 그래야만 당신이 후회가 없겠냐고, 그게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의 일이냐고. 만약 그녀가 '그렇다'라고 답한다면,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 그녀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다른 사람의 불행에 쏟아 붓는다해도, 그저 바라볼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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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6-03-29 11: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혼자 술마시는거 이거 중독의 전조증상입죠...사실 뭐 중독 아닌게 있습니까만은....다들 밥중독, 일중독이고, 잠중독이고 독서중독이고 그렇지요...뭐

혼자 술 마시는 거 나름 의미(무슨 의미? 하여튼)도, 재미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소생이 뭐 주당도 주류도 아닙니다만은...제가 소싯적에 취업 준비할 때... 해 떨어지고 밤 깊을 때까지 도서관에 앉아 뭉게고 있다가 마지막 버스 타러 가기 전에 정류장 근처 포장마차에 서서 혼자 마시던 잔 소주 생각이 납니다. 잔 소주 2~3잔에 닭꼬치 1~2개, 아니면... 오뎅...과 국물....그 잠시잠깐의 순간이 하루 중 가장 마음 편안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 소주 두어 잔에 취해 졸다가 꿈결에 누가 `학생~` `학생~` `학생~` 애타게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 보면.... 버스종점...ㅜㅜ

그나저나 `평소 숙취가 없`다니 놀랍습니다. 타고나신 듯. 주당계의 금수저 ^^

다락방 2016-03-29 11:47   좋아요 2 | URL
주당계의 금수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빵터졌네요.
붉은돼지님 댓글 읽고나니까 해봐야지 생각했는데 못해본 게 딱 떠올랐어요. 강변역 포장마차에서 혼자 우동에 소주마시기요. 이거 계속 해봐야지 했는데 못해봤네. 생각난김에 이번주에 해봐야겠어요. 그러면 뭔가 다 하는 것 같은 완성된 느낌이랄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평냉, 수육에 소주까지는 혼자 해봤거든요. 포장마차를 아직 혼자 안해봤네. 아, 도전할 것이 있다니, 신나는 세상입니다! ㅎㅎㅎ 지금 읽는 책에서 `홀로서기`에 대한 게 언급되는데, 완벽 홀로서기를 위해 포장마차 혼자 술마시기에 도전하겠어요!! >.<

2016-03-29 2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30 1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월 2016-03-30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드에 영화가 많은데도, 술을 마시려고 보면 너무 서정적인것, 진지한 것, 줄거리가 복잡한 것 다 제치다보니 볼게 없죠. 얼마전엔 비포선라이즈를 틀었는데, 점점 취하면서 대사를 따라갈수없어서 포기... 일일드라마 한 번 시도해봐야겠네요.

다락방 2016-03-30 11:14   좋아요 1 | URL
네, 좋은 영화 같은 건 특히 술 마시면서 보기에 무리가 있고요. 개그프로그램 다시보기로 볼랬더니 여성비하, 외모비하가 너무 심해서 보다가 화가 나더라고요. 저는 주로 일일드라마를 비롯해서 <나는 자연인이다>, <걸어서 세계속으로>를 다시 보곤 해요. 나는 자연인이다와 걸어서 세계속으로도 술마시면서 보기에 좋아요!

2016-03-30 0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30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30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