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61년산 슈발 블랑
어제 퇴근전까지는 기분이 좋았는데 사무실을 나서면서부터 급격하게 기운이 쫙 빠지더라. 역시 회사를 다닌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뭐 꼭 회사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기운이 쫙 빠져버린 나는, 퇴근후 역삼역까지 걷겠다는 호기로움을 뒤로한 채, 양재역에서 그냥 지하철을 타버렸다. 아 기운없어. 걷기 싫어. 지하철 타자. 지하철을 타서는 이번호 시사인을 읽다가 꾸벅꾸벅 졸았고, 아, 와인을 마셔야겠다, 하는 생각으로 한 정거장 더 가서 내려 마트에 들어가 와인을 샀다.
아름답지 않은가!
늘 그랬듯이 2만원에 세 병하는 와인을 카트에 담고 가려다가, 문득 며칠전에 프레이야님께서 댓글로 언급하셨던 '지공다스' 생각이 나서, 그래, 그거 한 번 마셔볼까, 하고 와인 매대를 쭉 둘러봤다. 영화 [화장]에서 김규리가 주문한 와인이라던데, 댓글로 만났을 당시 검색했더니 3만원이 조금 넘는 가격이었다. 그래, 이번엔 와인에게 거금을 투자하자! 나에게 사치를 허락해! 3만원 넘어도 사자! 그치만 4만원은 곤란해....라고 생각하면서 35,000원 안쪽이면 좋겠는데...했다. 그리고 똭- 힘들게 찾아낸 지공다스는 오, 29,900원!!!! 꺄울. 좋았어. 그러니 이렇게 와인을 네 병 사도 5만원이 안넘어!!! 49,900원!!!
오늘 당장 마시고 싶었지만 좋은 와인을 엄마도 맛보게 해드리고 싶었다. 메르스 때문에 유치원도 어린이집도 애들을 보내지 못해, 엄마는 이번주내내 조카들과 계속 함께 지내야 하셨던것. 크- 얼마나 힘들고 스트레스 받았을까. 주말에 집에 돌아오시면 나를 붙잡고 또 폭풍수다 떨고 싶어하실테니, 이 좋은 와인을 엄마랑 함께 마시자!!
나는 와인을 사들고 계산을 마치고 마트 바깥으로 나오면서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좋은 와인 샀거든, 토요일에 함께 마시자, 라고 했다. 나는 엄마가 꺅 거릴거라 생각했는데 엄마는
넌 돈도 많다
라고 하셨다.
하아- 기운빠져...엄마.......그러지마.......그러면 내가 혼자 내 식도 열고 다 부어버리는 수가 있어......이거 3만원짜리 와인인데.... 하아- 좋으면서 왜 저렇게 말할까...... 이제나저제나 내가 집에 오길 기다렸다가 술마시고 싶어하면서, 왜 저렇게 말할까....그러지마..... 하아- 기운빠져.....
기운빠진 어제, 샤워하고나서 너무 피곤한 나머지 그냥 잘까 하다가 치즈에 와인을 꼭 먹고 싶은 거다. 그래서 와인을 따라서는 텔레비젼 앞에 앉아 약간의 치즈와 토마토를 썰어놓고서는 홀짝홀짝 마셨다. 반 병 정도를 마시고는 뭔가 흐물흐물해진 마음으로 이제 자야지,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나한테 와인을 늘상 박스로 대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 뭐지, 드라마 [상속자들]인가, 그거 보니까 와인저장창고가 있던데...나도 그런 거 있었으면 좋겠다. 와인 저장 창고도 있었으면 좋겠고, 소주랑 맥주 냉장고도 있었으면 좋겠어....
암튼 와인 얘기로 시작했으니 계속 와인 얘기를 해보자.
이 영화를 아직도 안보셨다면 보시길 강력 추천합니다. 크- 계속 술마시는 영화에요.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와인 만쉐이~!!
이 영화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61년산 슈발블랑' 신이 있다.
"수집한 것중 가장 좋아하는 와인이 뭐예요?"
"61년산 슈발 블랑이요."
"와우. 그걸 어떻게 마시지 않고 두고만 있을 수 있죠?"
"특별한 순간에 특별한 사람과 마시고 싶어서요."
"당신이 그걸 마시는 순간이 특별한 순간인거예요."
나의 옷장 속에는 두 개의 술이 보관되어 있다. 하나는, 나의 61년산 슈발블랑. 아, 진짜 61년산 슈발블랑은 아니고, 작년에 선물 받은 와인인데 이걸 언제고 '특별한 순간'에 마시자, 싶어서 옷장 안에 넣어두고는 옷장 문 앞에 4키로짜리 덤벨로 막아두었다. 이 옷장을 열려면 4킬로짜리 덤벨 두 개를 들어서 옮겨야 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년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술을 지키기 위해 조낸 철저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은 인증샷 찍기 위해 내 기꺼이 덤벨 두 개 치우고 아침부터 꺼내서 책장에 놓아보았다.
올해 초, 대출 상환을 완료하고 혼자 마실 생각이었는데(수고했다 ㅠㅠ) 그때는 엄마랑 남동생이랑 그냥 싸구려 와인 놓고 축하하느라 기회를 놓쳤어...이건 꼭 !!!!!!!!!!!! 반드시 !!!!!!!!!!!!!!!!! 혼자 마시고 싶다. 그리고 좋은 데서. 지금 나름 계획하는 건 두번째 책이 나온다면(응?) 혼자 호텔 잡고 들어가서 책을 놓고 건배하는 것...인데.....그러다 계속 옷장 속에 있는 신세가 되는 건 아닌지...
그런데 옷장 속에 와인 둬도 되나? 와인 냉장고도 아닌데? 좀 걱정되네.... 여튼 혼자 마실거다! 크- 마일스처럼, 나도 특별한 순간을, 이 와인을 개봉함으로써 만들어주겠어.
그나저나 사진 올리면서 생각한건데 뒤에 문동전집 대신 민음사 모던클래식이 있는 게 더 예뻤을 것 같다. 음..민음사 모던클래식을 배경으로 찍을걸... 음...나중에 다시 도전해봐야지.
그리고 옷장 속에 있는 또다른 술은 바로 이것, 수정방!!
이건 면세점에서 12만원이나 주고 산거다. 나 12만원짜리 술 사는 녀자. 움화하핫. 이 술을 좋아하는 남자랑 같이 마실라고 내가 샀다. 나는 남자랑 마실라고 12만원이나 되는 술을 사는 여자사람. 암튼 내 옷장속에 이렇게 두 개의 술이 있어. 든든하다.
아, 그 뭐였지, 둘런과 모리스..어쩌고 하는 책이었나. 남자가 여자에게 청혼할 때 와인을 한 박스 주던데, 되게 멋지다고 생각했다. 자동차 뒷트렁크 열고 풍선 날리는 것보다 오백배쯤 더 멋져. 풍선 같은거 날리지마...사람들 다 보는 데서 청혼하는 것보다 더 멋진 게 와인 한 박스 주면서 청혼하는 것 같은데, 그런데....와인 한 박스.... 금방 마시잖아. 그건 너무 일회성 느낌이다. 그래서 요즘엔 와인 한박스는 내가 사도 되는거니, 그보다 더 큰 걸로 청혼하는 남자가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게 예전에는 '나는 와인 (한박스는 적으니까)두박스로 청혼하는 남자 만나야지' 이랬었는데, 지금은 와인 창고를 마련해두고 창고 문을 열면서 자, 이게 나의 와인 창고야, 여기 있는 모든 와인은 네 와인이기도 해, 언제나 이 창고를 가득 채워둘게, 라고 말하는 남자여야만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안주는 내가 쏠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로맨틱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조낸 좋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창고 안에 아예 식탁을 두는 거다. 한 병 다 마시고 또다른 한 병을 마실 때 왔다갔다 동선이 길면 안돼, 흥이 깨져, 그냥 창고안에서 먹는 거야. 창고 안에서 먹으면서 다 마시면 아 이제 이거 딸까? 이러면서 이거 따고, 이젠 저거 따자, 이러면서 저거 따고....그렇게 살고 싶다........그러니까 결과적으로는 혼자서 책읽고 글 쓰면서 와인 마시는 삶도 필요하니 서재가 있는 집이 필요한데 여기에 와인 창고가 있어야 되는 거야. 그리고 포치! 포치도 있으면 날 좋을 때 석양을 바라보며 또 와인을 마시는 거지. 그런데 같이 사는 사람과 서재를 같이 쓰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 너는 네 서재 나는 내 서재, 와인 창고, 포치...아, 내가 살고 싶은 집은 대체 얼마나 큰 집이어야 하는가....현실은 시궁창인데.... 내 로망이 너무 커 나는 이렇듯 엄마랑 사는구나.....
이렇게도 살고 싶고.
(사이드웨이)
이렇게도 살고 싶고
(와인 미라클)
이렇게도 살고 싶다.
(그랜토리노)
아 근데 포치에서 맥주 마시는 사진이 뭐가 있을까 검색하다가 이렇게 욕나오는 사진을 보게 됐다. 레스토랑 광고하는 메뉴중에 하나인듯 한데, 한국은 아니고...
아..보자마자 욕나왔어. 이렇게 어마어마한 음식을 앞에 두고 욕이 튀어나오는 나를 돌이켜보면서, 아, 섹스할 때 욕하는 사람이 이해될라 그런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다.
아 고칼로리 음식 잔뜩 먹고 싶다. 늘 그랬듯이.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