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가 물고 간 할머니의 기억 그림책 다락방 4
상드라 푸아로 셰리프 글.그림, 문지영 옮김 / 한겨레아이들 / 2015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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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이 jtbc 뉴스에 나와 손석희와 대화 하면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앞으로는 이미 시작된 사랑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 과정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다고.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보통이 말한 요지는, 이 세상에 사랑이 시작되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은 많지만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그 사랑의 상태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는 적다, 사람들이 별로 관심없어한다, 는 거였다. 그래서 그걸 자신이 해보겠노라고. 나는 그간 보통의 책을 여섯권 정도 읽었고, 그 여섯권들중 어떤 책에서도 보통의 매력을 느끼지 못해, 앞으로는 보통의 글을 안읽어도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인터뷰를 보며 앞으로 보통이 자신이 말한 바로 저 책을 쓰게 된다면, 그 책은 반드시 읽어보겠노라고 생각했다. 사랑이 시작되기 전의 그 설레임이 아닌, 이미 진행되고 있는, 혹은 아주 오래 진행되고 있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면, 나는 관심이 많다. 사실 그 관심은 '그게 정말 가능할까?' 라는 의심에서 시작됐다고 하는 게 솔직하며 정확할 것이다. 


사랑에는 유통기한이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그 기한이 2년인지 3년인지는 모르겠다. 2개월인지 15년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설레임으로 시작된 사랑이 설레임으로 계속 지속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혹여 오래 지속된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의 속성은 설레임이 아닌 무엇, 이를테면 익숙함이나 습관 같은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내 사랑이 늘 짧았던 이유였을런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랜 시간을 함께 하고 있는 부모와 지내고 있으면서도, 실상 내 부모의 관계를 받치고 있는게 '이성간의 사랑' 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들의 의리, 정, 신뢰, 습관, 연결. 그런 것들이 내 부모를 지금에 이르게 한 게 아닐까. 물론 의리나 정, 신뢰등을 사랑의 또다른 이름이라 부른다면 그들의 바탕이 사랑이라고 해도 부인할 수 없겠지만, 여전히 내게는 사랑은 설레임이나 긴장이라는 생각이 강한 까닭이다. 나는 사랑은 지속될 수 없다는 현실성을 충분히 인식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사랑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가보다. 아니, 그렇다. 그래서 나는 길고도 긴 사랑은 무섭다. 변질되는 감정일까봐 두렵다. 그런 것들이 내것이 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그런 한편, 길고 긴 관계를 유지하는 연인들 혹은 부부를 보는 것은 존경심을 자아낸다. 아, 어떻게 저렇게 지낼 수 있을까, 어떻게 저렇게 오래 함께하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열정이라고 내가 믿는다면,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 열정이 아닌 다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책, [까치가 물고 간 할머니의 기억]을 보면, 내가 모르는 무엇이 있는 것 정도가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란 생각마저 든다. 나는 어쩌면, 사랑이란 것에 대해 정말 쥐뿔도 모르는 걸지도 모르겠다. 

여기, 기억을 잃은 할머니가 있다. 오랜 시간 할아버지랑 함께 살아온 할머니. 피자를 먹고 싶으니 피자를 사오겠다고 했지만, 그 말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할머니, 자동차 열쇠가 어디있는지 통 찾을 수가 없는 할머니, 그래서 먼 길을 오랜 시간을 걸려 집까지 걸어가야 했던 할머니. 그리고 그런 할머니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할아버지가 있다. 결국 할머니가 언젠가 자기를, 그리고 그들의 자식에 대한 기억마저 잃을까 두려워하는 할아버지. 그녀를 위해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를 고심하는 할아버지. 그리고, 이런 문장.




정말이지 예쁘구나, 하고 할아버지는 생각합니다.



이건..뭐지? 잠든 아내의 모습을 보며 정말이지 예쁘구나, 하고 생각하는 할아버지라니. 이건 뭐지? 이건 사랑이잖아. 이건 애정이잖아. 그렇다면 사랑이란 게, 유통기한 따위, 없는 거 아니야? 정이나 신뢰 혹은 의리 같은 거 말고, 그런거 말고 더한 무엇이 거기 있는 거잖아. 오랜 시간을 함께 살아와도 질리지 않고 지치지 않는 거, 그게 사랑 안에 있는 거잖아. 그리고 이들은 지금, 그걸 하고 있는 거잖아.


이 사람을 위해서 무얼 할 수 있을까, 를 고민하는 할아버지라니. 이런 사람들이 하고 있는게 사랑이 아닐 리가 없잖아. 밤중에 잠을 못이루고 옆에 잠든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는 거, 이게 사랑이 아닐 리가 없잖아? 



마흔다섯이 되고 일흔둘이 되어도 연애를 즐기며 살겠다고 생각했던 나는, 사랑이 일시적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어쩌면 그런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이제는 한다. 이미 나보다 더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 내게 그렇다고 말한다. 줄리언 반스가 그랬고, 까치가 물고 간 할머니의 기억속,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렇다고 말한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그들의 말은 옳았던 것 같다. 나보다 더 오랜 시간을 살아왔던 사람들의 말. 그들이 사랑에 대해 하는 말 역시 옳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여든다섯 살이 되어, 나보다 훠어어얼씬 젊은 이들에게 말할런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지금도 서로를 사랑하고 있단다, 라고. 

사랑은 이토록 오래 지속되는 것이야, 라고.



이 책의 모든 책장은 덤덤하게 넘길 수 있다. 요란하지 않게 그저 묵묵히 넘길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맨 마지막장까지 그렇게 볼 수는 없다.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위해 손수 만든 것들을 펼쳐 보면서는 울컥, 하는 마음을 덤덤하게 누를 수가 없다. 그래서 이게 사랑인 것이다. 그들이 사랑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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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14 17: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5-04-14 17:32   좋아요 0 | URL
어디를 말하는지 몰라서 처음부터 다시 읽었네요. ㅋㅋㅋㅋㅋ 땡큐요!

웽스북스 2015-04-14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이 글 참 좋네요! :)

다락방 2015-04-14 17:33   좋아요 0 | URL
좋다니 다행입니다.
:)

레와 2015-04-14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한다고 말해줘. ^^

다락방 2015-04-14 17:33   좋아요 1 | URL
누구한테? 레와님한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nomadology 2015-04-14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린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들일 뿐이죠. 저는 보통은 좋아해요. 그 가장 보통의 존재라는 노래도 좋아하고.

다락방 2015-04-15 14:04   좋아요 0 | URL
크- 뭔가 술 한잔 하면서 읽어야 되는 댓글 같아요. 우린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들... 크- 뭔가 인생의 진리를 한 수 배운듯한 느낌입니다. 헤헷

cocomi 2015-04-15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마다 사랑에 대한 정의가 달라서 이건 사랑이고 이건 아니다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에로스적인 사랑도 있고 자식을 향한 무한 사랑도 있고 생물학적 본능을 넘어서는 다른 종류나 차원의 사랑도 있는 거니까요. 그런데 전 개인적으로 한순간에 불타오르는 감정 보다 권태나 다른 삶/사랑의 굴곡을 이겨내거나 지나가고 난 후에도 이어지는 사랑, 상대의 모든 것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용하며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사랑하는 것이 이 더 아름다운 것 같아요. 그게 쉽지 않으니까.. 그래서 노년의 사랑이 사람들에게 더 큰 감동을 주는 것 같아요.

다락방 2015-04-15 14:06   좋아요 1 | URL
네, 최근에야 저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권태나 다른 삶의 굴곡을 이겨내고 지나간 후에 이어지는 사랑. 그런 사랑의 숭고함이랄까요. 그런 게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이제 나이 먹어가며 저도 해보게 되는 것 같아요. 오랫동안 함께 봐오고 겪어오며 서로에 대해 나만큼 잘 알 수 있게 된다는 것 말예요. 끄덕끄덕. 네, 그 쉽지 않은 것이 그래서 아름다운가 봅니다.

nomadology 2015-04-15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낮술 고고, 라고 적었더니 너무 체신머리 없이 보이네요. 오늘 날씨가 무척 좋아요.

다락방 2015-04-15 16:25   좋아요 0 | URL
오늘 날씨가 무척 좋아서 저도 낮술 고고, 하고 싶지만 일단 직딩이므로 꾹꾹꾸우우우우우우우욱 참았다가 퇴근후 슝- 술 마시러 갑니다! ㅎㅎ

salt23 2015-04-22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페북에 공유했습니다.

다락방 2015-04-22 09:37   좋아요 0 | URL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