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영화 《나의 ps 파트너》에서 지성은 김아중과 통화중에 자신의 전(前)여친 얘기를 하게 된다. '우리는 아주 특별한 관계였다, 영혼이 통하는 사이었다' 라면서. 헤어진 마당이니 과거형이 되는데, 어쨌든 과거엔 연인이었으니 그가 그들의 관계를 특별하게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니, 당연하다. 그때 김아중은,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들 자신의 관계를 그렇게 느낀다고 말한다. 그래, 나도 안다. 우리는 특별하다고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영혼이 통한다' 라는 말에서 감이 잘 안온다.
영혼이 통한다고?
영혼이 통하는 게..뭘까? 도대체 뭐가 영혼이 통한다는 걸까? 나는 곰곰 되짚어 봤다. 나의 지난 연애와 연인들을. 그들중 어떤 이들에겐 편안함을 느꼈고 또 어떤 이들에겐 몹시 설레이는 기분을 느꼈고, 누구는 아주 많이 좋아했고 등등의 감정들이 떠오르지만, 나는 단 한번도
나는 그와 영혼이 통하는 사이야.
라는 느낌을 받아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더라. 영혼이 통한다고? 영혼이 통한다는 게 대체 뭘 의미하는지조차 모르겠다. 어떻게 하는게 영혼이 통한다는 걸까. 내가 가만 있어도 내 영혼이 슝- 하고 날아가 당신의 영혼 속으로 슝- 들어가서는 하나로 살포시 포개어지는, 뭐 그런건가? 아니면 영화 《사랑과 영혼-GHOST》처럼, 나의 영혼의 그의 몸을 슝- 하고 통과하는, 뭐 그런건가? 아무리 상상하고 또 상상해봐도 그림이 그려지질 않는 거다. 혹시 '소울메이트'를 말하는건가? 소울메이트를 다른 말로 영혼이 통한다고 하는건가? 말이 통할 수는 있는데, 말이 통하는 걸 영혼이 통한다고 하나? 말이 통하는 건, 생각이 통하는 거잖아? 생각이..영혼인 건 아니잖아? 영혼이 어떻게 통하냐. 누가 나한테 설명 좀 해주라.
설사 소울메이트를 영혼이 통하는 거라고 한들, 나는 그러고보니 '너는 나의 소울메이트야' 라는 말을 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어제는 그래서 이 영혼이 통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소울 메이트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글쎄, 소울메이트가 만약 소울이 나랑 비슷하게 닮아있는 걸 뜻하는 거라면, 사실 내 소울메이트는 지난 연인들이나 앞으로의 연인들이라기 보다는 '에피톤 프로젝트'나 '심규선'쪽이 아닐까 싶다. 영혼이 나랑 조낸 닮은 것 같다. 지난번 심규선 콘서트 갔는데 미발표곡이라며 짝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를 불러주더라. 근데 나는 그때 별수없이 '아 저여자는 나같아' 라는 생각을 한거다. 나는 한 번도 내 연인에게 '그는 또다른 나야' 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어떻게 그게 되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러나 차세정과 심규선이 들으면 놀라겠지. 나는 너를 모르는데 왜 너랑 영혼이 닮았다는 거냐? 하고. 콧방귀를 뀌겠지. 뭐, 그러든지 말든지. 암튼 '영혼이 통한다'는게 대체 뭔지. 이티랑 드류 배리모어가 그랬듯이 손가락을 마주댔을 때 지리리릭 하는건가...
J 생각이 났다. 구체적인 문장을 찍지 않고 그냥 툭, 말을 건네도 답을 해주는 J. 책을 읽다 인용문을 보내면 또다른 인용문으로 답을 해주는 J. 일상을 사사로이 보고하지 않아도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터치하지 않는 J. 우리의 영혼은 닮아있지는 않아도, 이정도면 영혼의 친구 같은거 아닐까. 그러면 이런게 소울메이트..인가? 글쎄, 잘 모르겠다. 나는 정신적 지주 혹은 구원이라 여겨지는 친구도 있고, 일상의 스트레스를 다다다다 풀어놓으며 수다 떨 친구도 있다. 영혼이 통하는 사이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내 영혼은 아주 건강한데, 뭐 언젠가는 누구랑 좀 통해보려나? 글쎄다. 영혼이 통하는 게 그리 간절하지도 않고 그게 꼭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난 그냥 서로가 서로를 이해한다면, 아니,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그걸로도 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영혼이 통하는 게...뭐징?
오늘은 이상한 날이었다. 아니 뭐 딱히 그렇게 다른 날들보다 더 이상할 건 없는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퍼뜩 '올리브 키터리지!' 하게 되는 게 아닌가. 제기랄. 아침에 이런 거 생각나면 굉장히 고통스러워지는데, 출근준비할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책을 펼쳐보면 안된다는 말이다. 아, 그런데 참을 수가 없어. 어떤 문장을 찾고 싶다. 영어로 찾고 싶다. 그런데 영어로 된 책을 읽을 수가 없으므로 일단 한국어로 찾아서는 어디쯤에 있는지 위치를 파악해야 한다. 나는 책장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내가 나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 내가 나를 신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좋아하는 문장에 밑줄을 그어놨다는 거. 포스트잇 플래그를 붙여 놓았다는 거. 크- 멋져. 미래를 위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미리 준비해둔 것좀 봐. 나는 포스트잇 붙여진 부분들만 찾아보아도 내가 원하는 문장을 찾을 수 있는 거다. 내가 원했던 문장, 찾아낸 문장은 이것이었다.
라고 쓰려보니 제기랄 ㅋㅋㅋㅋㅋㅋ회사에 이 책 없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쉬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럼 난 인용문을..어째? 하아- 힘들어. 내가 나를 또 힘들게 하는구나.
그러고보면 나를 가장 사랑해주는 것도 나 자신이지만,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도 나 자신인듯?? 하하하하하하하하하. 헛웃음만 나오는구나. 당일배송 시켜서 인용문 적을까? 하아- 페이퍼도 타이밍인데. 그 타이밍을 놓치면 쓰기 싫어지는데. 히융. 자, 그렇지만 나는 원서를 가지고 왔다.
번역본에서 내가 원하는 문장이 어디 있는지 확인해두고, 출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이 책을 들고는 '이 단편이었고, 끝부분이었지, 뒤에 페이지는 한 장 정도 남아있었어' 하고는 찾기 시작했고, 빙고, 찾았다. 번역은 내 몫이 아니다.
On Sunday morning, the sky had a low overcast, and the lights in Daisy's living room glowed from beneath the little lamp shades. "Daisy, I'm just going to say this. I don't want you to answer, or in any way feel responsible. This is not because of anything you've done. Except be you." He waited, looked around the room, looked into her blue eyes, and said, "I've fallen in love with you."
He felt so certain of what was coming, her kindness, her tender refusal, that he was amazed when he felt her soft arms around him, saw the tears in her eyes, felt her mouth on his. -<Starving, p.102>
번역본으로 이부분을 읽다가 이 앞부분이 궁금해졌고, 그러다 좀 더 앞이 궁금해졌고, 그러자 이 뒷부분도 궁금해졌다. 그러다보니 이미 집앞에서 나갈 시간을 지나쳐 있었고, 헐레벌떡 나가보니 내가 타야 할 버스는 막 출발해버렸고, 그 다음 버스를 기다리자니 8분을 밖에서 서성여야 했고...그러면 조급한 마음으로 출근해야 할 것 같아, 아아, 원래 타던 지하철을 타고 싶다, 나는 잽싸게 택시를 타버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지하철역까지 가서는 다다다닥 뛰어 계단을 내려가, 이제 막 도착하는, 내가 늘상 타던 그 시간의 지하철을 탔고, 거기에서 이 원서를 꺼내들고는 이 부분을 찾기 시작한 것이었던 것이었다. 아, 아침에 뭔가 찾아보고 싶어지지마, 부탁이야, 나년아.
양재역에 내려 걸으면서는 그렇지만 이런 거 참 좋다, 생각했다. 어떤 문장이 생각나는 거, 어떤 글귀가 생각나는 거, 그리고 손 닿는 곳에서 그걸 꺼내서 다시 볼 수 있다는 거. 아주 나이가 더 들어서라도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늘 내 곁에 두고, 읽으면서 좋았던 구절들에는 늘 그랬듯이 밑줄을 긋고, 그렇게 지내다가 문득 떠오르는 구절이 있다면 꺼내서는 다시 한번 읽고. 이렇게 사는 거, 참 좋다. 이렇게 계속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어딜 가더라도, 거주지를 옮기게 되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책들은 꼭 싸짊어지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지 안은 책을 두고 갈 수는 있을지언정, 읽었고 내가 좋았다고 느껴 줄을 그었던 책들에 대해서라면, 싸짊어지고 가자고. 이고지고 가자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좀 멋진 것 같다. 일흔이 되어서도, 여든이 되어서도 내 손때 묻은 책을 꺼내어 들춰볼 수 있다는 게.
그렇다면 내 영혼은 내가 좋아하는 책들과 통하는가?
아니, 책은 그저 내 영혼의 좋은 친구일 뿐이다. 손 닿는 곳에 늘 있는 베스트 프렌드. 절친.
나는 나 자신을 잘 알고 나한테 뭐가 좋을지 잘 알기 때문에 내게 좋은 친구를 사귀는 법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랬기에 책장에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넣어둘 수 있는 게 아닐까.
영혼이 통하는 건, 지성이나 하라고 해야겠다. 난 괜찮다. 노 땡큐.
덧붙임: 저 영어부분에 해당하는 번역을, 버니님이 찾아서 댓글로 달아주셨다. 버니님은 좀 멋진 분이신 것 같다. 옮겨본다.
<일요일 아침, 하늘에는 구름이 낮게 깔려 있고, 데이지의 거실 안 작은 스탠드에서 불빛이 반짝였다. ˝데이지, 그냥 이 말을 하고 싶어. 나는 당신이 대답하거나, 어떤 식으로도 책임감을 느끼길 바라지 않아. 당신이 뭘 어떻게 해서 그런 게 아냐. 당신은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었을 뿐이지˝ 그는 잠시 기다렸다가 데이지의 푸른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어.˝
하먼은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친절하고 부드럽게 거절하리란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데이지의 부드러운 팔이 자신을 끌어안고,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반짝이고, 그녀의 입술이 제 입술에 포개졌을 때 몹시 놀랐다.
- 굶주림, 18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