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는 어린 시절 정착하지 못하는 엄마와 함께 지냈다. 그런 엄마가 심지어 클레어와 동생을 두고는 떠나버린다. 그런 클레어에게 '붙박이'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다. 곧 떠나버릴 것들에 대해서는 결코 정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훅훅 치고 들어와도 애써 밀어내야만 했다. 받아들였다가 떠나버리면 너무나 아프니까. 그래서 클레어는 시작도 전에 겁을 집어 먹는다. 아, 클레어. 



어떡하든 끝내야 한다. "그 남자는 붙박이가 아냐." 클레어가 문밖에다 대고 외쳤다. "사과나무가 붙박이고, 인동덩굴 와인이 붙박이야. 이 집이 붙박이야. 타일러 휴즈는 붙박이가 아냐."

"난 붙박이야?" 시드니가 물었다. 클레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드니는 이곳 붙박이인가? 시드니는 배스컴에서 정말로 자기 자리를 찾은 걸까? 아니면 다시 떠날까? 베이가 자라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또 떠날까? 그런 생각은 하기 싫었다. 클레어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시드니가 떠나는 이유가 되지 않는 것, 시드니에게 머물 이유를 주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거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p.173)



"키스 한 번에 이 꼴이 되다니. 섹스라도 하면 일주일은 앓아눕겠군."

타일러는 너무나 쉽게 미래를 입에 올렸다. 그에게서 받은 이미지들이 아직도 생생했다. 하지만 그녀는 시작할 수 없었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을 테니까. 이런 이야기엔 언제나 끝이 있었다. 그녀는 이런 쾌락을 누릴 수 없었다. 그랬다간 남은 평생 그걸 그리워하면서, 그것 때문에 고통받으면서 살게 될 테니까.

"날 내버려둬요, 타일러." 그녀는 그를 밴에서 밀어냈다. 그의 가슴이 아직도 빠르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괜한 짓이었어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에요." (p.203-204)



그녀는 셋이서 한 집에 사는 게 행복했고, 그것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것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행복도 언젠가는 끝나리라는 생각을 끊을 수 없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정할 엄두가 나지 않을 뿐이었다. (p.211-212)



"그리고 타일러와 잘 지내지 못하는 것도 미안해. 타일러와 잘 지내길 바라는 거 알아. 하지만 나로선 어쩔 수 없어. 다 부질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어. 결국 사라질 것 같아 두려워. 사람들이 날 떠나는 게 무서워." (p.257)



"난 일시적인 관계엔 약해."

"그럼, 그렇게 생각하지 마. 영원할 거라고 믿어봐. 일시적일지 영원할지 누가 알아."

클레어는 병원에서 주사 맞기 직전처럼 짧고 깊게 숨을 훅 들이 마셨다. "아플 거야."

"사랑은 언제나 아파. 그건 언니도 알잖아, 안 그래?" 시드니가 말했다. "하지만 해볼 만해. 언니가 모르는 건 그것뿐이야." (p.274)



타일러가 고개를 들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떠날 거라 생각해요?"

"이런 건 영원할 수 없으니까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아는 사람 누구한테도 영원하지 않았으니까."

"난 항상 앞날을 생각해요. 난 평생 꿈을 좇으며 살았어요. 그리고 난생처음으로 그 꿈 중 하나를 잡았어요." (p.282)




혼자 외롭게 지내던 클레어에게 오래전 헤어진 여동생이 아이를 데리고 나타난다. 클레어에겐 조카가 생긴 것이다. 어린 시절에 사이가 좋지 못했던 여동생이지만, 클레어는 이제 동생과 점점 사이가 좋아지고 조카를 사랑하고 있다. 동생과 조카가 함께 있는 지금 너무나 행복하지만, 이들이 곧 떠나버릴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그들이 떠나는 이유가 최소한 자신이 되지는 않기를 바라면서 클레어는 매일을 지낸다. 게다가 그녀에게 마음을 고백하며 늘상 그녀를 바라보는 옆집 남자 타일러. 그녀도 그에게 엄청난 열정으로 끌리지만, 그의 마음도 잘 알지만, 이런 관계가 영원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그를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이런 관계는 끝이 있어, 끝나면 아플 거야, 그것이 그녀의 마음과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이다. 


하아-


나도 정확히 클레어의 마음으로 연애를 해왔다.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유지하다 헤어지면, 당연히 아프다. 하물며 겁나게 사랑하는 사람의 경우엔 어떻겠는가. 그건 감히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이별이 닥쳐온 게 아니라, 이별이 닥쳐올지도 모르는 상황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찢어져서 눈물이 고이는 사람이라, 언제나 '많이 사랑하는 사람과는 연인이 되지 말자'고 다짐해왔다. 그들은 다른 포지션이어야 한다, 헤어지면 어마어마한 고통이 쓰나미로 몰아닥칠 것이다, 하는 두려움이 내 안에는 너무나 컸다. 지금 그 책 제목이 생각이 안나는데, 내가 읽었던 로맨스 소설에서-<혜잔의 향낭> 이었나??-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그런 말을 한다. '너를 사랑하므로 나에게도 이제 약점이 생겼다' 고. 나는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고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안부와 염려와 걱정으로 언제나 머릿속이 들끓는다. 눈에 보이지 않을 때 그들에게 혹여라도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아프지 않을까, 다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졸이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쓸데없는 걱정이겠지만 내게는 어쩔 수 없이 이런 성향이 있고, 이 생각을 나의 가족들에게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 지금은 어린 조카들 생각을 매일, 매순간 한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에너지를 꽤 많이 소모하는 일이라, 깊이 사랑하는 사람을 또 만들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클레어가 여동생과 조카에게만 집중하려는 마음을, 자신에게 애정을 드러내며 훅훅 다가오는 타일러를 애써 밀어내려는 그 마음을 너무나 이해한다. 그런데 밀어내려고 해도 자꾸 훅훅 들어오고, 밀어내야 되는데, 자꾸 훅훅 들어오고, 밀어내야 되는데, 겁나 좋고...그러니 클레어가 지금 얼마나 힘들까.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미칠것 같은 마음이 되어 화도 나고 슬프기도 했다가 막막하기도 하고 눈물도 핑 돌다가 할 것이 아닌가. 클레어는 지금 자신을 통제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빡칠 것이다. 내가, 클레어를, 진짜 완전 잘 안다니까.



그런 이모를 보며 조카 베이는 엄마에게 묻는다. 이모 화났느냐고. 좀처럼 물건의 제자리를 모르는 사람이 아닌데, 요즘엔 그걸 까먹고 있다고. 조카는 이모가 걱정된다. 그러자 베이의 엄마가 베이에게 말해준다.



"화난 게 아니야, 베이. 이모는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서 당황한 것뿐이야. 수영 못하는 사람이 있듯이 사랑에 빠지는 법을 모르는 사람도 있거든. 처음엔 허우적대지만, 나중엔 점점 요령이 붙을 거야." (p.215)



아! 

어쩐지 눈물이 난다.

내가 겪었던 내적갈등들이 떠올라 가슴이 답답해진다.

소파에 가만히 앉아 눈물이 핑- 고이던 날이 떠오른다. 내가 내 마음대로 되질 않았지. 엉엉- 엉엉 울고 싶겠지 클레어. 

이별하고 싶지 않아 사랑하는 걸 포기하는 이 클레어의 마음을 나는 안다. 

그것은 용기가 없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을, 어떻게 감히 용기 없다고 흉볼 수 있을까. 


그런 클레어에게 일시적이 아닌 영원을 생각해보라고, 한번 해보라고 조언해주는 여동생 시드니가 있고, 또 그런 클레어에게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열심히 설득하는 멋진 남자, 타일러가 있다. 타일러가 그런 그녀에게 실망해 포기하거나 절망했다면 아마 클레어는 계속 같은 생각, 같은 마음으로 앞으로의 시간들을 살아갔을 것이다. 별로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그저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지' 라고 생각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확실히,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또 그것대로 살아가는 방식이며 안정감과 평안을 주었을 테니까. 


그렇지만 훅훅 들어오는 사랑이 살면서 쉽게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여러번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많이 아프게 될지도 모르더라도, 감수하고 그를 받아들이는 쪽이 그를 혹은 그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이다. 만약 지금 그를 놓친다면 앞으로 평생 이 경험과는 담쌓고 살게 될지도 모른다. 내게 찾아온 혹은 내게 다가온 폭풍 같은 감정의 흔들림을 놓은 채로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느냐, 끝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을 안고 일단 앞으로 나아가느냐는 전적으로 개인의 몫일 것이다. 아, 몰라.


어쨌든 우리의 타일러는, 그녀가 가진 두려움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밀어냄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다가선다. 아 진짜...조낸 멋지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서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전날 밤 정원에서 므흣한 일이 있어 어색해진 그들 사이, 그는 그녀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풀어보고자 한다. 그런데 그가 그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퍽 흥미롭다.




"시작합니다. 내가 십대 때는 수영장 가기가 쉽지 않았어요. 특히 예술가촌 아이들한테는, 수영장이 마을에서 16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데다 엄청 외진 곳이었거든요. 학교에 지나 파레티라는 여자애가 있었어요. 지나의 몸이 성숙해지자 남자애들이 넋을 놨어요. 복도에 있다가 지나가 지나가면 그야말로 말을 잃었죠. 며칠씩 그랬어요. 열여섯 살 때였는데 지나는 여름방학 동안 매일 수영장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그래서 나도 거의 매일같이 수영장에 갔어요. 비키니 입은 지나를 보려고요. 방학이 끝나갈 즈음 난 결국 결심했어요. 더는 참을 수 없더군요. 몇 달이나 지나의 환상에 사로잡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거든요. 하다못해 말이라도 걸어봐야 했어요. 나는 물에 뛰어들었고 지나 바로 앞에서 몇 바퀴 왔다갔다 하며 폼을 잡았죠. 그런 다음 훌쩍 물 밖으로 나와 지나에게 다가갔어요. 그리고 당당히 지나 앞에 버티고 섰죠. 일부러 햇빛을 가리면서, 일부러 그 애한테 물을 뚝뚝 흘리면서. 좋아하는 여자애를 괴롭히는 게 '나 너 좋아해'의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하던 미욱한 시절이었죠. 그런데 지나가 눈을 뜨고 나를 올려다보더니 ‥‥‥비명을 내질렀어요. 물에서 나올 때 내 수영복이 허리 한참 아래로 쓸려 내려갔는데, 그것도 모르고 거기 그러고 서 있었던 거예요. 졸지에 나체쇼를 벌인 거죠. 경찰에 끌려가지 않은 게 다행이었어요." (p.253)



여기까지는 뻔한 얘기다. 그냥 피식- 웃을 수 있는 얘기. 내가 좋아하는 건 이 다음부터다. 이 다음의 클레어와 타일러의 대화. 아, 이런 대화 너무 좋아! >.<



반전결말에 클레어는 웃음이 나왔다. 웃으니 기분이 좋았다. 기분이 묘했지만 어쨌든 좋았다. "있던 정도 뚝 떨어졌겠네요." 

"그렇지도 않았어요. 사흘 후에 지나가 데이트를 신청했어요. 그러고보니 그날 수영장에 있었던 여자애들 중에 나한테 관심을 보인 애가 한둘이 아니었네." 타일러가 뻐겼다.

"정말이예요?"

그가 윙크했다. "그게 중요해요?"

클레어는 다시 웃었다. "재밌었어요."

"말만 해요. 이런 굴욕적인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p.253-254)



아, 난 진짜 이렇게 뻐기는 남자 좋아. ㅋㅋㅋㅋ 허세 쩌는 남자는 재수없지만 상대로 하여금 웃게 만들면서 뻐기는 건 좋지 않은가. 하하하하하. 타일러가 클레어를 포기하지 않아서, 클레어의 불안을 자꾸 없애주려고 해줘서, 나는 그게 타일러에게 참 고맙다. 대화를 마치고 수영하러 가겠다는 타일러는 마지막으로 이 말을 클레어에게 던진다.



"나는 여러 면에서 당신을 사랑해요, 클레어." (p.255)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여러 면에서 당신을 사랑해요, 라니. 이 남자야. 졸 멋지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그렇지만 이 말을 듣고도 이 말이 뜻하는 바가 뭔지 잘 모르겠는 우리의 클레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타일러는 물로 달려가 그대로 뛰어들었다. 잠깐. 진심으로 한 말일까? 나를 사랑한다고? 아니면 이런 상황에서 흔히 하는 표현인가? 클레어는 이런 게임에 익숙하지 못한 것이 분했다. 게임에 익숙하면 장단을 맞출 텐데. 게임에 익숙하면 때로는 따끔하고 대로는 뻐근한 타일러에 대한 감정, 괴롭기 짝이 없지만 동시에 몹시 짜릿하기도 한 이 감정을 잘 요리할 수 있을 텐데. (p.255)



아, 정말이지 '괴롭기 짝이 없다'는 표현이 얼마나 적절한지. 아주 그냥 뇌리에 와서 박히는구나! 괴롭기 짝이 없다 괴롭기 짝이 없다 괴롭기 짝이 없다 괴롭기 짝이 없다.....




이 책은 이미 다른 많은 책들을 닮아 있다. '에이미 벤더'의 《레몬 케이크의 특별한 슬픔》을 닮아 있고, '라우라 에스키벨'의 《달콤쌉싸름한 초콜렛》은 정말 많이 닮아 있다. 그러니 특별할 것도 없는 책이고 뛰어날 것도 없는 책이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등장인물들이 겪는 감정의 변화는 너무나 내 것과 닮아 있어서 이 특별할 것 없는 책의 책장을 넘기다가 자꾸만 눈물이 핑 돌았다. 오랜 만에 집으로 돌아온 시드니에게 잘 돌아왔다고 말해주는 어린 시절의 친구를 볼 때도 그랬고, 조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클레어를 볼 때도 그랬고, 전혀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친구로서 살면서 안정감을 느끼는 것도 그랬고, 과거를 숨기고 싶은 시드니의 불안도 그랬고, '이렇게 좋은 남자가 내게 올리 없다'고 생각하는 시드니가 그랬다. 무엇보다 어떤 상황에도 끝이 있다고 생각하는 클레어에게도 내가 생각하고 이해하며 느끼는 감정들이 그대로 배어났다. 미래를 알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클레어도 역시 나와 같았다. 미래는 알수 없어야 하고 그러므로 기대에 차있어야 하며, 또 그러므로 앞으로 살아나가야 하는 것이지,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있다고 해서 덥썩 그걸 보는 쪽을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주인공들은 특별한 능력을 가졌는데, 그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은 면면이 다 보통의 사람들과 같았다. 어차피 사람이란 다 거기서 거기다. 강해봤자 특별히 더 강할 것도 없고 약해봤자 특별히 더 약할 것도 없다. 우리가 강할 수 있는 최대치는, 어쩌면 우리 안의 두려움과 트라우마와 싸우는 바로 그만큼인지도 모르겠다. 약할 수 있는 최대치 역시, 그걸 극복하기 위해 한걸음을 내디디려다 다시 주춤하게 되는 그만큼이 아닐까. 


어쨌든 나는 이런 거 좋다. 끊임없이 다가가 불안을 달래주는 것, 잘 돌아왔다고 말해주는 것. 이런 것들만 있으면 어쨌든 세상은 좀 더 살만하다고 느껴질런지도 모르겠다.


















핸드폰을 바꾼 여자는 단축번호를 옮기지 못해 실수로 남자친구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전화를 건다. 다짜고짜 폰.섹.스.(음란 단어라 등록이 안됩니다)로 통화를 마치고나서야 여자는 자신이 엉뚱한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이 여자와 가만히 앉아 폰.섹.스.를 하게 됐던 남자는 인연이 닿아 통화하는 사이가 된다. 얼굴을 보지 않고 통화만 하니 그들은 서로에게 아주 솔직해질 수 있다. 헤어진 애인, 지금 애인에 대한 고민과 속상함 찌질함을 털어놓을 수도 있고 섹스에 대한 불만도 얘기할 수 있다. 그러면서 폰.섹.스.를 시도하기도 한다.


글쎄, 폰.섹.스.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잦은 빈도로 하는지는 내가 전혀 모르는 바이므로, 이렇게 알지 못하는 남자와 폰.섹.스.하는 상황 자체가 있을 거라는 것에는 그다지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이 영화는 지나치게 영화답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둘의 만남 자체가 그러한데 전화로만 교제를 하던 두 사람은 드디어 만나기로 한다. 서로 상대의 모습을 알지 못하니 기대반 걱정반의 마음으로 서로를 마주치게 되는데, 무슨, 모르고 나갔는데 여자는 김아중이고 모르고 나갔는데 남자는 지성이냐. 지성은 김아중을 보고나서 말한다.



뭐야, 예쁘다더니 정말 예쁘네.



이런 젠장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백하건데, 나 역시 얼굴을 모르는 상태에서 관계를 유지하다가 상대를 만난 적이 몇 번 있다. 뭐, 요즘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런 일이 다들 있지 않을까. 어쨌든 그렇게 내가 상대를 만나러 갔을 때,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지성이 나온 적은 없었다.

지성 같은 놈도 없었고,

지성하고 비슷하게 생긴 놈도 없었다.



뭐, 이건 상대에게도 마찬가지일거라는 걸 안다.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 한구석 김아중 닮은 데가 없으니까. 아마 상대도 나를 보고는 흐음, 역시 이렇게 만나는 데는 한계가 있군, 하는 생각을 했을런지도 모르겠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여튼 상대를 모르는 채로 상대와 대화를 하고 호감을 느꼈을 때, 그런데 만남은 '그 후에' 일어났을 때, 상대가 초미모롭기는.. 힘든 게 아닌가.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되나. 일전에 엄청 엄청 잘통하는 남자애와 수차례 통화를 한 적이 있다. 나보다 세살 어린 놈이었는데, 이놈은 살면서 나처럼 대화가 잘 되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설레발을 쳐댔던 터라 나도 좋았었다. 우리는 인터넷 까페에서 알게된 사이었는데, 하루는 그 까페에 정모가 있었고 후기가 올라왔다. 한결같이 녀석에 대해 이병헌 닮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뭐 나는 이병헌에 대해 호감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아니 일반인이 이병헌의 외모인데 이렇게 대화도 통화고...어쩌고 생각하며, 그 다음 번개모임엔 나도 참석했다. 이병헌..의 외모라면 뭐 괜찮지 않은가. 그리고 좀 늦게 도착해서 빵집 앞에서 기다리던 나를 데리러 나온 녀석은............................그래, 이병헌과는 하나도 닮지 않았었다. 뭐,그렇다는 얘기다.



어쨌든. 상대가 김아중이고 상대가 지성인 것이 영화적이었는데, 결혼식 장면은 특히 더하다. 하아- 결혼식에 찾아가 찌질하게 '네 팬티를 내게 보여줘' 노래 부르는 것도, 뭐, 어떤 찌질한 경우엔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렇게 사람들 다 있는 결혼식 앞에서 회사 동료를 가리키며 '나는 쟤랑 술먹고 실수로 잤어' 라고 떠들고 '나도 선배가 하도 자자고 졸라대서 잤어요' 라고 말을 하는 건 .. 뭥믜 -_-

이건 영화이며 그러니 재미있게 감상하면 그뿐이지만, 좀처럼 나는 몰입이 되진 않았다. 지나치게 작위적은 설정도 그랬지만, 뭔지 모를 것이 나를 감정적으로 되게 힘들게 했다. 그게 뭔지는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가 없고 나도 이게 뭔지 잘 모르겠다. 뭔가 되게 나를 힘들게 했는데, 그래서 중간까지 보다가 잠깐 쉬었는데, 이게 뭔지를 모르겠다. 이 감정의 정체를.. 하아-



이 영화를 보게 된건 신해철 때문이었다. 칠봉이가 이 영화에 신해철이 잠깐 나온다고 말해준 것. 오. 신해철이 나온다고 해서 봤는데, 신해철이 나온 것이 이 영화의 유일한 미덕이었다. 신해철이 나오는 동안만 마음이 애틋하고 짠해졌다. 저 사람이, 저기 있었네. 요즘 유행하는 킬미힐미를 안봐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확실히 지성 보다는 신해철이 좋다. 이런건 뭐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 이 영화에 신해철이 나온다고 말해준 칠봉이가 고마웠다. 이렇게, 신해철을 보다니. 아우, 콕콕 가슴이 그냥 ㅠㅠ




이십대 중반에 내게도 이 영화속 김아중,지성과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내 경우엔 남자쪽에서 실수로 전화를 잘못한 거였다. 이 전화가 실수였다는 사실을 서로 알며 전화를 끊었는데, 잠시후에 다시 전화가 왔었다. 그냥 이렇게 연락하고 지내면 안되겠냐고. 안될게 뭐 있나 싶어 나는 그와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어느 하루는 종로에서 술 마시던 나를 집에 데려다줄 겸, 나라는 사람을 한번 볼 겸 내가 있는 곳으로 오겠다는 거다. 잠깐 고민하던 나는 그럼 그래라, 했고 그가 도착했을 때 나의 술자리는 아직 끝나지 않아 있었다. 잠깐 나와 그를 처음 보게 됐고, 그는 내가 나올때까지 차에 앉아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술집에 들어가 일행과 헤어지려고 하는데, 그중에 한 남자가 꼭 할 말이 있다며 잠깐 남아달라는 거다. 흐음. 이걸 어쩌나...지금 저기 누가 와 있는데... 그런데 사실 이 모임이 먼저였고...근데 저기 나 보러 누가 와있는데... 근데 얘가 굳이 오늘 할말이 있다고하니...그래서 내가 알겠다, 친구가 와있는데 보내겠다 말하고 다시 차로 가서는 미안한데 오늘 그냥 가라고 말했다. 내가 지금 갈 수 없는 상황이라고. 그래서 다음에 만나 술한잔 사기로 하고 그를 보낸후에, 다시 내게 할말이 있다는 남자 에게 돌아와 그 남자가 이끄는 대로 술집엘 갔다. 그날 그는 내게 사귀자고 말했고, 나는 알았다고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튼 졸지에 남자를 사귀어서 집에 돌아가게 됐는데, 전화남자는 내게 얼른 술사줄 날짜를 잡으라고 해서 또 그 날짜 잡아가지고 며칠 뒤에 술을 마시게 됐는데.................................


아, 복잡하다. 여튼. 

지금은,

나랑 사귀었던 그 남자는 예쁜 여자랑 결혼해서 아이 낳고 잘 살고 있고

전화남자는 뭐하는지 알지도 못할 뿐더러 어떻게 생겼는지, 이름이 뭔지도 생각 안난다. 키가 어땠는지도 전혀 기억이 안나고. ㅋㅋㅋㅋㅋㅋㅋㅋ만약 지하철에서 내 옆자리에 앉아도, 식당에서 내 옆자리에 앉아도, 거래처 사람으로 만나서 통성명을 하며 악수를 한다 해도 나는 그를 전혀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이렇게 이름도 생각 안나고 성도 생각이 안날까. 얼굴이 컸는지 작았는지, 헤어스타일은 어땠는지도 하나도 기억안나.... 기억나는 건, 그가 기막히게 키스를 잘했다는 것 뿐이다. 오, 나년....



자, 마무리는 훈훈하게 책으로 돌아가자.



"저 나무의 사과를 먹으면, 인생 최대의 사건을 미리 알게 되거든. 그게 행복한 사건이면 그것 아닌 다른 일은 죄다 시시해질 거고, 반대로 끔찍한 사건이면 평생 두려움 속에 살아야 해. 그러니까 절대 미리 알면 안 돼." (p.137)



내 인생 최대의 사건은 뭘까? 나는 내 인생 최대의 사건을 미리 알고 싶지 않다. 돌이켜보았을 때, 아 그 일은 내 인생 최대의 사건이었지, 하고 싶다. 지금도 벌써 내 인생 최대의 사건이라고 할만한 것들이 몇 개 있다. 더한 무엇이 생기지 않더라도 나는 이것들 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고, 그러면서도 사실은 더한 무엇이 또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매일을 산다. 



그가 껄껄대고 웃었다. 그녀도 웃었다. 모두 해결됐다. 웃음이 잦아들자 헨리가 시드니의 눈을 보며 말했다. "돌아왔구나."

"돌아왔어."

"잘 돌아왔어."

시드니는 머리를 내저었다. 오늘 이런 행운이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거 알아? 그렇게 말해준 사람, 네가 처음이야."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p.199)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고, 나는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을 믿는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 보다는 즐겁게 기다리고 싶고, 마냥 기다리기 보다는 한걸음 더 떼고 싶다. 



그리고 지금 뭔가 먹고 싶다. 따뜻하고 기름지며 육덕진 걸로.. 하아-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이바넬이 입을 뗐다. "도움을 청하는 일도 용기가 있어야 할 수 있지. 다시 돌아오다니 장하구나. 기특하다."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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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혼이 통하는 사이?
    from 마지막 키스 2015-03-12 09:46 
    영화 《나의 ps 파트너》에서 지성은 김아중과 통화중에 자신의 전(前)여친 얘기를 하게 된다. '우리는 아주 특별한 관계였다, 영혼이 통하는 사이었다' 라면서. 헤어진 마당이니 과거형이 되는데, 어쨌든 과거엔 연인이었으니 그가 그들의 관계를 특별하게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니, 당연하다. 그때 김아중은,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들 자신의 관계를 그렇게 느낀다고 말한다. 그래, 나도 안다. 우리는 특별하다고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영혼이
 
 
2015-03-11 10: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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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3-11 10:11   좋아요 0 | URL
아이쿠, 님. 전혀요, 전혀.
우리 타일러, 그런 남자 아닙니다. 타일러는 클레어만 사랑합니다. 하트 뿅뿅 ♡

네꼬 2015-03-12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컴퓨터로 서재에는 잘 안 들어와서요, 스마트폰으로 다락님 글 읽으려면 댓글 달기가 어려웠어요. 다락님 반가워요. 그리고 고맙고요. .. (그리고 여전히 야한 다락님. -_- )

다락방 2015-03-12 09:06   좋아요 0 | URL
한결같은 게 제 장점이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날 좀 더 따뜻해지면 또 노가리집에서 만납시다. 밀린 수다 다다다닥 풀어내자요. 그때까지 잘 버티고 있어요. 멘탈 잘 부여잡고!!

2015-03-12 01: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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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2 09: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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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2 13: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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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2 14: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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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2 14: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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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2 14: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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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5-06-03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를 지금에나 보네요. 달달해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다락방님 조카는 좋겠다, 나도 조카로 받아줘요.ㅋ

다락방 2016-04-30 19:35   좋아요 0 | URL
아니, 저는 이 댓글을 지금 보네요. 아하하하하.
블랑카님, 저는 지금 동네 까페에서 두번째 책을 위한 원고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