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보내고 출근해서 메신저를 켰을 때, 저쪽에서 J가 '보고싶었다' 라고 말을 하는 순간, 아, 나는 이게 필요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이런 다정한 말이 내게 필요했어. 나도 몰랐지만 나는 이런 말이 지금 절실했던 거야, 하는 생각에 왈칵 감정이 솟구쳐 '나도 ㅠㅠ' 라고 대꾸했다. 그날은 온종일 보고싶었다는 친구의 말에 기댔다. 가끔 이렇게, 내가 무엇이 필요한 지 모를 때에, 내게 닥치고 나서야 '아 나는 이게 필요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떤 날의 치즈파이처럼.
















오늘 출근하면서 이 책을 시작했다. 로맨스 소설답게 말랑말랑하다. 주인공 32세 신희수는 십년간 충실히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고 현재 백수다. 가장 친한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해서 좀 울었고, 집 안 가득 모아둔 여행책을 들여다보며 여행을 꿈꾼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시장의 두부가게에서 따끈한 두부를 사면서 행복함을 느끼는 그녀는, 간혹 두부가게에서 마주치게 되는 남자에게 호감을 품는다. 언제부턴가 그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것 같아 왜 저렇게 쳐다볼까 의아하지만, 차마 그에게 왜 그러느냐 묻지는 못한채로 일종의 설레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연을 라디오에 보낸다. 


공교롭게도, 아니 우연히도, 어쩌면 필연적으로,

이 사연을 읽어주는 새벽의 디제이는, 바로 그 두부가게 남자였다. 일명 '두부남' 


그는 그 사연이 자신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고는 아, 이토록 놀라운 우연이라니, 한다. 사실 그는 두부가게에서 보았던 희수를 결혼식장에서도 마주쳤는데 이렇게 자기의 청취자가 된 게 아닌가. 그런데 이 무딘 여자 희수는 그저 자신을 두부가게에서만 보았다고 생각한다. 눈썰미 없기는.

우연도 세번이면 필연이라는데, 이제 디제이 은세는 그녀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한다. 

그녀의 사연을 읽어준 후, 자신의 이런 의견을 덧붙인다.




그나저나, 두부남. 음, 5466 님 입장에선 상당히 난처한 일이겠어요. 아무 이유도 없이 쳐다보는, 그것도 힐끔힐끔이 아니라 빤히 쳐다보는 남자를 만나셨으니. 그런데 아무 이유도 없이 상대를 그런 식으로 쳐다보는 남자는 없지 않을까요? 제 생각에는 두부남이 갑자기 5466 님을 쳐다보게 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 같아요. 지금처럼 혼자만의 긴장과 설렘을 즐기시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한 번 용기를 내 보시면 어떨까요? 또다시 두부남을 만나게 되면 용기를 내서 물어보는 거죠. 그렇게 쳐다보는 이유가 대체 뭔지. 어쩌면 두부남도 5466 님과 같은 이유로 말을 걸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거든요. (p.60)




하하하하. 야심한 밤에, 희수는 디제이의 이런 말을 듣고 으응, 정말 그런가?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인가? 하고 휘청휘청 흔들리는데, 디제이는 아예 쐐기를 박는다.



전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하는 걸 좋아하는데요. 만약 그 산책길에 두부를 사 들고, 행복해하는 얼굴로 걸어가는 여자분을 본다면 눈길이 갈 것 같아요. 모르기는 몰라도 두부남이 5466 님에게 눈길을 주는 게 부정적인 이유 때문은 아닐 거예요. 아침부터, 별로 기분 좋지도 않은 일에 일부러 관심을 기울일 리가 없거든요. (p.60-61)



아이쿠야. 희수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잠이 든다. 


한창 직장 생활이 너무 무료하고 재미없어서 직장내에 누군가를 짝사랑하기라도 하면 좋을텐데, 라는 말을 친구에게 했던 적이 있었다. 아침마다 짝사랑의 상대를 보기 위해 회사에 나오는 게 즐거울 수 있을테니까. 얼마나 재미 없었으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을까. 어쨌든. 아침 일찍 두부를 사러 가서 마주치는 남자라니. 아니, 그건 둘다 여유로운 아침을 보내는 상황이니 가능한 설정이 아닌가. 일어나자마자 오분만 더 자고 싶다고, 이분만 더 눈감고 있고 싶다고 찡얼대며 엎어져있다가 간신히 눈비비며 일어나 세수를 하고 부지런히 다다다닥 화장을 하고 후다다닥 밥을 먹고 다다다닥 뛰어서 버스를 타고 후다다닥 지하철을 타는 내게는 일어날 수 없는 일.



희수가 희수인줄 모르고 은세가 은세인 줄 여전히 모르면서 희수가 처음, 자신의 외로움을 문자메세지로 사연 보냈을 때, 디제이 은세는 에피톤 프로젝트의 노래를 위로의 곡으로 선곡해 들려주었다.



5466 님도, 우리 뮤직 트리 식구들도 모두 자신을 위로하는 나만의 방법을 꼭 찾으셨으면 좋겠네요. 오늘 마지막 곡으로 '에피톤 프로젝트의 선인장' 들려드리며 이만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클로징으로 꼭 이 곡을 틀어야겠다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생각했는데, 오늘 분위기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네요. 그럼, 내일 다시 만나요. 기다릴게요. (p.36)



양재역에 도착해 지하철에서 내리며 책을 가방에 집어 넣고 아이폰을 꺼냈다. 내 폰에 선인장 쯤은 이미 저장되어 있던 터다. 오랜만에 다시 듣는 선인장이, 참 좋구나. 이런 노래가 나의 아이폰에 있다. 내가 넣었지만 내 아이폰을 사랑하고 싶어지는 마음. 가슴속에 사랑이 왈랑왈랑 거리고 물결치고 파도를 친다. 이 사랑의 파도로 당신의 싸다구를 날리고 싶다. (뭔 개소리야..)



늘 5번 출구로 나가다가 오늘은 시간이 조금, 아주 조금 더 걸리는 8번 출구로 나가기로 한다. 귀에는 여전히 이어폰을 꽂은 채다. 계단을 올라 8번 출구로 나와 조금 걸으니 저기, 스타벅스가 보인다. 오픈한지 얼마 안되는 곳. 흐음,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실까. 며칠전에 회사 동료가 책 빌려준 걸 돌려주면서 스타벅스 카드를 선물로 준 게 있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동료인가!(응?) 그래, 카드도 있으니 들어가자, 싶어서 스타벅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그만 풋- 웃어버렸다. 하하하하. 카운터에 낯익은 남자사람이 보였기 때문이다.


회사근처에 있는 스타벅스에 언젠가부터 새로운 남자직원이 주문을 받고 커피를 만들어주는데 너무 맛이 없는거다. 두유를 넣은 캬라멜 마끼아또에서는 단 두유 맛만 나고, 두유를 넣은 녹차라떼에서는 두유 맛만 나는 것. 아, 짜증나, 신참이라 잘 못만드나? 라고 생각하고 자주 그곳에 들르는 e양에게 말하니, e 양도 정말 맛이 없어졌다고 하는거다. 그래서 우리는 내심 우리끼리 그런 대화를 했었다. 익숙해지려면 시간 좀 걸리겠지? 그때까지 가지 말아야겠다. 아니면 아침에 가서 저 직원 있으면 아메리카노만 시켜야겠어, 라고. 그런데 어제였나 그제였나, e 양이 '이제 그 신참 직원 안보이던데요?' 라고 하는거다.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러고보니 요즘 안보이네? 관뒀나? 하는 대화를 했었는데, 그가, 바로 여기, 새로 오픈한 지점에 와있었던 거다. 하하하하하.


우리가 목례라도 가볍게 한다던가 눈인사를 나누는 사이었다면, 나는 반갑게 '여기 와있었어요?' 라고 활짝 웃으며 인사했을텐데, 그를 아는 게 나 뿐이라, 그저 나혼자 키득키득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숏사이즈 아메리카노를 시켜두고는 e 양에게 문자를 보냈다.


'스벅 신참 여기 와있네. 8번출구 앞 스벅에 ㅋㅋㅋㅋㅋ'


e 양과 나는 같이 웃었다. 하하, 재미있는 우연이다. 마침 책 속 은세가 반복되는 우연에 이건 혹시? 하던 생각이 나, 나도 이 우연이 한 번만 더 반복되면 다가가서 말을 걸어볼까, 하다가 관둔다. 이런 일을 하기에 나는 정말이지 늙고 지쳤다. 휴...


음료가 나오는 데에 가서 기다리다가 내가 주문한 숏사이즈 아메리카노가 나와서 냉큼 잡았는데, 내 오른쪽 옆에 있던 여자 사람이 '제가 먼전데요' 한다, 나는 반사적으로 '아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며 커피를 쥔 손을 놓았다. 에잇, 옥의 티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금세 내가 주문한 음료가 나왔고, 나는 선인장을 반복 청취하며 까페를 나왔다. 그러다가 또 푸핫- 했는데,


거기 대체 뭐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성인 남자사람들 떼거지가 달리고 있는거다. 간혹 올림픽 공원 가는 길에 체대 학생들이 뛰는 걸 보았지만, 여긴 체대가 있는 것도 아닌데..피트니스 센터에서 나와서 뛰는건가? 일전에 이쪽 길로 퇴근하다가 퇴근 길에도 뛰는 남자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인 것 같은데 짧은 소매의 옷도 그랬지만 다들 한 근육들을 하는거다. 뛰는 데 짧은 바지 밑으로 다리의 근육과, 짧은 소매 밑으로 팔 근육이 다 드러난다. 도대체 왜 그러는건지 모르겠지만 저만큼 가더니 다시 뒤를 돌아 이쪽으로 뛰어 온다. 그러더니 또 얼마큼 가다가 다시 뒤를 돌아 저쪽으로....



당신들 뭐하는 거에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역시 이런 일을 하기에 나는 너무 늙고 지쳐서...관둔다. 다만, 나는 역시 근육이 좋다, 라는 생각을 한다. 근육은 삶의 생생한 증거, 활력 처럼 느껴진다. 역시 근육이 짱이다. 나도 근육녀가 되어야 겠다, 고 어제 했던 결심을, 작년에 했던 결심을, 오년전에 했던 결심을, 다시 했다. 내일 또 하겠지?








며칠 전에 읽은 책에서 이런 구절을 봤습니다. 용기를 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바꿔 생각하면, 이런 말도 될 것 같아요. 용기를 내면 모든 게 달라진다. 
5466 님, 용기를 내 보세요. 또 모르죠. 용기를 내면 모든 게 달라질지도.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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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14-11-06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옛날 일이 생각났어요.
아침 일찍 신촌으로 출장을 갔다가 10시쯤 다시 돌아오려고 직원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50대 중반정도의
머리숫이 별로 없는 중년의 아저씨가 팬티 바람에 런닝은 입었고 와이셔츠 팔은 꿰고 단추는 잠그지도 못하고
양 손에 양복이랑 구두를 들고 뒤를 돌아보며 허겁지겁 뛰어가는거에요.
이 장면이 어떤 상황인거 같으세요?
아무리 아침 일찍이라지만 그래도 신촌인데 보는 눈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20년도 더 된 일인데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요 ^^

이 책 아직 못 본 책인데 찾아봐야겠어요. 재미있을것 같아요 :)

Mephistopheles 2014-11-06 10:11   좋아요 0 | URL
바람피다 걸렸군요.

다락방 2014-11-07 08:1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제가 생각하기에도 바람피다 걸린건데, 이 경우엔 여자쪽 남편한테 걸린 경우라고 보면 되겠네요. 자기 와이프한테 걸린거면 그렇게 옷도 못입은 채로 도망가진 않을 것 같거든요.

이 책은 재미있어요 무스탕님. 남자가 너무 완벽한 게 흠이지만 ㅋㅋㅋㅋㅋ

Mephistopheles 2014-11-06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터가 후라이팬 위에서 녹아내릴 정도로 감성충만해지셨군요....

다락방 2014-11-07 08:14   좋아요 0 | URL
저는 녹을 준비가 되어 있는 버터이지만 아직 달궈진 후라이팬을 만나지 못했....( ˝)

아무개 2014-11-06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보고싶어요 다락방님 *^^*

2.<8번출구로 나가기로한다....5번출구로 나와 조금걸으니..> ㅎㅎㅎ

3.허경환의 허닭 맛잇습니다. 함께 건강한 근육녀가 되어봅시다.
`우리 아직 그렇게 늙지 않았습니다`라고 큰소리로 외치고 싶지만
작게 속삭여 봅니다.... ㅠ..ㅠ

다락방 2014-11-07 08:16   좋아요 0 | URL
1. 전 별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3=3=3=3=3=3=3=3=3

2. 댓글 보고 수정했습니다. ㅋㅋㅋㅋㅋ

3. 허닭이란 게 있어요? ㅎㅎㅎㅎ 처음 알았네요. 전 닭가슴살 안좋아합니다, 아무개님. ㅎㅎ 세상엔 맛있는 게 널리고 널렸어. 그치만 맛있는 것만 먹으면 근육녀가 될 수 없지...하아- 근육녀가 되기엔 너무 늙고 지쳤...하아-



2014-11-06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1-07 08: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와 2014-11-06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오후, 지금 들어도 좋네요.
`선인장`

후흣. 사과도 먹었다요. 딱좋다. 일상이 이만큼만 진행(!)된다면 살 수 있을거 같아..

다락방 2014-11-07 08:18   좋아요 0 | URL
응 요즘은 계속 에피톤 노래만 들으며 다니고 있어요. 좋아...선인장 좋지...

일상이 나는, 좋았다 안좋았다 해요. 뭐, 언제나 그랬지만....
그래도 오늘은 금요일! 술마시고 기절해버려욧!!

열매 2014-11-07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인장이란 노래는 제목만 알고 있었는데 오늘 첨 들어봐요~
노래도 좋고 글도 좋고 다락방님의 일상이 무척 재미있게 느껴져요.ㅎㅎ
저 책을 보니 이도우의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이 떠오르네요^^
주말 잘 보내세요 다락방님 : )

다락방 2014-11-10 08:51   좋아요 0 | URL
오, 사서함을 읽으셨군요!
저도 사서함을 떠올렸답니다. 조용하고 은근한 그러나 설레이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두 소설은 무척이나 닮아있습니다. 저는 산드라 브라운 식의 열정적인 사랑쪽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 말이지요. 아하하하.
주말이 끝났네요 꿀이님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