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추락사고로 무인도에 아이들이 정착하게 된다. 여섯살 아이부터 십대의 소년까지. 한 명의 아이가 다른 한 명의 아이를 발견하고, 그들은 소라를 주워 크게 불어서 혹시 다른 아이들이 있는지 확인한다. 소라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아이들은 소라를 분 아이에게로 모여들고 한 명씩 혹은 몇 명씩 모인 그 아이들은 자신들이 무인도에 떨어졌음을, 조종사를 포함한 어른들은 하나도 없음을, 단지 자신들 뿐임을 알게 된다. 구조될 때까지 어쨌든 이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그들 중의 대장을 뽑기로 하고 소라를 불었던 아이는 자신이 대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성가대를 이끌고 찾아온 아이는 자신이 대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투표로 인해 소라를 분 아이가 대장으로 선출되고, 이에 성가대를 이끌고 찾아온 아이는 분해한다.
어린 아이들이 모여서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자신들이 이 곳에서 살아남기위해서는 무언가를 해야하고,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이 무리를 이끌 대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해내는 게 놀라웠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진 본능인지도 모르겠다는 당연한 생각을 했다. 게다가 누군가는 대장이 되려하고, 누군가는 자신이 2인자임에 분해하는 것도 어른들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게 놀랍고 동시에 씁쓸했다. 사람은 저마다 다르고 그러니 누군가는 대장이 되고 싶어하기도 하며 누군가는 구석에 얌전히 앉아 누군가의 리드를 바라기도 한다. 문제는 대장이 되고 싶은 사람이 많아질 때 발생한다. 서로 자기가 대장이 되겠다고 싸우거나 상대를 비난해야 하니까. 이 과정에서 싸움은 거칠어질 수도 있고 피를 부르기도 한다.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의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유인원의 세계도 마찬가지.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책, '윌리암 골딩'의 《파리대왕》이 생각난건 이 영화, 《혹성탈출:반격의 서막》을 보고난 뒤였다. 2인자였던 '코바'는 인간을 좋아하고 인간과 평화관계를 유지하려는 무리의 대장 '시저'가 못마땅했다. 코바는 인간이 싫었으니까. 그들을 결코 믿어서는 안된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자신의 말을 들어서 자신들의 대장 '시저'가 인간들과 전쟁을 일으키기를 바랐다. 그러나 시저는 전쟁이 일어나면 그들만 죽는 게 아니라 우리도 죽는다, 는 것을 반복해서 얘기한다. 우리가 여태 이루어온 모든 것들을 우리도 잃을 수 있다고.
시저에겐 유인원의 생명이, 자신의 가족이, 자신의 가정이 소중했고 이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평화로만 가능했다. 전쟁은 이것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이 결코 아니었다. 처음엔 시저의 말을 들으려던 코바는 점점 시저에게 불만을 갖게 되고, 결국 코바는 반란을 일으킨다. 가장 충성스러웠던 시저의 부하는 가장 먼저 시저에게 반발하며 가장 폭력적인 유인원이 된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걸어가면서 아빠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조직에나 배신자는 있다' 고. 나는 아빠에게 그 말은 분명 맞는 말이지만, 그렇지만 코바가 왜 그러했겠느냐고 되물었다. 코바는 인간으로부터 실험의 대상이 되어 철창에 갇혀 살았었다. 그로 인해 얼굴과 목에 상처가 있다. 그런 코바가 인간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게 쉬웠겠냐, 코바는 인간을 증오했을 것이고, 그 증오가 전쟁을 불렀다. 만약 코바에게 인간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코바도 지금의 상황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인간이 오만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동물원에 가는 걸 몹시 좋아한다. 동물원에 가서 사자며 호랑이며 코끼리를 보는 것을 즐긴다. 때로는 아, 호랑이 보러 가고 싶다, 아 늑대 보러 가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나는 봄이 되면 으레 동물원에 가기를 즐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우리 속에 갇힌 사자며 호랑이며 코끼리를 보는 이것이 '옳다'거나 '정당하다' 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동물들을 동물원에 가둬두었기 때문에 우리가 동물의 모습을 책이나 영화에서만 보는 게 아니라 실제 눈 앞에서 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렇게 볼 수 있게 하는 것 자체가 '인간 중심적인' 사고라고는 생각한다.
영화속에서 코바는 인간들에게 '너희들도 철창에 갇혀봐' 라고 울부짖는다. 이 장면은 섬뜩한데, 그것이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생각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현재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똑똑한 종이므로 다른 동물들의 '위에' 군림하고 있다. 인간이 아닌 종을 가두고 훈련하는 것들을 할 수 있는건 현재 우리가 가장 '똑똑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똑똑한 종의 출현을 생각한다면 아찔한 사실로 변한다. 영화처럼 유인원이 말을 할 수 있게 되고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들이 우리보다 더 강해질 수도 있다. 유인원이 아니라 더 강한 종이 출현해서 우리를 마치 애완동물 다루듯 한다면, '관람'하고 싶어 우리에 가둔다면, 그 때 우리의 기분은 어떨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왜 다른 종들에게 '이미' 하고 있는가.
이에 아빠는 '네가 왜 그런것까지 생각하냐' 라고 기막혀 하셨다. 넌 영화를 영화로 보지 못한다며, 지금 니가 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고, 그러니 너는 이 영화를 보고 돌아서 잊으면 된다고, 영화를 보는 동안만 재미있게 보면 된다고 하셨다. 나는 아빠랑 영화를 보고나면 언제나 이렇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맞서게 된다. 나는 언제나 '이러면 어떡하지, 저러면 어떡하지?' 를 말하고 아빠는 언제나 '영화야 영화 영화라고' 라 맞선다. 우린 같은 영화를 한 자리에 앉아 보면서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걸 느낀다. 그리고 내 입장에서는 아빠가 그러는 게 좀 답답하다. 아빠가 보기에 나는 좀 지나칠 것이고.
그렇다고 내가 앞으로 동물원에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결심하지는 않는다. 나는 가끔은 또 맹수가 보고 싶을 것이다. 계속 영화를 볼 것이고 그러다 어느날에는 인간이 지나치게 오만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이 오만함을 즐기는 나야말로 가장 모순된 존재일런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것을 영화라고 생각하고 인간이 오만하다는 전제를 딱히 받아들이지 않는 나의 아빠가 일관된 존재일런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끝, 나는 시저 때문에 평화는 다시 찾아올 수 있을거라 믿었다. 그러나 시저는 말한다. '유인원이 전쟁을 일으켰고 인간들은 결코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이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남한과 북한도, 일본과 한국도. 그리고 더 뻗어나가 아직도 전쟁중이거나 전쟁을 노리고 있는 모든 나라, 모든 장소들도. 우리가 평화를 원한다면, 그전에 먼저 '용서'를 하는 것이 우선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서가 없는한, 평화도 없을 거라고. 그러나 이것은 이상적인 바람일 뿐이고, 사실 이곳의 나는 나에게 잘못한 사람조차 잘 용서하지 못한다. 아니 어떤 잘못에 대해서는 죽을때까지 잊을 수 없을거라는 생각도 한다. 인간들에게 평화는 요원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어제 까페에 가서 나랑 함께 책을 읽던 남동생도 전날 이 영화를 보았는데, 뜬금없이 내게 '나 시저 같지 않냐?' 라고 물었다. 나는 '뭔 소리야. 시저는 나지. 너는 코바야.' 라고 했다. 그러자 남동생은 나에게 '누나는 모리스 같아' 라고 했다. 모리스? 모리스가 누구였지? 남동생은 내게 말했다. '있잖아 책 읽는 원숭이. 그 크고 혼자 이상하게 생긴...' 아...생각났다. ㅠㅠ 모리스는 그러니까 얘다.
내가 모리스............라고?
덧붙임: Humans of New York 의 번역본의 제목을 물으시는 분이 계셔서 링크합니다. 왼쪽이 번역본, 오른쪽이 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