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쿡이 늘 염두에 두는 것은 '죄책감'인것 같다. 그 죄책감을 떨쳐내기 위해 감추고 살아보려 해도 잘 되지 않는 마음 깊은 곳의 불편한 그 느낌. 그래서 언제나 토머스 쿡의 책을 무겁게 읽을 수밖에 없는것 같다. 싸이코패스를 그리는 게 아니라, 토머스 쿡은 '우리'를 그린다. 나쁜 의도로 잔인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나쁜 의도가 아니었는데 작은 실수-혹은 장난-를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커다란 상처를-혹은 죽음까지도-남기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그 잘못이나 실수 전과 후에도 그런 실수를 다시 하지는 않지만, 그 한 번의 실수가 불러온 것은 치명적이었던, 그런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작가인 줄리언 웰즈가 자살을 했고, 그의 친한 친구와 여동생은 도대체 왜 줄리언이 자살한건지 그간 그와 했던 대화들을 돌이켜보고, 그가 썼던 책들을 다시 읽어보고, 그가 만났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보고, 그가 갔던 장소에 다시 가본다. 줄리언은 언제나 공포를 주는 사람, 잔인한 사람, 학살에 참여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로 써냈는데, 그 중에 《쿠엥카의 고문》이란 책의 이야기는 다른 책들의 이야기보다 더 아팠다. 아래 인용문은 쿠엥카의 고문을 다시 읽은 친구 필립이 요약한 줄거리이다.



사건 당일, 그리말도스는 가끔씩 일을 했던 프랑시스꼬 루리즈의 농장에서 자신의 초라한 집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목격되었다. 그러나 그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그다음 날 여동생이 치안당국에 오빠의 미귀가 사실을 신고했다. 그녀는 실종 당일 오빠가 양 몇 마리를 팔았는데 오빠가 양을 팔고 받은 돈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적어도 두 남자가 알고 있었을 거라고 주장했다. 발레로와 산체스라는 남자였는데, 우연인지 몰라도 그들은 틈만 나면 그리말도스를 조롱하고 괴롭히고 학대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그리말도스의 돈을 빼앗고 살해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수사가 시작되었고, 다른 주민들도 수사관들에게 발레로와 산체스가 의심스럽다고 진술했지만, 그리말도스의 시신이나 직접적인 살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1911년 9월에 수사가 종료되었다. (p.58-59)



그리말도스의 가족들이 오빠를 찾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를 견뎌내며 얼마나 괴로웠을지는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다. 여기에서 잠깐 며칠전에 읽었던 《리뎀션》이 생각나는데, 그들은 발레로와 산체스로부터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점점 더 그들이 범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들은 용의자들을 계속 주시하며 때를 기다렸고, 1913년 쿠엥카에 새 판사가 임명이 되자, 증거부족을 이유로 발레로와 산체스 사건을 기각한 전임 판사와는 달리 새 판사가 이를 번복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칼을 빼들었다.

새 판사는 젊고 시기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미해결 사건이라는 망령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괴롭혔다.

발레로와 산체스는 다시 체포되었고, 이번에는 치안경비대가 호세 마리아 로뻬즈 그리말도스의 죽음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그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에 대해서도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결심을 단단히 했다.

발레로와 산체스에게 끔찍한 고문이 가해졌다. (p.60)



이 책을 다시 읽는 줄리언의 친구 필립은, 여기에서 줄리언이 고문 장면을 고문 피해자의 입장에서 얼마나 자세하고 잔인하게 묘사했는지를 얘기한다. 고문자의 얼굴 표정이라든가 채찍 소리 같은것들. 그러나 나는 이 책 속의 책, 쿠엥카의 고문의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했다. 끔찍한 결말이니 당연히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짐작하면서도, 그러나 내 짐작이 틀리기를 바랐다. 



고문을 당한 발레로와 산체스는 호세 그리말도스를 살해한 후 시신을 훼손했다고 자백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시신을 유기한 장소를 말하지 못했다. 줄리언이 주목했듯이 이 사실은 자백의 신빙성을 의심하게 만들었어야 했지만, 오히려 그들의 유죄를 입증하는 추가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p.68)


그리고.


수많은 범죄 혐의에 대하여 검사는 사형을 구형했지만, 재판은 스페인 사법부의 미로 같은 방들을 거치면서 질질 끌었고, 1918년이 되어서야 마침내 피고인들에게 각기 18년의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그들은 6년 후에 가석방 되었고, 그러부터 2년 후인 1926년 봄, 줄리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그토록 오랫동안 잔혹하게 살해된 것으로 추정됐던 가엾은 엘 세빠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엘 세빠는 그 십수 년 동안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p.69)



아...나는 이 책을 책 속의 책으로 만났기에 다음 책장을 넘길 수 있는거란 생각을 했다. 만약 쿠엥카의 고문이란 책이 현실에 존재하고, 내가 지금 이자리에서 그 책을 읽었다면, 엘 세빠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는 문장을 읽는 순간 책장을 덮어버리지 않았을까. 답답하고 또 답답해서 주먹을 불끈 쥐고 내 가슴을 몇 번이나 치지 않았을까. 이 이야기에서 내가 미워해야 할 대상은 과연 누구일까. 왜 엘 세빠는 다른 마을에 살면서 식구들에게 안부를 전하지 않았을까. 한 마디 안부만 전했던들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그들에겐 대체 무슨일이 있었기에, 어떻게 지냈었기에, 그들은 그간 어떤 시간을 함께 보냈기에 일이 이렇게 된걸까. 사랑하는 가족이 사라지고, 거기에 분명 그동안 그를 괴롭히던 사람이 연루되었을 거라는 느낌, 그것을 단순히 피해망상이라고 볼 수 있을까. 고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당연히, 의심은 확신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 확신, 그 확신은 얼마나 위험한가. 발레로와 산체스는 자신들이 벌이지도 않은 일 때문에 고문을 당하고, 자백을 하고, 수감된다. 그들의 그 고통의 시간들을, 이제와서 '판단을 잘못했구나' 라고 말한들 어떻게 돌이킬 수 있을까, 어떻게...



‥‥그 숨 막히는 작은 공간 안에서 생애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살해되지 않은 자 엘 세빠는 쿠엥카의 먼지 자욱한 거리들을 그리워하면서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부담이 가장 적은 운수 게임의 복권을 팔고 있었다. 이렇게 그는 죽지 않고 살아있었지만, 관 속 같은 공간에 갇혀 그 어둠 속에서 더운 입김을 내뿜으며 자신의 죄를 잊고 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p.69-70)



자신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오랜동안 아무에게도 자신이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단 사실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게된 엘 세빠 역시, 편안한 삶을 살 수는 없었다. 줄리언 웰즈는 이런 소설을 쓰는 사람이었고, 그런 줄리언 웰즈가 자살을 했다. 철저한 고증을 거쳐 악에 가득찬 사람들을 혹은 고통스러운 피해자들을 책 속에 녹여냈던 줄리언 웰즈가 자살했다.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다뤘지만 정작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줄리언은 시간이 흐르고 또 흘러도, 책을 한 권 내고 또 내고 또 내도, 자신이 저지른 일, 그리고 그 일이 불러온 그 결과를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잘못한 것, 그리고 그 잘못이 가져온 치명적인 결과는 결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일일테니까.


나 역시 잘못 혹은 실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어제는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는데 불현듯 초등학생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 때 내가 저질렀던 잘못. 내 변명을 하자면, 나는 그때 그게 잘못이란걸 알지 못했다는 것뿐인데, 지금은 그게 얼마나 잘못된 일이었는지를 안다. 그래서 고통스럽다. 혹여라도 그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누군가가 그 일을 살아오며 내내 잊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때문에. 아무리 어렸다고한들, 나는 왜그랬을까. 이 생각을 하면 끝도없이 벼랑 밑으로 떨어지는 기분이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계속 떨어지기만 하는 기분. 마음이 너무 아프다. 나는 추락하고 있는데, 아무도 내게 손을 내밀어 잡아주지 않는다. 애초에 추락의 길로 들어선 게 나였으므로.


줄리언은 세상에 일어났던 많은 악한 일들을, 그 일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책으로 알렸다. 그가 자신의 죄를 사하는 방법이었을런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꽤 고마운 대상이 되기도 하고 어떤 좋은 일을 한 사람이기도 할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감동을 주기도 했을 것이고, 누군가의 인생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저지른 잘못이 기억에서 지워지지는 않는다. 좋은 일 하나에 나쁜 일 하나를 상쇄시키는 일 따위, 인간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나는, 스스로 다독이는 방법을 찾을 수는 있다. 이것은 자기합리화에 불과하겠지만, 내가 그 실수를 저질렀고, 그 실수로 인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실감했기 때문에, '다시는' 그 일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줄리언 역시 마찬가지였을텐데, 줄리언에게도 이런 합리화가 있었다면 자살까지 이르지 않았을 수 있었을텐데,  줄리언이 가져온 결과는 지독하게 끔찍하였으므로, 그는 다시 일상에 발붙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일이 그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지만, 일이 그렇게까지 되었다. 이 책속에는 이런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아이들은 장난으로 개구리를 죽이지만 개구리는 정말 죽는다'는. 잔인한지 모르는 채 인간은 가장 잔인해질 수 있지 않은가.



그제 아침에 출근길에 길고양이를 만났다. 잽싸게 멈춰서서 가방을 뒤져 소세지를 꺼냈다. 소세지 껍질을 벗기고 소세지를 고양이 쪽으로 던졌는데, 고양이는 잠깐 경계하고 도망가더니 좀처럼 소세지 근처로 오지는 않고 쳐다보기만 하는거다. 내가 없어야 먹겠구나 싶어 나는 자리를 떴다. 그리고 어제 퇴근길. 또 고양이를 마주쳤고 나는 얼른 가방에서 소세지를 꺼냈는데, 이번 고양이는 경계하는 게 아니라 내가 얼른 먹을 걸 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아니나다를까, 껍질을 까고 소세지를 던져주니 잽싸게 물고는 뛰어가는거다. 오호라. 소세지가 두 개 남았는데 하나는 내가 좀 먹어야겠다. 배가 고프네. 각설하고,



토마스 쿡은 이 책에서 인간의 잔인함이 비단 인간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투견장의 장면이 그것인데, 와, 나는 특별히 더 동물을 사랑하고 애착을 갖는 사람이 아니고, 집에서 동물을 기르거나 하지도 않고, 길고양이에게 소세지를 준 것도 이제 겨우 시작한 사람이지만, 와- 나같은 사람도 보기 힘든 이 장면을 동물에게 애착을 갖는 사람들이 읽는다면 굉장히 힘들겠구나 싶었다. 개들을 훈련시키고 싸움터에 내보내는 인간들, 그 싸움을 보며 즐거워하고 흥분하는 인간들. 그들이 대체 뭐가 다른가. 그러나 투견에 가장 능숙한 개인 '도고 코르도바'는 멸종이 됐다고 한다. 



"도고 코르도바는 이젠 멸종이 됐네." 개싸움에 대한 묘사를 마치면서 소보로프가 말했다. "투견장에서 죽기도 많이 죽었고, 살아남은 놈들도 아주 예민해져서 딴 놈들과 붙여만 놓으면 서로 물어뜯고 죽여버렸거든. 그래서 멸종된 거야." 그는 안타까운 미소를 지었다. "흉포성만 가지고는 삶이 유지될 수 없다는 말이 맞아." 그가 말했다. "어디서 들었는데 마음에 와 닿는 말이더구먼." (p.259)






흉포성만 가지고는 삶이 유지될 수 없다는 말이, 내게도 와 닿았다. 흉포성만 가지고는 삶이 유지될 수 없고, 먹을거리가 있다고 해도 삶이 유지될 수는 없다. 삶에는 그보다 좀 더 따뜻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감정을 건드리는 것들이, 마음을 움직이는 것들이 끼어들어야만 한다. 얼마전에 조카와 함께 서점에 가서 보았던 그림책인 《프레드릭》이 떠올랐다. 모아놓은 식량이 없어지자 많은 쥐들이 프레드릭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말하는 장면이. 







영화 《그레이트 뷰티》의 배경은 이탈리아 로마이고, 주인공인 '젭'은 65세의 노인이다. 어마어마하게 부자인 그는 파티를 즐겨하고 술을 떡이 되도록 마시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노년을 즐기고 있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첫사랑의 남편이 찾아와 첫사랑의 죽음을 알린다. 젭의 일상이 그 일을 계기로 갑자기 변하거나 하진 않지만, 그는 점점 생각이 많아지게 되고, 시간이 흘러 첫사랑의 집에 찾아가보니 첫사랑의 남편은 다른 여자를 만나 재혼을 했다며 자신의 아내를 소개시킨다.


젭은 그들과 헤어지기전, 그들에게 '이제 무얼할거냐' 라고 묻는다. 젭과는 형편이 많이 다른 그들은 별로 할 일이 없다는 듯' 아내가 다림질을 마치면 같이 와인을 한 잔 마실거고, 그 후엔 티브이를 보다 잘 거' 라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젭에게 되묻는다. 당신은 무얼할거냐고. 그러자 젭은 사람들과 어울려 파티를 할거고 술을 마실거라고 말한다. 아마 당신들이 일어날 때쯤 자신은 잠이 들게 될거라고.


이때, '다림질을 마치고 같이 와인을 마시고 티브이를 보다가 잠드는' 그 부부가 무척이나 행복해보였다.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요란한 파티가 아니어도, 사람들 틈에서 들썩이거나 화제가 되질 않아도,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지 않아도, 그저 일상의 조용조용한 장면장면마다 누구와 평화롭게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그 일상은 딱히 누군가에게 강요받지도 또 강요하지도 않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가장 행복한 장면은 가장 조용하게 찾아오고, 굳이 누군가에게 드러내지 않아도 좋은 것. 인생 최고의 순간은 그런 순간들이 주는 게 아닐까.




로레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 여행도 끝이 보이는 것 같으니까 미리 말해두는데, 오빠랑 함께 해서 즐거웠어. 오빠랑 함께 여행하고 이야기를 하고 오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거웠어."

"나도 그래, 로레타."

그녀가 소리 내어 웃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대화를 책에서 읽는다면 손발이 오글거리는 장면이겠다, 그렇지?"

"그래, 그럴 것 같네." 내가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감상에 젖는 순간이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일 때가 많아." (p.272)



같이 일상을 공유하는 것, 사소하지만 조용한 시간들을 함께 하는 것이 '감상에 젖는 순간'으로 바로 직행하는 건 아니지만, 그 일상 틈틈이 나라면, 감상에 젖기엔 충분하다. 그래서 그 순간들을 최고의 순간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마침 어제 꾸었던 꿈 생각도 난다.


어제 꿈에 나는 한 남자와 같은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무슨 학원인지는 모르겠는데 수강생이 엄청 많았고, 학원 근처에도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학원이 끝나고 그와 함께 나란히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시간이 무척 다정하게 느껴지는거다. 그 다정함에 힘입어 나는 슬쩍 그에게 팔짱을 꼈다. 이러지 말라고 말하면 어쩌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는 이러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 조용히 내 팔짱을 빼면서 그대로 손을 잡았다.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는, 손을 잡는 사이는 아닌데, 이렇게 손을 잡아도 되나?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이래도 되는건가? 라는 생각. 그러나 그와 손을 잡은 게 무척 좋아서 모르는 척 손을 잡고 그 다정함을 한껏 즐기며 걷고 있는데 손에 너무 땀이 차는거다. 내 손이 아니라 그의 손에서 나는 땀 같았는데, 다한증인가, 하고 생각하며 나는 손을 살짝 놓고는 '땀' 이라고 작게 말한 뒤,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의 손을 닦아주었다. 닦아주고 나니 그는 잠깐 갈 데가 있다며 어딘가로 가버려서, 아이씨 땀 나도 그냥 잡고 있을걸, 하고 생각하다가 깼는데, 아침에 일어나 머리를 감으면서 으응, 이 꿈은 뭐지, 왜 이런 꿈을 꿨을까, 했다.



앗! 그러고보니 저 영화 그레이트 뷰티에 다한증으로 고생하는 수녀 얘기가 나오는데, 그래서 꿨나??????????????????????????????????????????????? 어쨌든.




토머스 쿡의 번역된 소설은 이제 《심문》을 빼놓고 다 읽었다. 처음 《붉은 낙엽》을 읽었을 때는 내가 이 작가의 책을 계속 읽게 될 줄은 몰랐는데, 《채텀 스쿨 어페어》가 좋아서-다른 말로 엄청 불편해서-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내 나름의 순위를 정해봤다. 《줄리언 웰즈의 죄》가 좋은데, 그럼에도불구하고 내 순위 안에서는 4위다. 이 정도가 4위라면, 앞으로 나올 그의 소설을 기대하기에 충분하다. 믿을만한 작가다.












며칠전에 만난 친구가 나더러 회사 그만두고 세계 곳곳의 맛집을 찾아다니며 먹방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했는데, 흐음, 그거 하다보면 금세 200키로 찍을 것 같아 거절했다. 역시 나한테는 평범한 직장인이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밥이나 먹자.



마지막으로 어제 친구가 보내준 독특한 노래.









"줄리언은 소련 강제 노동 수용소의 죄수들이 감방벽에 다른 어떤 단어보다 더 많이 써놓은 단어가 있다고 했네.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단어, 어머니나 아버지, 하느님 같은 단어가 아니라고 했지." 에두아르도는 또 내 오랜 친구와 함께 있으면서 그의 심각한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자쳄'이라는 단어였네."
"자쳄이 무슨 뜻이죠?"
"'왜'라는 뜻이지." 에두아르도가 대답했다. 당혹스럽고 침울한 표정이었다. "이 말이 줄리언의 마음에도 쓰여져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군. 배신이 적어놓은 단어라는 생각도 들고." (p.151)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4-06-20 0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20 0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개 2014-06-20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저는 지금 누구누구님들이 좋다고 강추했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절반 정도 읽었습니다.
참...특이한 소설이네요.

2.'왜?'라는 질문은 부조리한 세상속에서는 더욱더 절망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은거 같아요.
아무리 왜냐고 자신에게.... 신에게.... 물어봐도
자신이 겪는 이 일이 이해가 될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라면
그저 뭐 내 팔자가 이렇지 뭐 자포자기 하고 사는것이 오히려 조금은
더 편하게 살수 있는 방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잘 쓰는 뭐라더라
그...지금의 시련은 하나님이 다 널 사랑해서 그런거다 뭐 이딴거 믿으면서요....

3.기분이 계속 우울하니까 댓글도 삐딱~~ =..=


다락방 2014-06-20 11:52   좋아요 0 | URL
1. 저는 지금 노명우의 <세상물정의 사회학>을 읽고 있습니다. 뜨끔한 문장들이 나올때마다 뜨끔뜨끔 합니다. 유권자와 소비자 부분에서 특히..

2. 지금의 시련은 하나님이 다 날 사랑해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을 이겨내야하는 거구나, 하며 내 몫인가보다, 체념하게 되는 경우가 저도 더러 있긴 합니다.
아니, 그래야 버텨지기도 하고 말이지요.
너무 싫잖아요, '너를 사랑해서 그래' 라는 말. 싫어요 진짜.

3. 저는 조울증인듯 우울했다 웃었다 합니다. 얼마전엔 다정한 남자사람 친구로부터 '요즘 나한테 왜이렇게 잘해줘?' 란 말을 들었어요. '며칠전엔 짜증냈잖아' 하면서요..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레와 2014-06-20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더욱 탄력붙은 다락방의 리뷰러쉬~ 좋아요!!! (엄지척!) 히히..

다락방 2014-06-20 11:52   좋아요 0 | URL
탄력붙었다는 말은 종종 듣고 있는데 댓글은 점점 줄어요...뭐징.. ㅎㅎ

자작나무 2014-06-23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