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한 예수(Jesus)라면 그리스도(Christus)가 세속의 권력(Caesar)과 그 열매를 축복하리라고 믿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의 기독교'는 그런 식으로 제도화된 것이다. 조금 에둘러 논의를 이어가자면, 자본이 권력과 사통하면서 애초부터 국가와 통혼(通婚)한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굽어보면서 낱낱이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초기 사회주의 운동이 국가의 문제를 조금 더 진지하게 사유하지 못한 채 '국제화'에 서두른 실책을 안다. 그래서 바쿠니(Mikhail Aleksandrovich Bakunin, 1814~1876)의 축출에서 두드러지듯이 아나키스트 운동의 급진성과 그 공동체적 생산성은 애초부터 권력의 자장에서 제외되면서 소수화되고 말았다는 사실도 안다. 마찬가지로 젊은 예수가 독특하게 일군 '동무공동체'의 아나키즘적 급진성('네 가족을 버리고 내게로 오라')도 중세의 가톨릭 제국-체제 속에서 아득이 볼각해버렸다. 그런가 하면 21세기의 한국 개신교회는 예수의 첫닭울이와 같은 메시지를 까마득히 잊은 채 강박적으로 붙들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기껏 '가족주의'다. -17쪽
'계급'이 다른 데다 이미 전쟁미망인이었던 터라 둘 사이의 결합은 쉽지 않았겠지만, 젊은 날의 B는 워낙 뛰어난 미인이었고, 알다시피 미인이라면 자본도 이데올로기도 종교도 계급도 적수가 되지 못한다.-25쪽
가령 내가 교회를 멀리하게 된 사연이 룸살롱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C목사와 같은 이들의 탓으로 돌릴 순 없지만, 소름이 돋거나 하품이 솟는 주류 교회들의 행태에도 불구하고 '예수'라는 어느 유묘(幽渺)한 존재를 빌미삼아 그 애달픈 장소에 대한 관심을 끊을 수 없는 데에는 E 전도사와 같은 이들의 가없는 정성과 노고가 숨어 있는 것이다. 나는 즐겨 '사람만이 절망'이라고 되뇌지만, 드물게 '사람만이 희망'인 경우도 있는 것이다.-72쪽
우리 시대 세속의 성분과 구조를 감안한다면 한 달에 1300만 원씩 혹은 그 이상-이재용씨처럼 한 달의 전기세만 2400만 원씩을 낼 수 있도록-을 번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인지, 그러니까 보다구체적으로는 그 수입의 앞뒤가 어떤 정당성으로 꾸려지거나 일관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개인과 체계가 그 뿌리에서부터 사통할 수밖에 없는 세속에서, 개인의 상처와 패착이 개인의 것만이 아니듯이 개인의 사회적 성취와 물질적 풍요가 과연 그 개인만의 것으로 가뿐히 할당될 수 없다면, 이 호기심은 적절히 재구성되어 정당한 사회적 의제로 수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비록 그 개인이 점유할 지분이나 역할, 그 능력이나 노력을 넉넉히 인정하더라도, 3인 가족의 생활을 위해서 1300만 원 이상의 벌이를 반성 없이 계속하고, 그 벌이의 코드가 함입(陷入)되는 체계에 맹목으로 복무하는 것은 비평거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91쪽
G 가 내내 부자였을 뿐 아니라 내 기억을 훨씬 상회하는 그들만의 내력 속에서도 부자-엘리트층으로 사회적 위세 속에 살아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아무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그와 그드의 부(富)가 교회 내에서도 인정과 존경의 잣대이자 신의 축복에 대한 증거로 숭상되었고, G와 그들 집안의 성취에 대한 세속적 평가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기복신앙과 풍요의 신학 덕에 한 점의 의혹도 없이 교회 속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무엇보다도 G는 세속 속에서 열심히-합리적으로 돈을 축적하고, 교회속에서 열심히-은혜롭게 돈을 배치하는 사람인 셈인데, 이를테면 그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종교인 한국 개신교는 그의 자본-노동을 통해 한국 졸부자본주의의 복사판으로 재생산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었다.-98쪽
'모국어만 아는 자는 이미 그 모국어도 제대로 모르는 것'(괴테)이라고 하듯 한 권의 책만을 맹신하는 것은 이미 책을 읽는 게 아니다. 그는 종이로 된 맹신의 늪을 얻은 셈이다. 따라서 책을 읽는 자는 반드시 여러 책을 읽는 자이며, 읽으면 읽을수록 책과 자신 사이에 개재하는 낯선 부조화에 시달리는 자이며, 책이라는 '세계개창성'과 그 타자성에 조심하는 자이기 때문이다.-110-111쪽
그렇지만 진리보다 '진리를 말하지 않도록 조심'(니체)하고 복음보다 복음에 대한 아이러니를 말하는 자가 인문학도일진대, 자신이 지닌 믿음의 내용이 그 자체로-그러니까 현실적 전유(realistic appropriation)의 복합적 배려나 고민조차 없이-'복된 소리[福音]'라고 확신하고, 이를 그 누구에게든 애써 선전하려는 이는 대체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 자신의 것에 그처럼 당당하고, 심지어 타인들의 가책을 유발시키려는 태도 속에서 한껏 오연하려면 대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 것일까? 자신과 관계되는 것이라면 무릇, 자신의 경력이든 실력이든 혹은 자신의 자식이든 재식(才識)이든 조심스럽고 겸허하게 소개하고 발보이게 드러내지 않는 게 한발 앞선 자의 인지상도(人之常道)일 것인데, 제 종교가 제일이라고 천지가 시끄럽도록 외치는 이 사람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111쪽
'혼인은 사랑의 무덤'이라는 세간의 혹펼처럼 외려 (마치 무의식의 어두운 야성이 주체의 찢어진 틈 속에서야 얼핏 보인다고 하듯이) 혼인과 날카롭게 갈라지는 지점 속에서야 사랑의 진실은 부사처럼(adverbially) 번득이는 법이다. 그런 뜻에서, 앞서 언급했듯이, 사랑이라는 진지함 역시 '비보편적 일반성의 체험'으로서 탈(脫)가족주의적 동력을 지닌다.-118-119쪽
사랑이라는 진지함은 혼인관계라는 사회적 동화에 적절하도록 거세된 정념의 형식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페르소나의 찢어진 틈, 혹은 기성의 제도와 날카롭게 갈라지는 구석 속에서 발현되는, 근본적으로 탈(脫)가족주의적 지향인 것이다.-120쪽
책을 쓰지도 않았고, 그래서 글쓰기 행위에 옮아붙곤 하는 사후적 보충과 과장의 삶 대신 일회적 상호작용의 완결성에 힘을 다했으며, 무슨 번듯한 사회적 지위를 지니지도 않았던 우리의 스승 예수는 때론 당대의 관습과 상식을 무시하고 스스로 스캔들의 대상이 되기도하면서 민중의 현장을 오갔다. 그러나 그렇게, 민중과 대화적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룬 그 놀라운 각성과 변화의 현장은 까맣게 잊힌 채로, 기억과 전승은 체계가 되고 말았다. 그 추종자와 해석가들이 건설하고 건사해온 종교적 체계는 '정신이 없는 (관료적) 전문가' 로 들끓어 기능적으로 각박한 채 종종 턱없이 무능하다.-120-121쪽
종교는 스스로 빈 것으로 남아, 늘 종교가 아닌 것을 도우는 데 그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종교가 생활을 규제해왔던 현실을 뒤집어, 어떤 현실과 어떤 희망이 종교를 완성시키는 식으로-그러니까 종교가 생활을 도와, 바로 그 생활이 다시 종교를 완성시키는 방식으로-재배치되어야 한다. 마치 못난 인간들이 못난 신(神)을 제 꼴처럼 품은 채로 역시 못난 생활과 못난 욕망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거꾸로 좋은 사람들의 좋은 생활과 좋은 희망은 종교를 완성하고, 그 속의 신을 아름답게 재현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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