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잠자리에 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었으며,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포도주 한 잔을 따른 다음 거실 창가에 앉아서 길을 지나는 행인들과 까맣게 보이는 택시들이 만들어내는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텔레비전과 라디오와 스테레오를 껐다. 불을 켤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나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몇 시간 동안이나 가만히 앉아서 하염없이 술을 마실 수 있는 그런 기분에 빠져 있었다. (p.177)

















내가 내 방에 불을 끄고 가만히 앉아 창밖을 본다면, 베란다가 보인다. 베란다를 봐서 무얼해, 나는 조용히 생각할 일이 있을 때 불을 끄고 포도주를 들고 창가에 가 선 적이 없다. 그런건 생각해보지도 못했지만, 이 책속의 주인공이 창가로 가 가만히 창밖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기는 그 장면이 눈 앞에 선명히 그려졌다. 그건, 생각에 빠지는 가장 완벽한 장면, 가장 완벽한 시간, 가장 완벽한 장소로 여겨졌다.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는 것. 그것을 내가 있는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 



테스는 에이전시에서 십 년간 일해오고 있고, 나름 탄탄한 고객과 지명도를 가진터라 좋은 곳에 살고 좋은 것을 먹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 그녀가 런던의 야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사는건 당연하게 느껴지고. 만약 내가 혼자 살게 된다면 나 역시 시내의 야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그런 곳에 집을 구하고 싶다. 그러나 지금 내 월급으론 어림도없는 소리다. 헛소리다. 말짱 개소리. 대출을 받는데도 한계가 있지, 나는 베란다가 보이는 집을 구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The Agency 이다. 대체 왜 '톰 크루즈에게 전화 걸려오게 하는 법' 으로 바뀐걸까 궁금했는데, 책을 읽다보면 실제로 '톰 크루즈'가 나온다. 뿐만 아니다. 에이전시란 직장 답게 온갖 연예인이 다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 책이 그 연예인들을 총출동에 비례해 재미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중간 까지는 주인공한테 너무 짜증이 나서 읽을까말까를 고민하게 된다. 나는 완벽한 인물을 바라진 않지만 성장하는 사람이 좋다. 사악한 사람에게도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책속의 주인공은 어리석고 멍청하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지만, 그 실수로 인해 죄책감의 끝을 경험했고 소중한 친구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 친구의 약혼자인 줄 모르고 매력적인 남자와 섹스를 했다, 그래,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알면서도 또 했다. 그러니 친구를 잃게 됐다. 이걸로 그녀는 지옥을 경험했으면서, 자기의 성욕엔 문제가 있다고 그렇게도 속상해했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유부남과 불륜관계를 유지하며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자신의 지난 잘못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그것이 잘못인줄 알았으면서도, 그때문에 친구를 잃고 속상해했으면서도, 그녀는 한걸음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머저리같고 얼간이 같아서 등짝을 한 대 갈겨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야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를 다시 만나는 것을 몹시 고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도통 배우지를 못한다. (p.255)



하아- 물론 어떤 남자와 어떤 여자가 만났을 때 유독 화학적인 반응이 더 '세게' 일어난다는 것은 안다. 그럴 때 자신이 자신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한다. 그러나 왜 하필 그녀에게 그런 상대가 언제나 남의 남자여야 했을까. 대화가 잘 통하고 자신의 몸을 순식간에 달아오르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왜 번번이 남의 남자여야 했을까. 내가 나를 어쩌지 못하겠어, 라는 핑계를 대체 언제까지 들어줘야 하나. 그러나 위의 255페이지처럼, 그녀는 자신이 과거의 잘못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음을 알고 인식한다. 중간을 넘어가면서부터, 나는 그녀를 조금씩 지켜보기로 했다. 여러가지 문제가 그녀에게 쓰나미로 닥쳐와 그녀를 공원벤치에 홀로 앉아 비맞혔을 때, 세상 모두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지쳐 쓰러질 것 같았을 때, 조금, 그녀를 응원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응원하는 마음속에 슬며시, 무엇이(혹은 누가)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어줄 지에 대한 기대가 생겼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테스는 그래, 자신의 성적 욕망을 제어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 때문에 연애에 있어서는 자꾸만 바닥으로 추락하곤 하지만, 근복적으로 그녀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상대에게 어떤 말을 해야할 지 하지 말아야 할 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비오는 날 벤치에 홀로 앉아 무너졌던 그 상황에서 다시 재기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나쁜점들을 어떤 좋은점들이 상쇄해주는 건 아니지만, 그녀가 끝까지 지킨 작가의 의리 때문에 그녀는 다시 해 뜨는 날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랑 비슷하다. 영화로 만들어지는 쪽이 더 재미있었을 것 같다. 



책을 통틀어 여자가 포도주를 들고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기는 장면이 가장 좋았는데, 이 장면은 이런 비슷한 느낌을 줬던 '모신 하마드'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떠올리게 했다. 아, 나는 그 책 속의 이 장면에서 얼마나 맨하튼에 가고 싶었던가.




그녀는 눈을 감고 팔꿈치를 대고 뒤로 기댄 채, 의심할 줄 모르는 소녀처럼 졸린 듯한 미소를 지었어요. 나는 소변이 마려워 방광이 터질 것 같았어요. 나는 곧 돌아오겠다면서 화장실로 다려갔어요. 그런데 내가 돌아오자 그녀는 곤히 잠들어 있었어요. "에리카?" 불러도 대답이 없었어요.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그래서 망설이다가 결국 불을 껐어요. 블라인드가 올려져 있어서 맨해튼 불빛이 안으로 들어왔어요. (p.76)






톰 크루즈가 보고 싶다. 이 책 속의 테스가 그랬듯, 나도 내 눈앞에서 톰 크루즈가 미소 짓는 걸 보고싶다.  안녕?



크- 탑건을 보다가 톰 크루즈가 웃는 거 보고 마치 내게 웃어주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던 젊은 날이 있었는데...o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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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4-01-21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톰에게 전화 오게하려면 톰과 일을하면 되는거군요...
제가 무척 좋아하는 배우가 있는데 그 배우가 직장상사로 나오는 꿈을 꾼 후 많이 멀어진 느낌이 --a

다락방 2014-01-22 09:45   좋아요 0 | URL
톰과 일을 하면 되지만 톰과 일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인 것입니다. 테스에게도 그래요. 하하하하. 아우..우리 회사에는 왜 현빈 닮은 남자직원이 없을까요? 현빈 닮았다면 상사여도 괜찮을 것 같은데...킁.

에르고숨 2014-01-22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남의 남자'에 더 끌리는 이유를 정말 모르십니까? 배려나 성숙함이나 섬세함의 매력을 가진 이들이 알고 보면 보통은 '남의 남자'들이란 걸. 그러니까 어쩌면 부인/애인이 (적극적으로든, 아니면 그 존재 만으로든) 매력적인 남자를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을 저는 합니다만, 얄궂게도 말이지요.

다락방 2014-01-22 09:4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에르고숨님. 그런것 같아요. 부인 혹은 애인의 존재 만으로도 그 남자가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 사실인 것 같아요. 게다가 더 매력적인 남자는 자신에게 아내 혹은 애인이 있음을 밝히고 그들에 대한 마음이 진실한 것임을 밝히는 남자들이더라고요. 그런 남자들이 '난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냥 걔가 나 좋아해서 만나는거야' 따위의 말을 하는 남자들보다 더욱 근사하고 매력적인 것도 사실이고요. 그런 사실이야 알지만, 이 책속의 테스가 유독 두 다리가 후들거리게 욕망을 느끼게 하는 남자가 혹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남자가 '남의 남자' 인게 참 안타깝더라고요. 그런 남자가 싱글이면, 그래서 당당하게 내 남자가 될 수 있는 상황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그런 남자는 애시당초 '이미' 남의 남자이기가 쉽죠. 킁. 에잇.

현빈도 남의남자..대중의 남자..Orz

자작나무 2014-01-22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 좀 그만 봐요!

다락방 2014-01-22 10:29   좋아요 0 | URL
저 드라마 거의 안보는데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