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들을 위한 외국어 사전
샤오루 궈 지음, 변용란 옮김 / 민음사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당신은 내 프라이버시를 침범했어요! 그럴 순 없는 일이에요! "

처음, 당신은 사자처럼 나에게 소리친다.

"무슨 프라이버시요? 하지만 우리는 함께 살고 있는데! 우리가 연인이라면 프라이버시 없어요!"

"당연히 있어요! 누구나 프라이버시는 있어야죠!" (p.126)

 

 

스물셋의 여자는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 홀로 영국으로 날아온다. 중국에서 영국까지, 열시간 이상의 비행시간이 필요하다. 여자에겐 '자아' 혹은 '개인'이 중요하지 않았다. '개인'은 언제나 '당'에 속해야 했고, 그 당은 개인보다 우선했다. 집에서는 식구들과 한 집에 살아야 했고, 그런 그녀에게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낯선 개념이었다. 그녀는 그의 연인이었고, 당연히, 그녀는 그가 없는 동안 그의 일기장을 읽으며 그가 일기를 썼던 그 당시를 생각해보고 그렇게 그를 더 알고자 한다. 개인과 프라이버시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아직 영어에도 서툴며 영국 문화에도 서툴었던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그에게 자신이 그의 일기장을 봤음을 얘기한다. 아주 떳떳하게. 이 일은 그 남자를 깜짝 놀라고 당황하게 만든다.

 

 

여자와 남자의 물리적 거리는 비행기 시간만으로도 열시간 이상 떨어져 있었다. 내 두발로 걸어 오분 거리에 위치한 곳에 사는 남자라 해도, 우리의 물리적 거리가 그토록 가깝다고 해도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난 이상 성격과 가치관에 충동은 당연한 듯 올 수밖에 없다. 우리는 부모님이 달랐고, 사는 환경이 달랐고, 다닌 학교가 달랐고, 사귄 친구들이 달랐고, 읽었던 책과 들었던 음악, 보았던 영화들이 달랐다. 설사 같았다고 한들, 그동안 우리가 자라오면서 겪었던 주변의 모든 일들이 같은 걸 보고 다른 걸 느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가까이에 살았어도 당신은 내가 아니고 나는 당신과 같을 수 없음이 당연한데, 저토록 먼 거리의 남자와 여자라면 얼마나 더 많이 달랐을까. 그들이 서로의 다름을 낯설게 생각하면서도, 그들 사이엔 다른 국적 다른 언어가 자리하고 있으니, 어쩌면 그들이 외국어에 익숙해지고 그 공간에서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 자연스레 서로에게 동화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랑이 모든걸 극복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은 맞지만 사랑이 모든 일에 만병통치는 될 수없다. 서로의 언어를 더 잘 사용하게 됐다한들 나는 네가 될 수없고 너는 내가 될 수없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를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또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노력만으로는 극복될 수없는 것들이 언젠가는 찾아오고, 그것을 서로가 깨닫는 순간 그들은 우리가 이제는 헤어져야 할 때, 임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 이별은, 그렇게 온다.

 

 

 

남자는 영국 사람이고 여자는 중국 사람이다.

 

"티베트가 중국에 속한다던 당신 말이 기억나는군. 나는 당신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글쎄 ‥‥‥. 당신은 매사를 백인 영국인의 관점에서 바라보죠. 당신네 영국인들이 티베트와 중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 실패한 게 참 안타깝네요." 내가 맞받아친다.

"하지만 지금은 티베트가 중국의 식민지가 되었잖아요!" 당신이 목소리를 높인다.

"만일 티베트인들이 중국인들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어차피 영제국이나 미국인들에게 지배당했을 거예요. 왜냐하면 티베트는 정말로 경제적으로 독립한 적이 결코 없거든요! 그들은 언제나 다른 이들에게 의존하고, 강력한 정부에 의존할 필요 있어요. 중국과 티베트는 같은 땅덩어리에 있는데, 왜 우리 두 나라가 함께일 수 없다는 거죠?"

"그건 '함께'라는 의미에 따라 다르겠지! 티베트 문화를 희생 대가로 삼을 수는 없는 거예요." (pp.204-205)

 

 

"당신과 매일 식사하는 건 지루해요. 당신은 채소만 먹고, 밀도, 파스타도, 하얀 쌀도, 빵도 안 먹고, 생선은 고사하고 염소 치즈만 먹지. 좀처럼 당신한테 맞는 식당은 어디에도 없어요. 그리고 내 요리도 별로 흥미가 없어. 우리 부모님은 당신이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것을 잃고 있다고 말씀하실 거예요."

"글쎄, 당신은 동물들의 적이야. 평생 얼마나 많은 동물을 당신이 죽였을 것 같아요?" 당신은 독으로 독과 싸운다.

"동물을 먹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예요. 숲에서 호랑이는 토끼를 먹죠. 사자는 사슴을 먹어요. 그게 자연이 돌아가는 방식이라고요." 그것은 내가 중학교 때 선생님이 말씀한 내용이다.

"하지만 당신네 중국인들은 아무거나, 심지어 멸종 위기의 동물도 먹잖아요. 내가 장담하는데 만일 중국 숲에서 공룡들이 어슬렁거린다면 누군가 공룡 고기는 어떤 맛일지 알아보고 싶어 할걸. 어떻게 당신네 사람들은 자연을 보호하겠다는 분별력이 없을까?"

"하지만 식물만 먹는다고 뭐가 그렇게 다른데? 모든 것에는 생명이 있는 법이에요. 당신이 그렇게 순수하다면, 왜 그냥 먹기를 관두지 않죠? 그럼 똥도 안 쌀 수 있을텐데?" (pp.205-206)

 

 

남자와 여자가 단순히 문화적 차이 때문에 싸우기만 할까. 아니다. 남자는 그런 남자라서, 여자는 그런 여자라서 싸운다. 그들은 문화에서 오는 불협화음을 이겨낼 수 없었듯, 자신들 고유의 성향에서 오는 불협화음도 이겨낼 수가 없다. 여자는 자신이 그에게 유일하기를 원한다. 남자는 여자가 나가서 친구들도 만나면서 자신의 생활을 갖기를 바란다. 이것은 자꾸 서로에게 불만이 된다. 남자는 여자가 세상을 더 경헙해봐야 한다며 여행하기를 권하고, 여행에서 돌아온 여자는 애인이 돌아왔는데도 친구들을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는 남자가 못마땅하다. 우린 오랜만에 만났으니 서로에게 충실히, 단둘만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사람의 성향은 쉽게 변하지 않고, 이런 자신만의 고유한 성향은 서로와 맞지 않음을 느낄때마다 자꾸 반복되게 튀어나온다. 나는 너만 있으면 돼. 너도 제발 나 말고 다른 사람들과도 어울려봐.

 

 

 

나는 이 세상의 그 누구가 아니라 바로 나다. 당신 역시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그 누구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다. 우리는 살다가 아주 운좋게 성향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비슷하다는 게 같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다. 비슷하다고 생각했다가도 사소한 문제들에서 어그러지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뒤돌아 서게 될 수도 있다. 달라도 마찬가지. 우리는 서로가 다름에 대해서 매력을 느껴 끌릴 수도 있다. 남자는 영어에 서툰 여자를 극장에서 만났고, 그녀와 걷고 대화하기를 즐기며 그녀에게 영어를 가르쳐준다. 여자도 영어 학원에서 선생님에게만 수업을 듣는 것보다는  남자와 함께 살면서 영어가 더 빨리 늘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은 흘렀고 남자는 '내가 언제나 당신이 묻는 단어의 뜻만 가르쳐주며 시간을 보낼수는 없는 법' 이라고 짜증을 낸다. 우리는 서로 달랐기 때문에 그걸 매력으로 느껴 상대에게 한 발 다가섰지만, 바로 같은 이유로 다시 두 발 뒤로 물러서게 된다. 우리가 비슷해도, 아주 많이 달라도, 우리가 다가서도 뒤로 가는건 사소한 걸로 시작되고 그 사소한 게 쌓여서 터져버리기 때문이다. 부딪치고 싸워가며 우리가 사소하게 다른 점들을 받아들이느냐, 그걸 받아들이는 것이 그다지 행복하게 느껴지질 않아 뒤를 돌아서느냐 하는건, 전적으로 당사자들에게, 그 관계에 달렸다.

 

 

 

거의 1년이 지나갔다. 처음에 우리는 서로에 대해 참으로 열정적이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오래되어, 먼지에 뒤덮여 있다. 매일 아침 당신은 신문을 사기 위해 길모퉁이 가게에 간다. 당신은 작은 카페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하며 신문을 읽는다. 당신은 집에서 긴장을 풀 수가 없기 땜누이라고 말하며, 차라리 어디든 밖에서 신문을 읽으려한다. 내가 이 집을 떠나 당신에게 공간을 되돌려주어야 하나? (p.333)

 

 

처음엔 이 공간보다 여자가 더 소중했다. 공간의 한 켠을 나누어 주고 싶고 함께 쓰고 싶을 만큼. 그러나 이제는 그녀보다 자신의 공간이 더 소중해진다.

 

 

나는 당신의 아름다움이 나로 인해 소멸되고 있음을 본다. 나날이. 밤마다. (p.356)

 

 

그토록 아름다웠던 당신이, 나로 인해 그 아름다움을 잃고 있다면, 그 때, 바로 그 때가 안녕을 고할 시간.

 

 

 

이 책속의 여자와 남자의 만남과 사랑이 다른 연인들의 것에 비해 특별하거나 한 게 아니다. 오히려 짐작할 수 있는 바로 그대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여자가 영어를 익혀갈수록 관계가 달라지는 것을 보는 게 흥미롭고, 영어가 능숙해진다고 해서 영국 남자와의 관계가 완벽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점은 인상깊다. 자라온 환경은 한 사람에게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치는걸까.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아주 다른 사람, 아주 다른 환경이 있다는 것을 내 눈으로 보고 경험한다고 해서 내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있을까. 우리가 변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게 아닐까. 우리 안의 근본적인 어떤 것은 달라질 수 없는 건 아닐까.

 

영어를 배웠기 때문에 여자는 지금과는 다른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면, 영국 남자와 사랑하고 헤어져봤기 때문에 아마 앞으로는 연인의 일기장을 읽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외국어를 익히는 것도 그리고 연애조차도,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는, 앞으로 한 발 더 나아가게 하는 하나하나의 수단일지도 모르겠다.

 

 

각 꼭지마다 영어 단어 하나씩들이 등장한다. 이 구성이 흥미로워 이 책이 인상깊다. 책장을 넘길때마다 나도 언젠가 이런 구성의 소설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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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4 0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04 1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3-11-04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름신을 부르는 다락방님^^ 말씀대로 구성이 재미나겠어요. 다락방님은 소설 쓰셔도 참 재밌게 이야기를 끌어갈 거 같아요. 땡쓰투유~

다락방 2013-11-04 17:08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소설을 써보고 싶은데 제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게 도무지 자신이 없어서 전 그냥 열심히 읽는것만 해야할 것 같아요. ㅠㅠ
그치만 이 책의 구성이 좋아서 자꾸 욕심이 생기네요. 흑흑.

[그장소] 2013-12-30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늘 부딪치는 현상이 여기 책속에 있군요..
다만 여자인 내가 책 속의 남자"와 같이 생각하고
남자인 친구가 책속의 여자"와 비슷하게 군다는걸 빼고..
아, 밑줄치고 동그라미 치고 별표까지 해줘도..
그는 나만 쳐다보고 책은 안중에도 없을..답답함..하핫핫

다락방 2013-12-31 08:59   좋아요 0 | URL
아하하하. '나만 쳐다보는' 게 나를 잘 사랑하는 방법은 아닌데 말이죠, 그걸 잘 모르는 것 같아요. 흐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