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타늄



펠리체 판티노에게




부엌에는 마리아가 생전 처음 보는 옷차림을 한, 키가 매우 큰 남자가 있었다. 그는 신문지로 만든 종이배를 머리에 쓰고,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하얀 장롱에 칠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얀 페인트가 어떻게 그리 작은 통 속에 담겨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리아는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 죽을 것만 같았다. 남자는 가끔 파이프를 장롱 위에 올려놓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다가 휘파람을 멈추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끔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따금 쓰레기통 쪽으로 가서 침을 뱉은 뒤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쉽게 말해 그는 너무나 이상하고 낯선 행동들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를 지켜보는 일은 정말 흥미로웠다. 장롱이 하얗게 칠해지자 그는 페인트 통과 바닥에 널려 있던 신문지들을 주워 모두 찬장 옆으로 가져갔다. 그러더니 찬장도 하얗게 칠하기 시작했다.

장롱이 너무나 윤이 나고 깨끗하고 하얘서 그걸 꼭 만져봐야 할 것 같았다. 마리아가 장롱에 다가가자 남자가 알아차리고 말했다. "만지지 마라, 만지면 안 된다." 마리아는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왜요?" 그 질문에 남자가 대답했다. "만질 필요가 없으니까." 마리아는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물었다. "왜 이렇게 하얀 거에요?" 무척 어려운 질문이라는 듯 남자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티타늄이니까."

마리아는 괴물이 등장하는 동화책을 읽을 때처럼 두려움으로 인한 전율이 기분 좋게 온몸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마리아는 주의 깊게 남자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남자의 손에 칼이 들려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변 어디에도 칼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어딘가에 숨기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제 뭘 자른다는 거예요?" (마리아는 티타늄의 이탈리아어 발음 '티나니오'를 '티 탈리오'(너를 잘라버리겠다)로 잘못 알아들었다.) 이 질문에 남자가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거였다. "네 혀를 잘라버리겠다."하지만 그저 이렇게만 말했다. "널 자른다는 게 아냐. 티타늄이라고."

결론적으로 그는 매우 힘이 센 남자가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인자하고 친절해 보였다. 마리아가 물었다. "아저씨 이름이 뭐예요?" 남자가 대답했다. "펠리체." 그는 입에서 파이프를 빼지 않았다. 그래서 말을 할 때면 파이프가 위 아래로 춤을 췄지만 떨어지지는 않았다. 마리아는 남자와 장롱을 번갈아 쳐다보며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의 대답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왜 이름이 펠리체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감히 그렇게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이들은 절대 이유를 물어봐서는 안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친구 알리체는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이름이 알리체(알리체는 여자 이름이지만, 작은 멸치인 '앤초비'라는 뜻도 있다. 알리체와 펠리체의 발음이 비슷해서 이렇게 생각한 것.) 였다. 이 남자 같은 어른의 이름이 펠리체라는 게 정말 이상했다. 하지만 차츰차츰 이 남자를 펠리체라고 부르는 게 자연스러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펠리체가 아닌 다른 그 어떤 이름으로도 부를 수 없을 것 같기도 했다.

칠을 한 장롱이 너무 하얘서 부엌에 있는 다른 물건들이 누렇고 더럽게 보일 정도였다. 마리아는 장롱 옆에 가까이 가봐서 안 될 것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만지지 않고 그저 보기만 할 것이다. 하지만 마리아가 발끝으로 살금살금 장롱으로 다가가고 있을 때, 예기치 못한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졌다. 남자가 갑자기 돌아보더니, 마리아와 두어 발자국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다가왔다. 주머니에서 하얀 백묵을 꺼내더니 마리아가 서 있는 바닥에 둥근 원을 그렸다. 그리고 말했다.

"이 원 밖으로 나오면 안 된다." 그러더니 성냥을 켜서 입술을 이상하게 비틀며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다시 찬장을 칠하기 시작했다.

마리아는 쪼그리고 앉아서 오랫동안 둥근 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원에 출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한 지점을 문질러 보았다. 그리고 실제로 백묵 자국이 지워지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남자가 이 방법이 유효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원은 분명 마법의 힘이 있었다. 마리아는 가만히 아무 말 없이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가끔씩 발을 뻗어 발끝으로 원을 건드려 보았고 거의 균형을 잃을 정도로 몸을 앞으로 내밀어 보았다. 하지만 손가락이 장롱이나 벽에 닿으려면 아직도 한 뼘 이상이 부족하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찬장이, 의자들과 식탁이 점점 더 아름다워지고 하얘지는 모습을, 가만히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참 뒤에야 남자는 붓과 작은 통을 내려놓고 머리에서 신문지 종이배를 벗었다. 모자를 벗자 다른 남자들과 똑같은 머리가 드러났다. 잠시 후 남자는 발코니로 나갔다. 마리아는 그가 뭔가를 뒤적이는 소리를 들었고 옆방에서 왔다 갔다 하는 소리를 들었다. 마리아가 그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저씨!" 처음에는 조그맣게 그러다가 점점  크게 하지만 지나치게 크게 부르지는 않았다. 사실은 혹시 남자가 그 소리를 들을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가 부엌으로 돌아왔다. 마리아가 물었다. "아저씨 이제 나가도 돼요?" 남자는 마리아와 둥근 원을 내려다보더니 큰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여러 가지 말들을 했다. 하지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 물론이지. 이제 나와도 돼." 마리아는 당황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러자 남자가 걸레를 집어 마법을 풀기 위해 원을 깨끗이 지워주었다. 원이 사라지자 마리아는 일어서서 깡총깡총 뛰어 밖으로 나갔다. 마리아는 아주 행복했고 기분이 좋았다. (pp.240-244)





















이 책을 통틀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 티타늄 편의 전문이다. 어젯밤 잠들기 전, 이 티타늄편이 생각났고 나는 내일 출근길에 읽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책장에서 꺼내어 침대 옆에 두었다. 출근준비를 하고 나가기 전, 이 책을 가방에 챙겨 넣었고, 티타늄편을 보기 위해 책을 펼치려다가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어, 이건 뭐지? 포스트잇은 수소 편에 붙어 있었다. 나는 내친김에 수소편을 읽었다. 좋았다. 그리고 티타늄편. 짧은 이야기이고 지하철 안에서 다 읽을 수 있는 이야기였는데, 마음은 놀랄 정도로 따뜻해졌다. 새삼 소중한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에게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나는 그들이 읽기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어서 빨리 이 이야기를 읽고 그들도 나처럼 웃게 되면 좋을텐데! 여동생에게는 매일매일 조금씩 문자로 찍어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래, 수고하자, 손으로 전문을 치자, 생각했다. 그리고 알라딘에 올리자. 그러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 아름다운 글을 읽고 기분 좋아질 수 있다. 그리고 링크를 여동생에게 줘야지.




다 읽고 지하철에서 내려 회사로 가는 출근길, 늘 놀이터에서 운동하는 아저씨는 오늘도 한결같이 거기 계셨고, 요쿠르트 배달하는 아주머니도 마찬가지로 거기 계셨다. 어제는 두 손녀와 함께 아침 산책을 하던 할머니가 오늘은 나오질 않으셨네. 매번 큰 길로 가다가 며칠전부터 골목으로 찔러가는데, 골목길을 싫어하는 나지만, 그 아침의 풍경이 좋아 그 뒤로 자꾸만 골목으로 간다. 오늘은 저 쪽에서 마주 걸어오던 여자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아이쿠. 웃으면 안되는데, 나는 이 모든 풍경들이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프리모 레비 덕이고, 티타늄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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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3-06-27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에서 이 부분이 가장 좋았었어요!

다락방 2013-06-27 15:32   좋아요 0 | URL
수소도 좋아요! 물론 티타늄이 으뜸이지만요. 다시 읽어도 기분 좋아요. 헤헷.

알케 2013-06-27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아시겠지만 프리모 레비 할배 책의 좋은 짝지는 샘 킨의 <사라진 스푼>이죠.
<주기율표>가 전기라면 <사라진 스푼>은 열전 ...
아포리즘으로 가득 찬 잠언집 대 살짝 드라이한 엔트리급 대중 과학서.

병독하면 시너지가..

다락방 2013-06-27 15:32   좋아요 0 | URL
아뇨, 알케님. 저 사라진 스푼 몰랐어요. 지금 이 댓글 읽고 검색했다가 보관함에 넣어두었습니다. 그런데 병독하면 시너지..란 말씀이시죠? 오케바리. 접수요!

Forgettable. 2013-06-27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간 사랑에 빠진 삘이 ㅋㅋ

다락방 2013-06-27 15:32   좋아요 0 | URL
네? (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프레이야 2013-06-28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저도 티타늄과 수소 편을 찾아서 볼래요. 다락방님 눈에 걸린 정겨운 아침풍경을 따라 저도 씽긋~~^^

다락방 2013-06-28 09:14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읽어보세요. 정말 좋아요. 주기율표를 처음부터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흐흣 :)

레와 2013-06-28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쁘다. ♡


나에게 티탸늄이란 값비싼 카메라 바디의 소재, 등산 스틱의 소재,
단단하고 무거워 보이는 그 무엇이 티타늄이란 이름을 달고 있으면 놀랍도록 가볍지만 고가의 그 무엇이였는데..
이토록 예쁜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니... ㅎㅎㅎ

이 책이 그렇게 좋단 말이죠!? 앙?! ㅋㅋㅋ


다락방 2013-06-28 13:45   좋아요 0 | URL
응 그렇지만 빨리 읽히지는 않는 책이에요. 천천히 읽어야 되는 책이죠. 어제 여동생도 이거 읽고 정말 좋다고 너무 예쁘다고 그랬어요. 그렇지만 남동생은..........하아- 나오지 말라고 원 그린게 뭐 그리 대수냐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래서 내가 다시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정말 예쁘고 사랑스럽지 않냐고 되물었더니 "그렇게 받아들여야 되냐?" 라고 묻더군요. 그래서 응, 이라고 했더니 "그럼 이젠 그렇게 받아들여보지 뭐." 라고 ..............................or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