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이라 나이틀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는 내가 생각하는 안나 카레니나와는 아주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싶다고 생각하진 않았었는데, 그래도 또 궁금하긴해서 친구랑 극장을 찾았다. 영화소개프로그램에서 이미 장면과 장면에서 넘어가는 장면이 극적이라고 했던걸 들었지만 내가 그런 장치들을 좋아할 수 있을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직접 보는것과 짐작하는 것은 달랐다. 나는 처음 이 영화를 보는 순간부터 매혹당했다. '조 라이트'의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의 그것보다 못하다라는 식으로 말할 수 없는 영화였다. 그보다는 톨스토이의 안나와는 '다르다'고 해야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영화로 만들어지면 원작을 제대로 살려내기 힘들지, 더군다가 그게 안나 카레니나 같은 대작이라면, 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과도 다르다.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여져셔는 안될것 같다고 해야할까. 어쨌든 '조 라이트'의 안나 카레니나는 감각적이다. 또한 매력적이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축약하여 어떻게 잘 담을것이냐, 하는 것을 극중 인물들의 심리에 꽉꽉 눌러담은 듯하고, 그리고 그 심리가 보여지는건 초반에서 특히 잘 드러나며 사람을 끌어당긴다. 레빈은 키티를, 키티는 브론스키를, 브론스키는 안나를 향하는 그 마음과, 브론스키를 사이에 두고 그와 춤추는 안나를 질투하는 키티, 그런 키티와 브론스키 사이에서 어쩌지를 못하고 즐기고 싶으며 그러나 도망치고 싶은 안나. 그 셋이 무도회에서 춤추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다.
키티는 자신에게 청혼한 레빈을 거절한다. 그녀의 마음은 잘생긴 군인, 브론스키에게 향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무도회에 안나가 등장하고 브론스키의 시선이 내내 안나에게 가있다는 걸 안 순간 키티는 가까스로 눈물을 참는다. 그전에 키티의 언니는 안나에게 말한적이 있다. 키티는 당신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것 같다고. 누구나 시기와 질투심이 생길 수 있다. 대체적으로 그건 '내가 갖고 싶은'것을 가진 상대에 대해 나타날 때가 많다. 예쁜 여자를, '그' 남자의 시선을 받는 여자를, 젊은 여자를, 우리는 모두 각자의 시선에서 부러워하고 시샘한다. 키티는 안나가 가진 매력이 부러웠고, 안나는 브론스키와 함께 살게된 뒤로 브론스키가 만나는 열여덟 어린 여자에 대해 질투를 느낀다. 나는 며칠전에 읽은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가 생각났다.
여인이 자신의 나이를 더 이상 봄으로 헤아리지 않고 겨울로 헤아리기 시작하는 때가 되면, 공연히 마음이 상한다. 마음속에 세월을 향한 말없는 원한이 생긴다. 그러면 활짝 피어나는 아름다운 젊음이, 다른 이들에게는 향기롭지만, 그러한 여인에게는 가시처럼 보이고, 모든 장미꽃 냄새가 따갑게 느껴진다. 그 모든 싱싱함이 자기에게서 빼앗아 간 것처럼 보이고, 자기의 아름다움이 줄어드는 것은 다른 여인들의 아름다움이 증가하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상권, p.374)
영화로 만나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나는 레빈에게 반했는데, 그는 충분히 인간적인 매력을 가진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의 손톱이 인상깊었다. 그가 자신의 아이를 아내로부터 건네받아 안는 장면에서 그의 손톱이 보였는데, 그 손톱은 지저분하고 때가 끼어있었던 것. 그는 직접 농사를 짓는 사람이다. 일하는 사람들은 주인이 직접 농사를 지을 필요는 없다, 우리를 부리기만 하면 된다, 고 말하지만 레빈은 일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며 그들과 함께 섞여서 일한다. 레빈의 손톱은 직접 일하는 사람의 손톱임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 손톱을 보면서 이 영화가 더 좋아졌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친구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랑'을 삶의 전부로 두어서는 안된다고. 안나는 남편과 이혼하고 아이와도 헤어지고 사교계에서도 매장당한다. 그녀가 사랑하는 브론스키를 선택했기 때문에. 그러니 그녀를 살게하는 이유는 이제 오로지 브론스키와의 사랑이다. 브론스키의 사랑을 잃으면 그녀는 끝장이다. 브론스키의 말투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가 더 신경쓰이는 이유다. 그래서 내 인생을 걸만한 것이 단 하나여서는 안된다. 사랑은 나를 지탱하게 하고 살아가게 하는 여러가지들중 하나 여야 한다. 전부여서는 안된다. 사랑뿐이 아니라 그게 무엇이든, 내 모든걸 거는게 단 하나여서는 안된다. 위험하다. 그것은 대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너는 나의 전부야, 라는 식의 태도는 그 사람을 잃었을 때 나를 무너지게 만든다. 영화 『어바웃 어 보이』에서도 말했듯이 우리에겐 여분의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 소중한 한 사람과의 인연의 실이 끊어져도 잠깐 휘청거릴 뿐 다시 제자리에 꼿꼿하게 서있게 해줄 여분의 사람이.
날씨가 무척 좋은 일요일인데, 나는 택시를 타고 병원엘 다녀왔다. 택시기사님은 날이 이렇게 좋으니 산이라도 가야하는데 일이나 하고 있으니 이게 뭡니까, 라고 하셨고 나는 거기에 대꾸했다. 저는 병원가잖아요, 라고. 기사님은 그러게요, 하면서 웃으셨다.
어제는 친구와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2차로 맥주를 마시러 가자며 삼겹살집을 나왔는데 비가 오고 몹시 추운거다. 이렇게 추운데 맥주를 마실 자신이 없어졌다. 속이 차질걸 생각하니 너무 끔찍해. 우리는 카페로 가서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우산도 없던터라 친구는 그냥 비를 맞고, 나는 목에 둘렀던 스카프를 머리에 둘렀다. 친구는 좀 떨어져서 걸으라고 챙피하다고 했다.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들어간 카페는 따뜻했고 안락했다. 친구는 커피를, 나는 녹차라떼를 시켜두고 마시며 이제 좀 살것 같다고 했다. 우리는 캬라멜시럽이 잔뜩 뿌려진 커다란 식빵 덩어리를 가운데에 두고 뜯어 먹으며 이야기했다. 그러다 동시에 카페에서 나오는 노래가 좋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검색해보니 '브루노 마스'의 'Natalie'였다. 어, 이거 우리 엠피삼에 들어있는 노래잖아?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노래를 반복해 들었다. 그러다 가사를 찾아보았는데, 오, 그녀는 그의 all my money 를 가지고 도망갔단다!!!
마지막으로 어제 가장 놀라웠던 일. 바로 브론스키의 나이였다. 트와일라잇의 재스퍼를 닮았다고 생각하며 검색해본 이 영화의 브론스키는 무려 1990년 생이었다.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