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자평] 놓치고 싶지 않은 이별
"넌 정말이지 낭비가 심해, 아론." 페기가 내게 말했다.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았다.
"내가 뭐라고?"
"다른 사람은 누가 가까이 다가오면 반가워할 거야. 너는 그 여자의 속셈을 알아보느라 분주하지."
내가 말했다. "어떤 여자의 속셈을 말하는 거야?"
"넌 그것조차 보지 못해. 알아차리지도 못한다고. 넌 그 여자가 낭비되도록 내버려 두지."
"누가 낭비되게 내버려 둔다는 거냐고? 지금 루이스 얘기를 하는 거야?" 내가 물었다. (pp.264-265)
이 부분을 읽는데 아, 하는 소리가 절로 났다. 그러니까 나도 이렇게 말했어야 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나도 그에게 '니가 나를 낭비되도록 내버려 두고 있다'고 말했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물론 그렇지 않겠지만, 낭비되도록 내버려 둔다는 것이 아주 참신한 표현으로 생각되는거다. 그러니까, 음, 뭐라고 해야하나, 이건 페기가 말한것처럼 '보지 못하'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보다 더 강한(?) 표현이 아닌가 말이다. 알아채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생생하지 않은가 말이다. 알아채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속상함 그리고 원망까지, '낭비되도록 내버려 두지' 에 다 들어가있지 않은가! 혹여 어떤날 한 사내가 내 마음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나 역시 이렇게 한 번쯤 말해봐야겠다.
넌 지금 날 낭비되도록 내버려 두고 있어!
이걸 깨닫는 건 물론 그 사내의 몫이겠지만.
남자의 아내가 죽었다. 집 옆에 있던 큰 나무가 집으로 쓰러져서 응접실에 있던 아내가 죽었다. 집도 망가졌다. 남자는 아내를 잃은 상실에 대한 슬픔과 외로움을 견뎌내야 하고 그렇게 일상을 살아내야 한다. 집을 수리하는 동안 누나네 집에 머무르던 남자는, 차마 자신의 집이 공사중인 동안 들러볼 엄두도 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집이 다 수리가 되었다고 한 순간, 그래서 남자가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던 순간, 나는 이제 그 남자의 평범한 일상으로의 복귀를 느꼈다. 물론, 그 일상은 아내를 잃기 전의 일상과 모습은 같되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을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슬픔이 담요 같은 것으로 덮여버린 것 같아. 여전히 거기 있지만 가장 아픈 구석은 ‥‥‥말하자면 덮인 거지. 그러다가 이따금 담요 귀퉁이를 들어서 살펴보면 ‥‥‥와아! 칼로 찔린 것 같지! 그게 변할 것 같지 않아."(p.189)
위의 문장들이 너무 절절해서 나는 남자가 말하는 이 기분 그대로를 느낄 수 있을것만 같았다. 슬픔이 하나의 형체가 되어 덮어놓은 담요 부분이 불룩 튀어 나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담요를 들추어 들여다보는 순간 푹- 하고 찔리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그대로 전해지는거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것, 거기에서 오는 슬픔은 그러니까 그래, 이런 것이겠구나.
앤 타일러가 놓치지 않은 것은 남자의 상실과 슬픔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그 남자의 주변을 살아가는 사람,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일상까지도 신경써준다. 그래서 남자의 누나는 남자에게 혹여라도 자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안타까움으로 동생을 지켜보는데, 그러면서 남자의 집 수리공과 사랑에 빠진거다! 와- 나는 이 부분이 대단히 유쾌해서 지하철 안에서 책을 읽다가 웃어버리고 말았다. 동생에 대한 걱정만 가득했던 여자가, 이 철통 같은 여자가 사랑에 빠지다니. 아주 많이 마음에 드는거다. 미처 이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던 남자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래, 수리공은 누나의 집에 처음 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옷도 차려입었고, 언젠가부터 화장품 냄새를 풍기기도 했다. 그래, 누나가 그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던 것은 그 수리공을 선택한 남자를 못믿어서가 아니라 그 수리공에 대한 관심이었던 거다. 누나가 다시, 과일 쥬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래, 수리공은 금주 ..를 한다고 했지!
앤 타일러는 일상에 대한 섬세함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아마추어 메리지』에서도, 『인생』에서도 그랬다. 앤 타일러는 웅장한 이야기들을 하지 않았고, 일상적인 얘기를 하는 대신 그 이야기를 아주 섬세하게 보여줬다. 이 책, 『놓치고 싶지 않은 이별』도 가슴을 쥐고 흔드는 감동을 주는건 아니지만, 잔잔한 여운을 남겨준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책장을 덮고 앤 타일러를 검색해서 내가 아직 읽지 않은 그녀의 책을 장바구니에 넣어뒀다. 요란한 이야기 대신, 격렬한 흐느낌 대신, 조용한 움직임을 느끼고 싶다면 그때 나는 다시 앤 타일러의 책을 선택해야겠다.
요 며칠간 업무상으로 지식경제부 와 통화할 일이 있었다. 모두 두 명과 통화를 했는데 한 명은 여직원이었고 한 명은 남직원이었다. 둘 모두 전화 통화하는데 무척 예의가 발라서 나는 끊임없이 자료를 보완해줘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물론 자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긴 했지만. 그리고 오늘은 그 모든 과정들이 마쳐져셔 여직원에게 '제가 서툴러서 고생 많이 하셨죠' 라고 물으니 그 여직원은 내게 '아뇨, 자료 준비를 깔끔하게 해주셔서 저도 편했습니다' 라고 하는거다. 아, 이 여직원도 멋진데 남직원은 대박이다. 전략물자연구원에 소속된 남직원은 아 완전 진짜 짱멋져. 목소리도 짱멋진데 흑흑 말투가 진짜 완전 대박. 어떻게 설명해야하지. 음, 그러니까, 첫 통화를 끝내자마자 '전략물자연구원은 국방부 소속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던거다. 예의 바르고 정중하고..아, 이게 다가 아닌데. 정말이지 내가 가진 이성의 끈을 아주 조금만이라도 놓았다면, 혹시 저랑 따로 만나보지 않으실래요, 라고 말걸뻔 했다니까. 이제 더이상 통화할 일이 없다는 게 애석하고 또 애석할 뿐이다. 하아- 너무 오랜만이야, 이토록 정중하고 예의바른 남자는. 흑흑. 나는 그의 이름을 안다. 훗. 뭐, 이름을 안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겠지만. 남직원과 통화를 끝내고 수화기를 놓자마자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아, 이 남자 너무좋아 너무좋아, 라고 말해버리고 말았다. 앞에 앉은 동료직원이 웃었다.
내가 지금 그를 낭비되도록 두고 있는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