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무덤의 남자
카타리나 마세티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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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미소를 묘사하기 위해선 대중가요의 환상적인 노랫말 속에 빠져들어야 한다. 그 속에는 따사로운 햇볕과 산딸기, 새의 지저귐, 그리고 산 위 호수에 비친 그림자가 모두 들어 있었다. 산림조합원 남자는 서툴게 포장한 생일 선물을 내미는 아이처럼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내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내 입꼬리는 여전히 귓가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 사이로 무지개 같은 환한 빛이 솟아올랐다. (p.24)

 

사랑에 빠지는 순간 상대의 미소에 온갖 찬사를 늘어놓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상대도 나에게 똑같은 감정을 갖게 될지는 확신할 수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것은 기적이라는 말이 있을정도로 사실, 쉽지는 않은 일이니까. 그런데 남자의 미소를 저렇게 생각한 여자도 남자에게 같은 느낌을 줬다.

 

마치 방학을 맞은 여자아이, 혹은 처음으로 산 자전거를 보며 즐거워하는 꼬마 같았다. 그리고 옆 무덤 앞에서 분홍색 물뿌리개를 가지고 노는 어린 소녀처럼 완벽하게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p.30)

 

그 둘이 사랑에 빠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들은 상대에게 속절없이 빠져들었고 또한 상대에게 완벽한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 여자는 죽은 전(前) 남편에게서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오르가슴을 느꼈고 그를 생각하거나 볼 때마다 자신 안에서의 난자의 요동침을 느꼈다.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그녀와 언제나 꼭 붙어 있고 싶었고 단 1분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 둘은 그 전에는 한 번도 이런 사랑을 경험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강렬한 사랑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라캉을 몰랐고 여자는 소 젖짜는 법을 몰랐다. 여자의 집에 있는 거라곤 책 뿐이었고 남자의 집에는 책이라곤 없었다. 남자는 자신의 긴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여자가 미트볼을 요리해 차려두고 자신을 기다리길 원했고, 여자는 미트볼을 만들 줄 몰랐다.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가기 위해서는 일을 마친 뒤에 시내로 나가야했고 여자가 남자의 집에 가기 위해서는 하루에 한 번 있는 버스를 타야만 했다.

 

난 그녀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녀를 묶어두고 싶었다. 그녀가 가끔씩만 날 원하는 것 같아 그녀에게 아무런 요구도 할 수 없었고, 그런 사실은 내게 엄청난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때로는 그녀에게도 집안일에 동참해줄 것을 요구할 수 있지 않은가. (pp.134-135)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 함께 지내고 싶고 함께 살고 싶은 것은 당연한 욕구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두 사람이 함께 사는것은 생각처럼 낭만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많은 취향을 존중하며 가끔은 양보하며 살아가는 것은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식이지만, 그렇다한들 서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가치에 대해서는 일치하는 쪽이 좋다. 그러니까 한 방향을 바라보는 것은 기본 전제로 깔고 가야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결말은 남자가 자신의 농장과 수십마리의 소들을 버리고 그녀와 함께 살기 위해 도시로 나가기로 선택하는 거였고, 마찬가지로 여자가 자신의 열정을 바쳐서 승진하기도 하는 직장을 때려치고 시골로 옮겨서 미트볼을 만드는 거였다. 나는 당신과 함께 살기 위해 그동안 내가 이루었던 것과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모두 버리겠어, 라고 말하는 것. 그게 가장 끔찍한 결말이었다. 사랑은, 내가 생각하는 유일하게 가치있는 것은 아니니까. 사랑을 위해서 어느 한 쪽을 희생하는 것은 희생을 한 쪽도 그리고 그 희생을 받아들이는 쪽에도 결코 좋을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 희생에 대한 불편함을 가슴 어느 한 구석에 안고 갈 테니까. 만약 이 책에서 어느 한 쪽이 기꺼이 자신의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상대방의 방식에 맞추기로 했다면, 그것은 낭만적인 로맨스는 될 수 있었겠지만 현실과는 좀 동떨어지게 되는건 아닐까.

 

 

여자와 남자 모두 상대를 뜨겁게 사랑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상대가 될 것이다. 그래서 상대가 내 쪽으로 와주기를 바랐다. 여자가 도시와 직장을 포기하기를, 남자가 시골과 농장을 포기하기를. 그러나 서로 자신의 삶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상대에게 포기를 바란다는 것은 얼마나 이기적인가. 남자도 자신이 살고자 하는 방향으로 살기로 결심하고 여자 역시 자신의 삶을 바꿀 생각은 없다. 사랑은 사랑이고 삶은 삶이니까. 그 둘이 일치한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때는 우리는 어느 한 쪽을 반드시 선택해야 하니까.

 

 

나는 그녀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언제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는 기분이었다. (p.157)

 

 

크리스마스 선물을 매일 받고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는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의 삶을 평온하게 지켜내기 위해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가슴속에만 품고 살아가야 하는 지도 모르겠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 반드시 가장 행복하게 사는 법은 아니니까. 행복은 저마다에게 다른 형태로 존재하니까.

 

 

책장을 넘기면서는 이 책이 전혀 특별하지 않았는데, 책장을 덮고나서는 가슴이 싸해진다. 기대 이상의 여운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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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2-06-17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께 살게 되면 미워하게 될지도 몰라요. 라고 생각하는 비관주의자 일인. ㅠ_ㅠ

다락방 2012-06-18 11:18   좋아요 0 | URL
저도 어떤 부분에서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해요, 문나잇님.

글샘 2012-06-17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요한 건 뜨겁게 사랑하는 거죠. 함께 사는 게 아니라...

다락방 2012-06-18 11:19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글샘님. 꼭 함께 사는건 아니어도 좋은 사람, 그런 관계라는게 있으니까 말이죠.

... 2012-06-17 2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영화로도 나왔다던데요 ==> http://www.imdb.com/title/tt0298351/
살까말까 하다가 패쓰한 책인데...

다락방 2012-06-18 11:19   좋아요 1 | URL
지금 링크 따라가보니 2002년도에 만들어졌네요?!!!!!

2012-06-18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8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2-06-18 1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라캉과 소젖짜기는 도저히 양립할수가 없을 것 같네요, 풋. 더 뭐라 끄적거리기가 어렵네요. 아쉬운 일이네요.

다락방 2012-06-19 09:37   좋아요 1 | URL
미트볼 먹고 싶었어요. ㅜㅜ

무해한모리군 2012-06-20 0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선물 같은 사랑을 해본 사람과 해 본적이 없는 사람은 분명 다르겠지요?

다락방 2012-06-20 13:23   좋아요 0 | URL
네, 아마도 다르겠지요. 그리고 선물 같은 사랑은 자주 오지도 않는 것 같아요. 한 사람에게 한 번씩만 오는거 아닐까요? 음...너무 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