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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하는 혀
앤드루 윌슨 지음, 나중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뒤에 책장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나는 대체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려는지 초조하기만 했다. 몇 장 남지 않았는데 이정도로 끝마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 것 같았다. 노(老)작가는 비서의 잘못을 알아야 했고, 비서는 작가에게 나는 너의 전기를 출판하겠다고 말해서 작가의 분노를 건드려야 했으며, 또한 이야기의 끝에 비서는 응징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을 대체 어떻게 끝맺으려고 책장은 이토록 조금 남은걸까. 그러다가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 감탄했다. 오, 이 방법이 있었구나! 이럴 수도 있는거였구나.
나는 가끔 자신의 잘못을 작게 포장하고 거기에 따른 상대의 처벌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내 작은 실수에 상대가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반응하더라고, 너무하지 않아? 그러나 그런 사람들일수록 다른 사람의 잘못에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책 속의 남자가 그랬다.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서는 그것이 잘못인지도 인식하지 못하는채로, 노작가의 진실에 다가갈수록 그를 역겹고 끔찍하다고 생각한다. 내 잘못이 사소하고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심한거라는 건, 철저하게 자기 기준이다. 그러나 나는 책속의 남자는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한 상황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들여다보기를 꺼려했던 것이라 생각됐다.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이라고. 그는 '대체 내가 잘못한게 뭐야' 라고 수시로 생각했지만, 막상 자신의 잘못이 세상에 드러나게 될지도 모르는 현실 앞에서는 무너지고 마니까. 잘못을 저지르는 것도, 그 잘못을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것도, 비난을 하는것도, 비난을 듣는것도, 비난을 듣는 것에서 귀를 돌려버리는 것도, 보고 싶지 않은것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는 것도 그 모두다 자기 자신이 하는 일이다, 모두 내가 하는 일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영화처럼 그려지는 이야기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좀 더 '책 같은' 혹은 '문학적인' 작품을 좋아한다. 『다빈치 코드』를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재미있게 읽었으면서도 그 작품들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내 기준에서는 책 보다는 영화에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책, 『거짓말하는 혀』도 영화에 가깝다. 순간순간 박진감이 넘치고 흥미롭다. 머릿속에 이탈리아의 골목과 영국의 시골이 떠오르고, 손에 무기를 쥐는 남자의 긴장도 고스란히 그려진다. 그러나 마지막 장, 그것만큼은 책에 가깝다. 책에서 최대치를 줬다. 만약 이 책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분명 아주 재미있는 영화가 나올것이다. 마지막장면도 관객들에게 실망을 주지는 않을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마지막 장면 만큼은 책장을 넘겨오다가 글자로 만나는 것이 훨씬 더 좋을것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 장면을 출퇴근하는 버스나 지하철안에서 만나지는 않는 쪽이 좋겠다. 내릴 역을 지나칠지도 모른다,
라고 쓰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엄청난 기대감에 이 책을 집어 들었다가 실망할까봐 쓰지 않는 쪽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 뜻대로 세상을 사는 건 참 쉽지 않은 일이다.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이 세상에 별로 없다. 이 책속의 남자가 꿈꾸는 미래는 완벽했지만, 그건 단지 그가 꾸는 꿈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