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영화, 『움』의 40자평을 쓰게 된다면, 나는 이렇게 쓰려고 했었다.
[운명을 거슬러 다시 태어나도 운명이 아닌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
물론 나는 80byte 에 맞춰 수정했겠지만(그러니까 저게 몇 byte 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저런 40자평을 쓰려했고, 이 영화에 대해서 어떤 느낌도 공감도 불가능했던 나로서는 '판단불가'라는 의미의 별 셋을 주려고 했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라딘에서 검색이 되질 않았다.
이 영화는 불편하다. 여자주인공이 '에바 그린'인것 말고는 이 영화의 어떤것도 내게 익숙하거나 친근감있게 다가오질 않는다. 이 영화는 공상과학 장르가 아닌데 '복제인간' 이야기를 하고있다. 그러니까 줄거리는 이렇다. 여자는 어릴적에 찾아갔던 할아버지 집에서 이웃인 소년을 알게된다. 둘은 친하게 지냈다. 여자는 성인이 되어 그 바닷가로 다시 돌아가 그 소년을 찾는다. 소년을 다시 만난 여자는 다시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 사랑이 채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거나 결말을 맺기도 전에 남자는 사고를 당해 죽게된다. 여자는 이 슬픔을 감당할 수 없어서 남자의 부모들로부터 간신히 허락을 얻어내 유전자 복제에 성공, 자신의 자궁에 그 복제된 아이를 잉태하고 낳고 키운다. 아이의 엄마가 된 여자는 아이의 성장과정을 당연히 옆에서 함께 하게되는데, 아이는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의 그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자란다.
이 영화에서 판단 불가한 것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일단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그 사람과 같은 복제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옳은가, 하는 문제. 영화에서도 여자는 그걸 원하지만 죽은 남자의 부모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살고 가야 할 운명이 있고 그것을 거슬러서는 안된다' 라는 말을 한다. 아마도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 생각과 비슷한게 아닐까. 나는 사랑이 지나치면 '하지 말아야 될' 것들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것은 '옳다'고 말하게 되는 부분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자꾸만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들이 죽었다고 하면, 나는 그들의 복제인간을 만들고 싶을까? 그 아이를 내 뱃속에 키우고 싶을까? 결국 나는 그들의 '엄마'가 되고 싶은가? 아니, 나는 자꾸만 '아니'라는 답을 한다.
또 판단이 불가한 것은 '복제'한 인간을 세상에 내보내게 된 여자는 과연 '엄마'인가 하는것이다. 여자의 난자와 한 남자의 정자가 결합해 태어난 아이가 아니다. 복제하기 위해 유전자를 가져와 자궁에 넣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났다. 여자는 이 아이의 엄마인가, 아닌가. '난자'가 들어가지 않았으니 엄마가 아닌가, '자궁'에 품고 있다가 낳았으니 엄마인가. 만약 엄마가 아니라면 그 아이는 낯선 '타인'인가, 엄마 라면 그 아이는 내 '친자식'인가.
영화는 아이가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어가면서 점점 더 불편해진다. 여자의 소원은 '사랑하는' 남자를 되살리는 것이었고,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에게 여자는 단순히 '엄마'일 뿐이다. 그런 엄마가 아이가 아이었을 때도, 소년이 되어갈 때도, 그리고 청년이 되었을 때도, '여자로서' 자신을 본다. 여자가 '자식으로' 그를 대하지 않는 몇몇 장면들에서 나는 불편해질 수 밖에 없고 결국에는 '그러지만 마' 라는 간절함을 담게 된다. 그리고 영화는 '너의 바람 따위 가당치도 않아' 라며 나의 바람을 무시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내내 불편하다. 불편한데 어떤 판단도 불가하다. 내가 이 영화속에서 공감할 인물은 없고 또한 어떤것이 '옳다'고 말할 수도 없다. 누구의 편을 들어야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머릿속에 멍해져서 아, 나는 무엇을 느껴야 하나, 당황하고 말았다. 나는 이 영화를 그 누구에게도 추천할 수가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어떠했는지 이야기해줬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의 감상이 몹시도 궁금하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듣고 싶다. 이 영화를 보고 다른 사람들은 어떤걸 느꼈는지 어떤 생각을 하게 됐는지를 읽을 수 있거나 듣게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나면 조금쯤은 생각이 정리되지 않을까.
어지러워.
지금 시각 새벽 두시 일십이분. 나는 저녁때 순대국에 소주를 마셨고, 좀 전까지는 오리와 전, 계란프라이와 잡채 김치와 김, 귤 등등을 안주 삼아 와인을 마셨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취했다는 거다.
나는 원작이 있는 영화에 대해서는 책을 먼저 읽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물론 그것이 늘 지켜지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그러려고 한다. 밀레니엄은 그래서 역시나, 책으로 먼저 읽었다. 그리고 영화를 봤다. 책을 읽을 때는 남자주인공 '미카엘'이 정말 정나미가 떨어졌다. '무심하게' 여자를 상처주는 거지같은 자식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영화속의 미카엘이 '다니엘 크레이그' 라는걸 알게 된 순간 갑자기 미카엘이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았나....하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젠장. 나는 속물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나는 이 영화가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너무 길다. 너무 지루하다. 그런데 묘하게도 책의 그 많은 내용을 아주 싹둑싹둑 잘라먹었다. 내 눈에 잘려나가는 그 많은 장면들이 느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하다고 느껴지다니. 오오, 이것은 무슨 조화인가.
지난주였나. 알라딘 서재 에*님이 이 영화를 보고, 데이빗 핀처 감독은 호주를 무시하냐는 평을 남기셨더랬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서 대체 어떻게 무시하나 보자 싶었는데, 오오오오, 정말 무시했더라. 나는 이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서 에*님의 그 페이퍼가 생각나서 한참을 웃었다. 어서빨리 댓글을 달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맞아요, 완전 무시했더라구요! 그러나 이 '무시'에 대한건 원작을 읽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원작을 읽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공유할 수 있는 사소한 그러나 무시하지 못할 사안이다. 후훗. 뿌듯하다.
책에서도 영화에서도 '리스베트'는 찬란하다. 범죄나 폭력에 노출되는 여자들은 많다. 대부분은 울고 체념한다. 나 역시 폭력에 노출되었으나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여자사람의 입장으로서, 내가 바라는 모든것을 영화속의 리스베트가 보여준다는 데에 한치의 이의도 없다. 나에게 폭력을 가한 상대를 응징하는 리스베트, 또한 다른 여자들에게 같은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미리 조치를 취하는 리스베트, 그녀는 모든 여자들의 대변인이요, 심판자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들에게 반드시 리스베트 같은 심판자가 나타나 그들의 죄를 벌하여주기를 바란다.
요즘에는 백팩을 메고 다닌다. 이것은 숄더백보다 편하다. 책 두세권을 넣어도 어깨에 메는 순간 그 무게가 그다지 힘들게 느껴지질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문제가 된다. 다섯권을 넣고 다니게 되기도 하는거다. 제기랄. 나는 나의 짐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회사로 책을 주문해 가방에 넣고 어깨에 힘을 주고 집에다 나른다. 중고샵에 팔 책을 다시 가방에 넣고 회사로 나른다. 웬디양님은 언젠가의 페이퍼에서 '나는 나의 시녀' 라고 말했던 적이 있는데, 오오, 나는 나의 '짐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 근데 완전 졸리네..자야겠다..[하하하] 얘기도 하고 싶었고, '필립 클로델'의 얘기도 하고 싶었는데, 그건 다음 기회로 미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