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거지같은 하루였다. 개인적으로도 그리고 업무적으로도 나는 지칠대로 지쳐있었고 평소보다 조금 늦은 퇴근길, 월요일 저녁이니 시사인을 사야겠다 싶어 지하철역의 가판대 앞으로 갔지만, 아 맞다! 난 지갑에 지금 백원짜리 하나도 없지. 이런 우라질. 그러면 서점가서 카드로 살까, 싶어서 잠실 교보에 갔다. 그런데 잡지 매대까지 갔는데 아씨.. 시사인을 못찾겠다. 안사, 안사련다. 그리고 나는 시집코너로 가서 『당신의 첫』이란 시집을 찾아본다. 거기에 실린 시를 읽고 싶어서. 그런데 잘 안찾아진다. 검색대에 시집의 제목을 쳐봤더니 시인 이름은 김혜순이란다. 다시 시집 코너로 가서 김혜순으로 찾는다. 찾았다.
시집을 펼쳐 목차를 훑는다. 「당신의 첫」이란 제목으로는 시가 없지만, 「첫」 이라는 시가 있다. 그 시를 찾아 읽는다.
첫
내가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당신의 첫,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그건 내가 모르지.
당신의 잠든 얼굴 속에서 슬며시 스며 나오는 당신의 첫.
당신이 여기 올 때 거기에서 가져온 것.
나는 당신의 첫을 끊어버리고 싶어.
나는 당신의 얼굴, 그 속의 무엇을 질투하지?
무엇이 무엇인데? 그건 나도 모르지.
아마도 당신을 만든 당신 어머니의 첫 젖 같은 것.
그런 성분으로 만들어진 당신의 첫.
당신은 사진첩을 열고 당신의 첫을 본다. 아마도
사진 속 첫이 당신을 생각한다. 생각한다고 생각한
다. 당신의 사랑하는 첫은 사진 속에 숨어 있는데,
당신의 손목은 이제 컴퓨터 자판의 벌판 위로 기차를
띄우고 첫, 첫, 첫, 첫, 기차의 칸칸을 더듬는다. 당
신의 첫. 어디에 숨어 있을까? 그 옛날 당신 몸속으
로 뿜어지던 엄마 젖으로 만든 수증기처럼 수줍고 더
운 첫. 뭉클뭉클 전율하며 당신 몸이 되던 첫. 첫을
만난 당신에겐 노을 속으로 기러기 때 지나갈 때 같
은 간지러움. 지금 당신이 나에게 작별의 편지를 쓰
고 있으므로, 당신의 첫은 살며시 웃고 있을까? 사진
속에서 더 열심히 당신을 생각하고 있을까? 엄마 뱃
속에 몸을 웅크리고 매달려 가던 당신의 무서운 첫
고독이여. 그 고독을 나누어 먹던 첫사랑이여. 세상
의 모든 첫 가슴엔 칼이 들어 있다. 첫처럼 매정한
것이 또 있을까. 첫은 항상 잘라버린다. 첫은 항상
죽는다. 첫이라고 부르는 순간 죽는다. 첫이 끊고 달
아난 당신의 입술 한 점. 첫. 첫. 첫. 첫. 자판의 레
일 위를 몸도 없이 혼자 달려가는 당신의 손목 두 개,
당신의 첫과 당신. 뿌연 달밤에 모가지가 두 개인 개
한 마리가 울부짖으며, 달려가며 찾고 있는 것, 잊어
버린 줄도 모르면서 잊어버린 것. 죽었다. 당신의 첫
은 죽었다. 당신의 관자놀이에 아직도 파닥이는 첫.
당신의 첫, 나의 첫,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첫.
오늘 밤 처음 만난 것처럼 당신에게 다가가서
나는 첫을 잃었어요 당신도 그런가요 그럼 손 잡
고 뽀뽀라도?
그렇게 말할까요?
그리고 그때 당신의 첫은 끝, 꽃, 꺼억.
죽었다. 주 긋 다. 주깄다.
그렇게 말해줄까요?
당신의 첫, 을 질투한다던, 부러워 한다던 내 모든 말들은 진심이었다. 이 시가 대신 말해주듯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당신의 첫. 그러나 당신이 뭘 질투하는지, 뭘 부러워하는지를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펼쳐든 시집에서 만난 이 시의 첫줄은 '내 맘같은 시' 였다. 그리고 이 시의 3연, 그럼 손 잡고 뽀뽀라도? 라고 하는 부분도 역시 내 맘같았다. 마지막 연의 당신의 모든 첫, 은 다 죽었다고 말하는 것도 나이고 싶었다. 나는 그런 말을 해주고 싶었다. 당신에게 첫, 은 어떤 의미인가요? 첫, 이 들어간 그 모든 것들을 잊지 못하나요? 당신은 이미 경험해 볼 모든 것을 경험해봤을테니, 나는 당신에게 그 어떤 형태로든 첫, 으로 기억되지는 못할텐데. 그러니 당신의 첫, 을 다 지워버리고 싶고 다 죽여버리고 싶어요, 라고 매정하게 말하고 싶다.
그런데, 이 시의 두번째 연은 아리송하다. 무슨 말인지 알다가도 모르겠고 모르겠다 싶다가 또 알것 같기도 하고. 어렵다. 이 시집을 집어 들고 계산을 하고 지하철을 타고, 그리고 시들을 읽는데, 다 잘 모르겠다..........잘 모르면서 또 시집을 샀다...................이건 무슨 똥고집일까.............. 왜 서점에 가면 자꾸 시집을 사가지고 오는거야...........
묻고 싶은게 많았다.
그리고, 많다.
그러나, 묻지 못할 것 같다.
아마도, 묻지 못하겠지.
밤새 눈이 내렸고, 땅이 질척거렸고, 나는 미끄러웠고, 점심은 맛이 없었고,
하고 싶은 말들은 삼켜졌다. 하고 싶은 말들을 삼켜봤자 배부른 것도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