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의 어느 늦은 오후. 나는 친구와 편의점에 들러 사발면을 먹고 있었다. 아주 열심히 먹고 있는데 친구가 아차 싶었다는 듯 내게 말했다.  

너 근데 남자친구 만나러 간다 그러지 않았어? 어, 그랬지.  

그러면 만나서 저녁 먹을거 아니야? 어, 먹어야지.  

그런데 사발면을 먹으면 어떡해? 이거 일부러 먹는거야.  

왜?  

그남자 앞에서 내가 언제나 너무 많이 먹는 것 같아서 오늘은 조금 먹는 모습을 보여줄라고. 그런데 배고프면 그게 안되니까 배 좀 채우고 가는거지. 

그때 친구는 라면 면발이 입에서 튀어나올 듯 웃었던가. 

 

그러니까 이야기는 이렇게 된거다. 남자친구와 내가 사귄지 얼마쯤 되었을때 였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우리는 그날 버거킹의 와퍼를 사가지고 한강에 가서 먹기로 했던거다. 그가 운전을 하다가 버거킹 앞에 차를 세웠을 때, 나는 당당하게 문을 열고 나가면서 내가 살게, 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 둘의 몫으로 치즈와퍼 두개를 샀다. 당연하잖은가! 사람이 두명인데. 콜라와 감자튀김까지 사서 포장을 해서는 한강에 도착했다. 포장을 풀었을 때 그는 내게 야, 와퍼를 사왔어? 나 주니어 와퍼 먹는데! 했던거다. 아 이런. 그래요? 주니어 와퍼는 주니어들이나 먹는거잖아요? 라고 말해놓고 아아, 나는 얼굴이 빨개졌던가. 그때 너무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 다음에 만날 때 사발면까지 먹고 만나려 한걸 보면. 

뜬금없이 아주 오래된 이 일이 생각난 건, 순전히 오늘 퇴근길에 읽기 시작한 이 책 때문이었다.   

 

 

 

 

 

 

 

은교는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왔다가 누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무재였다.  

   
 

무재 씨는 아무 말 없이 웃고 있었다. 

왜 웃어요. 

안 웃었는데요. 

웃는데요. 

점심 먹었어요? 

아니요. 

먹었는데도 그런 대답을 해 놓고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고 서 있다가 그러면 밥을 먹으러 가자는 무재 씨를 따라서 다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p.35) 

 
   

아, 은교씨. 나는 은교씨가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어요. 나도요, 나도 그래요. 나도 가끔은 먹었는데도 안먹었다고 말하고, 안먹었는데도 먹었다고 말해요. 은교씨, 당신만 그런게 아니에요. 상대가 무재씨라면, 괜찮잖아요!  

하루는 무재씨가 그녀에게 플라스틱 화분을 주고 갔다. 화분을 주고 가는 무재 씨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걸 유곤 씨가 본다. 

   
 

출근하는 길에 보고 샀다는 그것을 받아 들고, 또 보자며 돌아서서 가는 무재 씨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손바닥에 화분을 얹은 채로 수리실로 돌아갔다. 어느 틈에 그 자리로 돌아갔는지 유곤 씨가 입구에 앉아서 가만히 나를 보고 있다가 말했다. 

아픕니까. 

아니요. 

얼굴이 빨갛습니다. 

빨갛지 않아요, 라고 말하며 캐비닛 위에 화분을 올려놓았다. 떡잎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p.55)

 
   

 

 

하아, 유곤 씨도 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이 빨개진 여자에게 아프냐고 물어보면 어떡해요. 이 바보.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나는 그때의 그 남자가 다른건 다 잘먹는데 와퍼만 주니어로 먹는거란 걸 알게됐고, 그리고 더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나는 내가 내숭을 떨었던거였나, 싶어졌다. 이런게 내숭인건가. 먹고 와서 안먹은척 하면서 조금 먹는, 그런 행동. 그런게 내숭인건가.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사랑, 그 혼란스러운』을 읽는 중이었는데, 참 책장이 안넘어갔다. 리차드 도킨스가 얼마나 엉성한 주장을 펼쳤는지, 『이기적 유전자』가 왜 말이 안되는지 얘기하는 이 책은 흥미로운데, 흥미롭다고 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건 아니었다. 절반쯤 읽고나서는 이걸 대체 언제나 다 읽으려나, 하고 있다가, 이 책, 『百의 그림자』의 책장을 한 두장쯤 넘겨보다가, 어어, 나 이거 읽을래, 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은교 씨와 무재 씨의 대화가 좋다. 월요일부터 정종을 마시러 가자고 말하는 무재 씨가 좋다. 나는 아직 이 책을 다 읽지도 않았는데 은교 씨랑 무재 씨한테 정을 흠뻑 줘버렸다.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나는 오늘 화요일, 정종을 마시러 가기 보다는 책 읽기를 택하려고 한다.  

어느새 비는 그쳤고, 밖에는 귀뚜라미가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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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0-08-12 10:08   좋아요 0 | URL
속지마세요. 날씬한 여자사람이에요. ㅋㅋㅋ

다락방 2010-08-12 10:10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럴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ㅎㅎ 안속아요, 안속아!!

건조기후 2010-08-12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실 접때도 궁금했던건데;; 귀뚜라미가 가을에 나오는 게 아니구 한여름에도 정말 나왔어요? 저는 매미소리가 너무 우렁차서 그런지 귀뚜라미 소리는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 음

다락방 2010-08-12 10:47   좋아요 0 | URL
오호! 그렇다면 밤마다 우는건 귀뚜라미가 아닌가요? 밤마다 엄청 울어대던데요. 그거 매민가..나 매미 소리랑 귀뚜라미 소리를 구분 못하는건가요? ㅎㅎ

건조기후 2010-08-12 11:3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다락방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거 매미일텐데; 분명 매미였을텐데;;
다락방님의 한여름은 귀뚜라미(인 줄 알았던 매미)가 정복하고 있었던 거군요ㅎㅎ

다락방 2010-08-12 11:43   좋아요 0 | URL
전 낮에 울면 무조건 매미, 밤에 울면 무조건 귀뚜라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저를 어쩌면 좋나요! orz

다락방 2010-08-16 10:23   좋아요 0 | URL
건조기후님.
정말로 매미인것인가, 아빠께 물었는데요. 아빠가 우리집앞에 우는 거 귀뚜라미 맞대요. 그건 분명 귀뚜라미였던 거에요! 흑흑.

건조기후 2010-08-17 09:23   좋아요 0 | URL
음 저두 혹시 정말 귀뚜라미가 아니었을까 하구
정말 궁금하긴 했지만 괜히 좀 쓸데없는 소릴 했나 싶어서 왔어요.ㅎ 아 역시.ㅎㅎㅎ
근데 정말 신기해요. 한여름의 귀뚜라미
원래 귀뚜라미가 그런 건데 내가 무식해서 신기한건지 진짜 귀뚜라미가 신기한건지... 아하핳

다락방 2010-08-17 09:28   좋아요 0 | URL
네이뇬에 검색해보니 말이죠(저 이 검색 정말 잘 안하는데 ㅎㅎ 어쩐지 네이뇬이 싫어요 ㅎㅎ)
귀뚜라미 출현 시기가 8월-10월 이라네요. 늦여름부터 가을에 나오는가봐요.
집 앞 귀뚜라미는 풀밭에서 울어요. 아파트에 아주아주 작은 풀밭이 있거든요. 거기서요. 전 거기 근처도 안가요. 귀뚜라미가 튀어 오를까봐. 어휴- 징그러워요. ㅠㅠ

건조기후 2010-08-17 10:06   좋아요 0 | URL
그러고보니 제가 그냥 검색해봐도 되는데 왜 굳이 여기다가 ㅎㅎ
저두 네이뇬 안 써요.
무슨 까페하면 죄다 네이뇬인데 끝까지 '재가입' 안 하고 버티고 있어요. 뭔 똥고집인지

다락방 2010-08-17 10:15   좋아요 0 | URL
저는 네이버에 한번도 가입한 적이 없어요. 으하하핫 (어쩐지 자랑스러워한다.)

저는 검색의 생활화가 되어있질 않아서요, 모르면 다른 사람들에게 묻기는 해도 검색창을 신뢰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반면에 저랑 십년 차이가 나는 저희 사무실 막내는요, 무조건 검색창을 애용하더라구요. 병원다녀와서 처방전 받아오면 거기에 나온 약도 다 검색해보곤 하더라구요. 그래서인지 검색도 되게 잘해요. 그냥 검색창에 치기만 하면 장땡인게 검색이 아니더라구요. 저는 검색창에 쳐보고 뭐 원하는 답을 얻은적이 거의 없거든요. 사무실 막내는 인터넷 쇼핑도 엄청 잘하던데, 저는 인터넷 쇼핑을 해도 제가 원하는 물건을 찾질 못해요. 하아- 이것은 나이차이인지, 아니면 원래 검색에는 소질이 없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는 검색을 안하기도 하고 못하기도 하고 그러네요. 많이 부족한 여자사람이에요, 저는. 흑.

건조기후 2010-08-25 09:5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귀뚜라미 이야기? 마지막으로;; 덧붙이려고 왔어요.

저 며칠전에 (무려 이번 여름 들어서 처음으로) 귀뚜라미 소리 들었어요. 뚜루루뚜루루 하는 소리!
도대체 저 소리와 그 요란한 매미소리를 혹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어쩜 이렇게 뻔뻔하게 늘어놓았을까요? ㅋㅋㅋㅋㅋ 하구 웃는 거 봐요. 병딱도 아니고. 아 정말 이 무식을 어찌;; 이 멍충아 착각할 게 따로 있지 하고 귀뚜라미가 비웃는 거 같더군요.; 까르르까르르 ㅠ

궁금하면 혼자 찾아보거나 할 것이지 이 멍청한 긁어부스럼이라니. 가만히나 있지;
아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아니라 비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가슴을 쳐요. 까르르까르르ㅡㅡ

다락방 2010-08-25 13:30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또 거기다 대고 제가 구분 못하는가보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우리 언제 둘이 만나서 누가 더 바보같은지 내기라도 할까요? 맑은 소주 한잔 앞에 두고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누가 더 삽질 많이 했는지, 누가 더 바보같은지, 누가 더 멍청한지 우리 내기내기 해볼까요? 저는 챔피언 먹을 수 있어요. ㅎㅎㅎㅎㅎ


점심 먹었나요? 저는 대구탕 먹었어요. 맛있었어요. 비오는 날의 대구탕은!

마태우스 2010-08-14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 56에 추천이 고작 14개라니, 이처럼 재밌고 가슴뭉클한 페이퍼를 읽고나서 댓글만 다는 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마지막 문장, 귀뚜라미가 운다는 대목으로 끝나는 님의 페이퍼는 정말이지 예술품 같습니다. 그나저나 저도 오늘 술약속이 있는데 오후 세시에 밥을 먹어버렸네요. 잘보일 필요가 없는 술친구들이라 와장창 먹어야 하는데, 순간의 허기를 참지 못했던 거죠. ㅠㅠ

다락방 2010-08-16 10:30   좋아요 0 | URL
마태우스님. 그래서 그날 결국 술은 얼마나 드셨어요? 원하는 만큼 와장창 드실 수 잇었나요?
저는 토요일에 소주에 삼겹살을 먹었어요. 저는 소주에 삼겹살이 정말 좋아요. 헤헷 :)

2010-08-17 1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7 1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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