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그러니까 아주 어릴적에. 나는 '엘리자베스 게이지'의 [스타킹 훔쳐보기]를 읽으면서 크게 감동받았는데(감동받을만한 대단한 문학작품은 아닌데 그저 나 혼자 그랬다는거임), 그 시리즈둘 중에 가장 좋아하는건 뭐니뭐니해도 '할'과 '로라'가 등장하는 '센트럴파크'신이다. 그들은 뜨겁게(!) 사랑했고, 진심으로 사랑했는데, 뭐 어찌어찌하여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센트럴파크에서 우연히! 재회하게 된다. 그 둘다 그곳에서 함께 했던 시간들이 행복했음을 기억하기 때문이고, 그 둘다 그 장소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연은 어쩌면 필연으로 만들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래서,
그 때부터 센트럴파크는 내가 죽기전에 반드시 가봐야 할 곳이 되었다. 어딘가에 가면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혹은 희망.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우연. 그것이 사랑이 가져다주는 숱한 신비함 중의 하나가 아닐까.
오만년만에 센트럴파크 재회신을 떠올리게 된건, 영화 [500일의 썸머]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도 남자와 여자는 이별후에 우연히, 아니지, 사실은 그곳에 가면 그를 볼 수 있다는 기대로, 둘이 자주 갔던 장소에서 마주치게 된다.
"여기에 오면 널 볼 수 있을줄 알았어."
내겐 이런 장소가 없다. 그러니까 고기를 먹을때도 내 생각을 할 수 있을테고, 소주를 마실때도 내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그러니까 어떤 음악이 길에서 들려와도 나를 떠올릴 수 있고, 어떤 책을 봐도 나를 떠올릴 수는 있겠지만, 거기에 가면 그녀를 볼 수 있지, 하는 곳이 내게는 없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 역시 '그곳에 가면 그를 볼 수 있을지도 몰라!' 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그런 장소라고는 단 한군데도 없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한 장소에 대해 얘기하는 것, 그 장소에 대해 둘이 함께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좋아 보인다. 그런데 어제 본 영화 [들어는 봤니? 모건부부]에서도 이런 대화가 나온다.
"둘은 뉴욕에 대해 얘기하면서 함께 웃더군요. 그건 둘이 서로에게 아직도 정이 남아있다는 거에요."
이 영화속의 모건부부는 와이오밍의 레이에서는 뉴욕에 대해 이야기하며 함께 웃을 수 있었고, 뉴욕으로 돌아와서는 와이오밍의 레이에 관한 얘기를 하면서 함께 추억할 수 있다.
때때로, 누군가에게 관심이 생기면, 만약 그런일이 생기면 아주 많은 것들을 묻고 싶어진다. (차마 묻지 못하기도 하고, 결국 묻지 못하기도 하지만.)
당신은 어떤 음악을 좋아하나요? 주로 몇시에 자요? 자면서는 꿈을 꾸나요? 배고프면 신경질이 나는 쪽인가요? 나는 그래요. 자고 있는데 전화로 깨우면 신경질나요? 나는 화 안내고 잘 받아요. 어떤 음식을 좋아하나요? 어떤 배우를 좋아해요? 어떤 영화를 좋아해요? 자주 가는 장소가 있어요? 어디를 좋아해요? 그리고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Brandi Carlile' 의 새 앨범을 샀다. 지난번 [The Story]앨범처럼 역시나 이번 앨범도 알라딘에 없어서 해외주문했다. [The Story]처럼 이 앨범이 막 좋지는 않다. 그 앨범은 정말 최고였는데! 몇날 며칠을 계속해서 들었다고!! 그런데 이번 앨범의 이 노래, 『Pride and Joy』를 듣는데, 이 노래의 초반이 지나가는 무렵, 'Where are you now?'가 유독 귀에 쏙쏙 들어온다. 어쩐지 절규하는 듯한 목소리로 크게 외치는 그녀의 Where are you now?
지금이 오후라서 다행이다. 밤이 아니라서. 어젯밤 이 페이퍼를 쓰기 시작했을 때는 센트럴파크에 있는 내 사진을 올릴뻔 했고, 어젯밤 이 페이퍼를 쓰면서는 '어설픈 밤의 용기'로 어줍잖은 문자메세지를 보낼뻔도 했다. 그러니 이 페이퍼를 다음날인 오늘 오후에 끝낼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러나 지금이 일요일 오후인 것은 불행. ㅠㅠ
그리고 나는 알고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라고 묻는 건 달콤한 시작이 될 수도 있지만, "넌 대체 지난밤에 어디서 잔거야?" 라고 물으면 그 사랑은 결국 지저분한 집착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사라 코너'의 [Where did you sleep last night?]을 듣노라면 가슴이 찢어지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