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모님한테 말 좀 전해 주려무나. 네가 어느 시인을 만났는데, 그 아저씨가 사실은 무정하지만 아름다운 여인을 찾고 있다가 너를 만나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녀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으며, 이젠 새로운 곳의 숲과 초원을 찾아 떠나는 중이라고 말이다."  (하권, P.536)  
     

이 부분에서 제대로 감동하기 위해서 이 책을 읽었던가보다.

 어쩌면 '운명적인 사랑' 혹은 '운명적인 만남'이란게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또 어떤것들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고 생각되어지기도 한다. 그것이 꼭 알아야 하는 것이라면. 모른채로 죽어서는 안되는거라면.

랜돌프 헨리 애쉬가 소녀를 만나서 이 이야기를 전하는 것 만으로도 이 모든게 설명되잖아?

2004년의 여름, 애쉬가 소녀를 만나던 이 장면을 읽었던 때의 느낌이 여전히 생생하다. 비록 이제는 이 책의 내용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긴하지만.

 

 

2008년의 여름에는 이 책이 있었다. 아홉살짜리 평화주의자 오스카가 등장하는 책.

     
  온 세상이 거기 있었다. 마침내, 떨어지는 사람들을 찍은 사진들을 찾아냈다.
이건 아빠였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누가 됐든 간에, 그건 사람이었다.
나는 책에서 그 페이지들을 뜯어냈다.
마지막 장이 제일 앞에 오고, 제일 앞의 장이 맨 뒤로 가도록 순서를 거꾸로 뒤집었다.
책장을 휙휙 넘기자, 그 사람이 하늘로 떠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pp.454-455)
 
     

 

고맙게도 이 책에는 오스카가 말하는 이 사진이 실려있다. 그 사진들을 한장씩 넘겨보았다가 책장을 덮고, 그리고는 휙휙 넘겨본다. 마치 오스카처럼. 그리고 다시 책을 덮고 가슴에 안았다가 다시 꺼내서 이번에는 그 사진들을 휘리릭 넘긴다. 떨어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떠오르는 사람들의 사진들.

우리는 무사할 것이다. (p.456)

 

 

 

 

2006년 여름에는 이렇게 말하는 정미경이 있었다.

     
  그래, 소용없는 게 있다. 젖어버린 신발처럼, 범람하는 제방처럼, 누군가에게로 흘러가는 마음의 강물은 도저한 양츠강의 범람처럼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 (p.48)  
     

서늘한 인생을 얘기하면서 시인처럼 말하는 정미경이 궁금해서 나는 그녀의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몇 시에요?」
「여덟시」
「이제 돌아가요」
「지금은 상인의 시간, 장사치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죠」

민의 얼굴은 이제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상인의 시간을 견디며 말없이 물풀이 스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윈드 브레이크 하나로 견디기에는 분명히 싸늘한 날씨였는데 민은 춥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재킷을 벗어주자 민은 고개를 저었다.
「옷을 줄 때가 아니라 돌아갈 시간이에요. 벌써 여덟시 삼십분이네요」

어둠에 눈이 익은 민이 몸을 기울여 내 손목시계를 읽는다.
「여덟시 삼십분이라. 그건 수학자의 시간이죠」 민이 낮은 소리로 웃었다.
「언제 가려구요?」
「시인의 시간에요」
「그건 언젠가요?」

 「알 수 없는 일이죠. 난 지금 이 순간 시인이 됐으니까」
(pp.50-51)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에서는 이런 대사도 나온다.

"당신이 날 사랑하게 되는데 풀배팅하겠어요." (p..247)

이런 대사를 읊어봤자 그가 낭만적인 남자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슬퍼진다.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내 아들의 연인』에서 정미경은 여름인 6월을 찬양한다. 그러나 그 찬양 역시 서늘하기만 하다.

"5월이 아름다운 거 같아요? 눈으로밖엔 풍경을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 5월을 아름답다 하죠. 전 6월을 좋아해요. 6월은, 거의 폭력적인 생기를 뿜어내잖아요. 무심히 흘러가던 강물에도 관능이 금가루처럼 녹아 흐르고, 그 물을 탐욕스럽게 빨아마신 식물까지 숨결이 가빠지는 게 6월이에요. 사랑 없는 섹스를 한다면 6월이 적당하지 않을까요? 누군가를 꼭 죽여야 한다면 6월의 저녁에 그 일을 해치워버리세요. 6월은, 어떤 죄악도 용서받을 수 있는 계절이에요." (pp.180-181)

내가 사랑없는 섹스를 하지 않는 까닭은 지금이 6월이 아니기 때문이다.

 

 

2007년 여름에는 필립 말로가 있었다. 윽. 너무 좋아, 필립 말로! >.<

 

 

 

 

 

 

 

 

 

 

 

 

 

 

필립 말로의 비정한 유머에 마음을 빼앗겼더랬다.

"여자들도 인간 아닌가. 땀도 흘리고 더러워지기도 하고, 화장실에도 간다고. 뭘 기대하는 건가? 장밋빛 안개 속을 날아다니는 황금 나비?" (기나긴 이별, p.41)

"나는 매끈하고 화려한 여자가 좋아요. 비정하고 죄를 잔뜩 짊어진 여자들 말이에요."
"그런 여자들은 당신을 홀딱 벗겨먹을 거요."
랜들은 무심하게 말했다.
"물론이죠. 그렇지 않으면 어디서 내가 옷을 벗겠습니까?"
(안녕 내사랑, p.287)

     
  -레이먼드 챈들러가 밝힌 필립 말로에 대한 몇가지
흡연과 음주 습관 독자들은 말로가 카멜만 피울 거라 여기지만, 그는 아무 담배나 피우며 종이 성냥은 쓰지 않는다. 부엌 성냥이라고 불리는 커다란 나무 성냥을 쓴다. 또 그는 라이 위스키를 버번 보다 더 좋아할 것 같지만, 달지만 않으면 그에게는 어떤 술이든 상관 없다. 다만 핑크레이디, 크림드멘트 등의 달착지근한 칵테일은 모욕으로 받아들이다.

기호와 취미 커피를 잘 끓이는데, 설탕과 크림을 넣고 밀크는 넣지 않으며 가끔은 블랙으로 마신다. 어디서 구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라이프치히에서 출간된 체스 토너먼트 책을 좋아한다. 대륙식 방법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오손 웰스의 찬미자일 것이다. 특히 오손 웰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감독한 작품에 출연할 경우에, 독서 습관이나 음악 취향은 나 자신에게도 미스터리다. (챈들러는 슬쩍 지나간 것들을 독자들이 너무 고정시켜서 본다고 지적했으며, 여자에 대한 말로의 취향을 '육욕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독자이지 자신이 아니라고 말했다.)

심미안 말로는 다소 자극적인 모든 향수를 좋아하지만 역겨울 정도로 지나치게 향미를 가한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탱고와 룸바의 차이점과, 콩가와 삼바의 차이점을 알며, 삼바와 맘바(코브라 과의 남아프리카 산 독사)의 차이도 안다. 맘보라는 새로운 춤은 아주 최근에야 주목받고 발전했으므로 말로가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독자는 말로가 고가구와 향수와 상류층 억양에 대한 심미안을 갖고 있다고 말했고 챈들러는 그것을 부정하였다.)

 
     

 

2005년 여름에는 이 책이 있었다.

얼마전 추석합병호 시사인을 읽었는데 통일 독일에 관련된 기사들이 실려있었다. 그 기사를 보고 마침 이 책이 생각나 책장에서 다시 꺼냈고, 이 단편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꺼내어 읽었다.

이제는 나이들어 버린 그들의 재회, 다시 사랑을 나누던 짧은 시간, 그리고...

 

 

 

 

 

     
 

"전화번호 가르쳐줄래?"
"아뇨."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다시 새 전화번호부를 만들게 될 때 내 번호가 필요하다면 그때 가르쳐줄게요."
그들은 소리내어 웃고는 마지막 키스를 했다. 프란치스카는 그것이 정말로 마지막임을 알았다. 그리고 다시 택시에 올라탔다.
"기차역으로 가주세요!"
프란치스카는 하인리히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양손에 쇼핑백을 든 채로 문 앞에 서서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등을 곧게 세우고 자신감에 찬,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한 남자의 모습으로.
역에 도착한 프란치스카는 신문을 샀고, 일등석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하인리히와 단둘이서 그토록 행복하게 서로에게 열중하며 침대에 묻혀 있던 그 시간, 1989년 11월 6일에서 11일 사이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세상을 등지고 사랑을 나누던 그때에.

(세상을 등지고 사랑을 할 때 p.51)

 
     

 

여름이 갔다. 그런데 가을이 좀처럼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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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9-22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이런 페이퍼 너무 멋지잖아요.^^
가을이여~ 어서 오세요!! ^.~

다락방 2008-09-22 13:01   좋아요 0 | URL
멋지다는 말씀, 고맙습니다.
그러게요, 가을이 얼른 와야할텐데요. 이제 여름옷은 지겨워요. 후훗.

람혼 2008-09-22 0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려하고 멋진 페이퍼, 무엇보다 일독에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페이퍼입니다.^^ 감사합니다.

다락방 2008-09-22 13:02   좋아요 0 | URL
오옷 저는 그것이 무엇이됐든 욕망을 불러일으킨다면 정말 대단한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제게 참 큰 칭찬을 해주셨네요. 하하. 람혼님의 댓글이야말로 페이퍼를 또 쓰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데요. 고맙습니다. :)

2008-09-22 15: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22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와 2008-09-22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합니다.! ^^*

다락방 2008-09-22 17:32   좋아요 0 | URL
아이고. 부끄럽게 무슨 추천씩이나!
:)

비로그인 2008-09-27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미경 정말 좋아요.
유일하게 책을 다 갖고 있는 작가에요.
(이번 황순원 문학상에서 그녀의 수상을 빌었건만 크흑!)
'세상을 등지고 사랑을 할 때'는 어떤 책일까...궁금증을
안고 보관함에 넣어요~

다락방 2008-09-27 20:28   좋아요 0 | URL
아, 정미경을 좋아하세요? 반가워요, 반가워! >.<
저는 그녀의 작품중 『장밋빛 인생』을 가장 좋아한답니다. 그녀를 알게 된 건 『나의 피투성이 연인』이었구요. 저도 정미경의 작품이 너무 좋아요. 저도 다 가지고 있답니다. 윽. 아닌가? 갸웃. ( '')


단발머리 2014-03-25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이죠. 그렇지 않으면 어디서 내가 옷을 벗겠습니까?" (안녕 내사랑, p.287)

키햐~~~ 나 어떡해버려요? 넘 내 스타일인데요.
다락방님이 좋아해서 나도 좋아하는 거 아니구요.
나두 이런 스탈 좋아해요. 진짜요 @@

근데, 저게 다 시리즈라면, 저 여섯권에 '필립 말로'가 다 나오는 거계죠? 우하하. 진짜 대박이네요~

다락방 2014-03-25 17:27   좋아요 0 | URL
필립 말로에 흠뻑 빠지는 2014년을 보내세요, 단발머리님!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