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다보니 그동안 보았던 영화들중 일부가 떠올랐다.


먼저 미셸 윌리엄스 주연의 <블루 발렌타인> 인데, 영화속에서 대학생인 '신디(미셸 윌리엄스)'는 남자친구와 콘돔 없이 섹스를 하고 바로 임신이 되어버린다. 그 섹스를 원한건 신디가 아니었는데 아마도 빈 강의실이었던가, 남자친구는 잠깐만  이라고 하면서 거의 일방적으로 아주 짧게 남들의 눈을 피해 콘돔도 없이 신디에게 정액을 쏟아부은 거다. 신디는 이 섹스를 자신이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임신을 했고 출산을 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남자친구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했다해도 그런 남자가 좋은 아빠가 될 리는 없었겠지만, 이 아이를 낳고 키우는 건 신디 혼자만의 몫이었다. 여자가 싫다고 하는데도 자기가 남자친구라고 콘돔도 없이 찍 싸버리고 그 자리를 떠나버리는 거, 너무 별로다. 욕망하고 배설하고 간단하게 자리를 피한 남자가 있고, 원하지 않았는데 임신을 하고 아이를 품고 낳고 기르는 건 여자의 몫이다.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는 삶은 결코 쉽지 않다.


그 영화보다 더 자주 떠올린 영화는 <러브, 로지> 이다. 영화 속에서 호텔리어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던 이제 막 대학생활을 앞둔 '로지(릴리 콜린스)'는 졸업 파티에서 만난 남자와 잠깐 섹스를 한 뒤 임신을 한다. 아직 어리고 꿈이 있었던 로지는 아이를 입양보내기로 하지만, 막상 아이를 낳고서는 그 아이를 키우기로 한다. 그녀가 대학에 가지 못한건 뻔한 일이다. 그녀의 단짝 친구인 알렉스는 함께 대학에 가기로 했던 로지가 대학을 포기하자 아쉬워하는데, 그 날 졸업파티에서 각자 파트너와 즐거운 시간을 가진건 릴리와 알렉스가 마찬가지지만, 왜 어느 한 명은 대학을 포기해야 하고 어느 한 명은 아무런 지장없이 대학에 갈 수 있었는가.


이 영화가 떠오른 이유는 '캐런 윌슨 부터바우'의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젊은 여자들이 임신과 미혼모라는 낙인 그리고 입양에 대한 고민과 갈등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아, 그간 봐왔던 영화들에서 젊은 여자들이 아이 아빠 없이 아이를 낳고 그 때 누군가 기다렸다 그 아이를 데려가 입양하고.. 했던 것들, 그것이 다 그 시대상을 반영한것이었구나. 이게, 그러니까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임신하고 출산하면 입양으로 이어지는 것이, 어느 시대에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어. 소위 아기 퍼가기 시대로 말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 1973년까지는 낙태는 불법이었고 피임에 대한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아이 아빠 없이 아이를 낳으려면 입양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 시대를 말한다. 학생의 경우 임신하면 그 학교에 더이상 다닐 수가 없었고 미혼보로 교육을 받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결혼하지 않은 채로 임신하면 인생이 좆되는 거였다. 교육도 못받고 나라의 지원도 못받았다. 그녀에게는 몸을 함부로 굴린다는 낙인이 찍히고 설사 입양이 아닌 양육을 선택해 나라의 지원이라도 받을라치면, 많은 사람들이 왜 우리의 세금을 미혼모에게 줘야 하느냐고 화를 냈다. 오, 신이시여..


처음 책을 읽을 때만 해도 사실 '그런데 젊은 나이에 결혼하지 않고 임신하면 혼자 키우기 힘든건 사실이고 그렇다면 입양시키는 게 제일 나은 답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책의 책장을 넘길수록 내가 생각한 바로 그 형태가 사회복지사들이 미혼모를 설득하는 이유라는 걸 알았다. 단지 그들에겐 나와는 다른 더 원대한 목표가 있었으니, 입양을 주선하면 돈을 받는다는 것. 특히나 백인 아이들은 수요가 많았고 백인 부모들이 줄 서서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 입양할 수 있기를 기다렸다. 그러니 입양에 대해 점점 더 커다란 금액의 돈이 오고갔고. 미혼모에게 아기를 포기하라는 설득은 더이상 미혼모의 앞으로의 삶을 위한게 아니었다. 이 입양을 성공해야 돈을 번다! 아기는 상품이 되었고 아이 엄마는 상품 제공자가 된것이다. 혹여라도 아기 엄마가 아기를 낳고 마음을 바꿀까봐 낳자마자 아이를 보여주지 않기, 아기 엄마의 부모도 설득하기 등등의 방법이 그들에게 시행되었다. 나는 비로소 젊은 여자가 혼자 아이를 낳았을 때의 최선은 입양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됐다. 만약 사회적 분위기도 그렇지만 정부에서 혼자 아이를 낳아도 잘 키우고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다면, 아기를 낳고 바로 보내지 않아도 되는거였다. 참 사람들, 예나 지금이나 여기나 거기나 여자들 죽이기에 진심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 번 자보겠다고 덤벼드는 새끼들이 있고 그렇게 임신하고나면 몸 함부로 굴렸다고 손가락질하고 아기 지우려고 하면 낙태는 불법이고 그래서 아이 낳아 키우려고 하면 지원해줄 수 없다고 하고.. 뭘 여자 미워하는데 이렇게 진심이냐. 그녀들에게 찍힌 낙인과 미래에 대한 고민, 그들에게 가해진 압박의 숱한 사례들을 앞에 두고 나는 이 여자들을 이런 상황으로 몰아 넣은 남자들은 어디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임신한 순간 가졌을 두려움과, 이 임신으로 인해 내 꿈을 포기해야 한다는 암담함, 이 아이를 입양보내야겠지 라는 고민과, 막상 낳고 나니 아기랑 헤어지는게 힘들었던 그 모든 순간들과 입양 보낸 후에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품고 살아야 했던 그 오랜 시간들을 겪어가는 이 여자들, 이 여자들 옆에 이 아기의 아빠들은 없었다. 아마 그 아빠들 중 상당수는 자신이 아기의 아빠가 되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할 것이다. 블루 발렌타인의 잠깐 스쳐간 장면처럼 '에이 잠깐만' 하고 배설한 뒤 자리를 뜨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해볼 일도 없이 그 남자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갖고 돈을 벌고 그리고 결혼을 해 자신이 아는 자신의 자식들을 낳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 사이사이 자기도 모르는 아이들이 더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십만명의 미혼모가 몸을 함부로 굴린다는 낙인이 찍혔다면, 십만명의 그 상대 남자들이 있지 않겠나. 물론, 십만명보다 더 적을 수도 있다. 어떤 남자들은 한 번만 그리고 한 명에게만 그러진 않았을테니까. 코피노 문제가 심각하다는 기사를 우리는 종종 접할 수 있는데 그 코피노에 있어서도 그렇다. 필리핀에서 아이를 낳게 만들어놓고 한국으로 도망쳐온 많은 남자들중 또 얼마만큼은 그렇게 필리핀에 낳아둔 아이가 자기가 아는 아이 말고 더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세상에 숨쉬는 남자들 중의 아주 많은 수는, 언젠가 누군가 자신의 아이를 낳았을지도 모를 일을 벌이고서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겠지.



사생아 출산에 절반의 책임은 남자에게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혼모와 미혼부에 관한 연구 건수의 비율은 30:1 정도이다. ... 미혼모를 대상으로 한 연구만으로는 사생아에 대한 이해는 물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런데 미혼모에 대한 연구와 동등한 수준으로 미혼부를 연구하고, 관찰하고, 질책한다면 딜레마를 초래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남녀의 성적 행위를 판단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전통적인 이중잣대의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몸을 버린 여자'에 상응하는 남성을 묘사하는 표현은 없다. 우리는 미혼부보다 미혼모를 더 비난하고 낙인화한다. ... 무죄 추정의 관행에 있어서도 미혼모는 불리하다. ... 왜냐하면, 배가 불러오며 그 죄를 스스로 입증하게 되니까... 반면, 미혼부에게는 어떤 증거도 남지 않는다. ... 미혼모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성적으로 어떤 잘못을 했는지 반드시 밝혀야 한다. .... 미혼모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눈에 띄는 문제들을 제기하지만, 미혼부는 그렇지 않다. 산전 돌봄, 산모를 위한 시설, 그리고 양육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 필요한 사람은 미혼모이다. ... 미혼부에게는 자신의 행위로 인해 납세자들이 낸 세금을 쓰게 된다는 증거도, 관습에서 벗어난 성적 행위를 했다는 증거도 없다. (Vinvent 1962) -p.107 재인용



1960년, 미국에서 250,000면의 아기들이 미혼모에게서 태어났다. 이 중 91,700명의 "아버지 없는" 신생아가 십대 미혼모에게서 태어났다. -p.188



역사적으로 임신한 학령기 소녀들은 사회로부터 거의 또는 아무 도움을 받지 못하고, 방치되거나 처벌을 받았다. ... 가족과 학교의 태도는 가혹하거나 무대응이 대부분이었다. ... 임신한 여학생은 학교를 그만두라는 압력을 받았으나... 임신의 원인을 제공한 남학생은 학교를 계속 다녀도 되었다. ... 사람들은 이것을 '사내들은 다 그렇지 뭐'라는 식으로 말해, 마치 남학생의 성적 방탕을 칭찬하는 듯했다. ... 하지만 여학생은 불명예스럽고, 수치스럽고, 부적절한 행동을 한 것으로 여겼다. (Zackler & Brandstadt 1974) -p.105~106 재인용



이 책의 저자 캐런 윌슨 부터바우가 이 사생아를 낳고 입양시킨 미혼모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로 고통받았고 또 많은 여자들이 같은 고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수많은 자료를 읽고 이 책을 써냈다. 그녀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 책을 읽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을까, 를 이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문제에 직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걸로 그치지 않고  '그런데 왜?' ,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지?' 를 끊임없이 생각해본다. 고통과 상처의 당사자인 것도 힘든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려고 하며 원인을 찾아보고자 하는 시도는 그 후에 올 다른 고통들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찾아올 고통까지도 예방할 수 있다. 캐런 윌슨 부터바우는 그런 사람이었다. 다른 결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레이첼 모랜 의 [페이드 포]도 생각났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들여다보고 생각해보고 그리고 글로 써내는 일. 그런 여자들을 응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보스톤 미혼모 시설 원장은 아기를 포기하라는 압박을 느낀 한 미혼모가 한 말을 인용했다. "K 원장님이 정확히 말한 건 아니에요 내가 베스를 키우겠다고 했을 땐 안 그랬는데, 입양 이야기를 꺼내니 그냥 얼굴이 밝아졌어요." (Issac & Spencer 1965: 54)


따라서 만약 입양 수요가 줄면 미혼모는 ‘정상‘(기혼 부부)가정에 아이를 보내라는 압력 대신 아기를 키우라는 격려를 받았을 것이다. - P131

사회학자인 윌리엄 라이언은 미혼모에게 입양을 강요하는 상황을 심각하게 보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곤경에 처하는 원인을 가난한 사람 탓으로 돌리는 경향에 대한 선구적 연구를 했는데, 그에 따르면 미혼모는 타락하거나 일탈적 존재가 아니라 가난의 피해자이고, 자원의 분비와 접근에 있어 "불평등의 패턴"을 보여주는 가시적 증거다. 이 패턴에는 사회의 지배적 다수가 "가난한 자들을 제자리에 두려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반대로 불법의 산물, 즉 혼외 출산아기는 전반적으로 높은 사회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만약 "사생아를 없애면, 입양에 필요한 원자재를 없애는 것이다". 특히 입양 시스템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라이언은 "입양되지 않은 라이언은 "입양되지 않은 엄청난 잉여 사생아들은... 입양 시스템이 만든 추잡한 산물이며, 형편없고 부적절한 아동복지와 공공부조 시스템의 자원안으로 던져질 기준 미달의 물건과 같았다"(Ryan 2000[1971]: 114-115)고 일갈했다. - P145

우리 자신의 직업 정신과 (대부분) 미혼인 우리의 신분이 우리의 철학을 결정하는 요인이 아닌지 자문한다. ... 매우 중요한 질문을 회피하기 위해 우리가 불임 부부의 심리적 고통과 그들의 욕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미혼모가 아이를 키우겠다고 하면, 우리는 그들을 우리와 같은 계층의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리가 낸 세금으로 그들을 지원할 수 있을까, 모든 아이들은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과 또 어떤 아이는 인위적인 입양을 통ㅇ해 아버지를 만들어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생부가 ... 아이에 대한 책임을 지는 상황에 직면하도록 할 수 있을까? (Bye 1959. 1.1.) - P181

에모리 대학 정신과 의사인 아이린 프라이더스는 어니스트 존슨 박사의 자유에 대한 정의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유의 본질은 선택권을 의식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위기에 처한 어떤 사람에게 가능한 선택이 하나밖에 없다면 그는 자유롭지 않다. ... 자유는 부분적을 일련의 행돌으로 들어가기 전 멈추고 생각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처한 환경에서 주어진 것 외에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대안이나 행동 경로를 제안함을 의미한다...". 프라이더스는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려움에 놓인 사람들과 지역 사회를 돕는 사회복지사는 이전에는 없었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한 대안을 찾고, "최상의 자유와 해방은 선택 자체에 있을 뿐 아니라 가장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상태이며, 억압이 가장 최소화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Phrydas 1964. 10.26.).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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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5-02-20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심한 욕도 하고 싶었지만 쪼~~~큼 속이 시원하네요^^
책임을 다하지 않은 미혼부는 감옥 가야 합니다!!!
아니면 거기를 거세하든가요. 화학적 거세라도요!

다락방 2025-02-21 09:21   좋아요 1 | URL
책임을 다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모르기도 할 것 같아서 속이 터져요. 섹스는 둘이 했는데 한 쪽은 모른채로 지나갈 수도 있고 한 쪽은 평생을 끌어안고 살아야 하다니.. 진짜로 임신이 랜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너와 내가 오늘 섹스를 한다면 너와 나 둘 중 누구든 임신할 수 있어! 라면, 남자들도 좀 더 신중해질텐데요.. 하아-

단발머리 2025-02-20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브, 로지>에 제가 좋아하는 알렉스가 나옵니다. 로지가 씩씩해서 좋았지만 마음은 너무 아팠던…
미혼모가 충분히 혼자서도 아이를 키울 수 있죠. 꼬시는 그 순간부터 아기의 출생때까지 그 이후에도 고통이 여성만의 것이어서 너무 슬픈 현실을 잘 보여주는 책인 듯 해요.
전, 20여쪽 남았어요. 페이퍼 제목도 이미 정해놓았음요 ㅋㅋㅋㅋ 얼른 갈게요!

다락방 2025-02-21 09:20   좋아요 1 | URL
러브, 로지 다시 보고싶은데 제가 구독하는 ott 에 없더라고요. 지금 다른 ott 구독을 해야하나 갈등중입니다. 어휴 이놈들 그냥 다같이 좀 하지 왜자꾸 돈쓰게 하는건지 ㅠㅠ
제목도 이미 정해두셨다니, 단발머리 님의 글을 기다리겠습니다. 빠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