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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몫
장성욱 지음 / 득수 / 2024년 10월
평점 :
얼마전에 드라마 <지금 거신 전화는> 을 보았다.
주인공은 대통령실 대변인 '백사언(유연석)' 과 대통령실 수어 통역사 '홍희주(채수빈)'인데 서로 비밀을 감추고 있다가 그것을 알게 된 후에도 사랑한다, 는 로맨스가 주를 이룬다. 그 과정에서 주변 인물들과 또 주인공들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 복수에 대한 욕망이 펼쳐진다.
드라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는데,
백사언의 개인적인 일까지 돕는 회사 후배 중에 '박도재(최우진)' 행정관도 비밀을 숨기고 있었고 복수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 형을 잃은 슬픔과 상처로 가해자이며 살인자인 '그'의 옆에서 언제나 복수의 날을 기다리고 살고 있었는데, 가해자에게 상처를 입히고 죽이고자 시도까지 하고난 후에야, 자신이 알고 있는 이 가해자가 '진짜 가해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거다. 오히려 자신이 진짜 가해자를 도와 무고한 사람을 망치려고 했다는 걸 알게 되고 괴로워한다. 그 때 그가 그런 말을 한다. "복수 하나만을 바라며 여기까지 왔는데, 나는 지금까지 뭘한거지?"
자, 책 얘기를 해보자.
서른한 살 '박선용'은 어느날 유튜브 방송을 통해 자신의 팔목에 난 상처들을 보이며 중학교 시절 학교폭력의 피해자였음을 드러낸다. 가해자에 대한 사항들을 특정함으로써 그의 구독자와 팬들은 가해자의 신상을 털어내고, 가해자의 사진까지도 공개된다. 눈을 가렸다고 해도 가해자의 지인이라면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상황. 가해자 '임영빈'은 대기업에 다니고 있고 얼굴도 잘생기고 곧 교사와 결혼까지 앞둔 상황에서 갑자기 이 일이 터지자 당황한다. 결혼식 사회를 봐주기로 했던 친구가 손절하고 회사에서는 나가라고 한다. 게다가 갑자기 집에 가는 길에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얻어맞기까지 한다.
임영빈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앞부분을 읽노라면 중학교시절 학교폭력 가해자였던 자신에 대한 기억이 없고 피해자에 대한 기억 역시 없기 때문에 '어쩌면 아닌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닐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이 사람의 일상이 천천히 파괴되어 버리는게 과연 온당한가? 라는 생각을 할무렵, 그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유명 배우인 엄마를 찾아간다. 엄마는,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름아닌 엄마가 그 일을 수습했던 사람이었다. 엄마는 아들인 영빈을 위해, 영빈의 미래를 위해, 그 일을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영빈에게 그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말한다. 그건 잘못한 게 아니라 실수였을 뿐이라고. 그 일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그 일을 수습하고 또 아무 영향이 없기를 바란건, 그것을 잘못이 아니라 실수라 말한 건, 그 일이 배우인 자신에 대한 타격을 우려한데에서 나온게 정녕, 아니란 말인가?
박선용은 학창 시절 학교폭력의 피해자였고, 가해자의 엄마가 내민 돈으로 컴퓨터를 사서 줄곧 방안에서 게임만 했다고 했다. 그게 지금 건물까지 살 정도로 유명한 프로게이머로 만들어 준거라고 말한다. 가해자는 금수저였다. 외모와 경제력 그리고 곧 결혼하게 될 예비신부까지 부족한게 하나도 없는 사람. 박선용을 응원하는 아주 많은 남자들이 이 서사에 열을 올리며 가해자 임영빈을 처단하길 원한다. 박선용에게 일어났던 일은 자신들이 지금도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자기들이 겪었고 또 지금도 겪고 있는 일들이기도 하다. 잘생기지도 못했어 돈도 없어 여자도 없어 취직도 못하고 있어, 그런데 어떻게 학창시절 남 때린 새끼는 모든걸 다 가졌지? 저런 새끼는 내가 응징해야 해! 라며 피해자의 편이 되어 가해자를 응징하고자 한다. 이것은 정의 구현인가? 이것은 잘못된 걸 바로잡는 길인가? 저 사람의 복수를 내가 대신 해주는 것은, 어쨌든 잘못한 사람이 벌을 받는 일이니 괜찮은것인가?
박선용이 학교폭력 피해자였던 사실을 고백했던건 유튜브 방송의 구독자를 늘리기 위함도 있었고, 제대로 된 사과를 받고 싶기도 해서였다. 이 일이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한 임영빈은 박선용에게 사과하고자 한다. 이걸 제대로 수습해야 직장도 친구도 그리고 약혼자 까지도 다시 자신에게 돌아올 테니까. 그는 박선용에게 '미안해' 라고 수없이 말하지만, 그러나 그는 뭐가 미안한지 모른다. 왜냐하면, 전혀 기억에 없기 때문에. 전화를 받지 않으면 더 큰 폭력을 당했고, 손목이 담뱃불로 지져지고, 배며 정강이를 얻어맞기 수차례에 이르렀고, 정말로 나는 쓸모없는 놈이라는 생각을 계속 하게 했던 피해자의 삶은 그런 상태로 지금까지 쭉 이어졌는데, 그러니까 유명해지자고 결심해지게 된 계기가 학교폭력 피해 때문이었는데, 유명해져서 사람들이 날 알게 되면, 가해자인 그 놈도 어딘가에서 자기 잘못을 자꾸 떠올리고 뉘우치고 있겠지, 했었는데, 막상 내 앞에 나타난 가해자 새끼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기억이 없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 너무도 두렵기만 했는데, 걸을 때면 뒤에서 저새끼가 따라오는 건 아닐까 하고 두려웠는데, 그런데 저 새끼는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고? 괴롭지 않았다고? 양심에 찔리지 않았다고? 죄책감도 없었다고? 아예 깡그리 잊고 살았다고? 저 얼굴로, 저 스펙으로, 저런 여자친구까지 가지면서 잘 살고 있었다고? 어떻게 그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러면, 그러면, 그러면,
나는 지금까지 뭘한거지?
내 삶은 그걸 잊기 위해 몸부림치고 여전히 무섭고 떨리고 그러니 나만큼 너도, 라는 생각으로 이어져온 삶인데, 그런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어? 어떻게 그래?
"나는 언제나 네가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어. 그리고 유명해질수록 그러기르 더 바랐지. 어떤 이유에서건 나를 보며 불편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어. 겨우 그 정도가 내가 생각한 복수였던 거야. 그런데 너한테는 이게 다 기억조차 못 하는 일이라니." -p.229
박선용은 그로부터 사과를 받고 그와 함께 봉사활동을 하면서 그를 용서하고 그 과정을 방송하면서 분노했던 구독자들도 달래려고 했다. 그렇게 진행될거라고 생각했고 계획했다. 그러면 다 좋아지는 거였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가해자가 가해 사실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 것. 이 일은 박선용의 계획을 변경시킨다. 어떻게 기억하지 못해? 나는 평생 어쩔 수 없이 시달리며 살았는데? 박선용은 기억하지 못하고 앵무새처럼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임영빈에게 그렇다면, 앞으로라도 평생 기억하도록 만들기로 한다. 가해자였던 임영빈에게 남은건 앞으로 피해자를 기억할 수밖에 없는 삶이 남았지만, 박선용에게는 어떤 삶이 남게됐을까. 거기에 대해서는 책의 결말이므로 피하기로 하겠다.
그러나,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그 두 삶 모두 평온하게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그리고 여기에는 피해와 가해자 둘만 있었던게 아니다.
왜 귀한 집 아들에게 피해를 입혔냐며 오히려 피해자인 손자를 질책했던 할머니가 있었고, 피해자의 곁에는 없었던 부모들도 부재함으로써 영향을 미쳤다. 그 가난이,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함이, 그로 하여금 가해자에게는 괴롭혀도 되는 아이로 만들었다.
가해자의 엄마도 이 상황을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다.
아들이 한 일이 잘못이라는 걸 인정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다면, 아들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시켰다면, 그러면 그 후에 박선용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임영빈의 삶도 마찬가지. 그러나 가해자의 엄마는 가해자에게 그 일은 단순한 '실수'라고 말함으로써 제대로 된 도덕으로부터, 교육으로부터 멀어졌다. 피해자에게는 삶 내내 지독한 기억을 주었고 가해자에게는 기억 자체를 없애주었다. 폭력이 발생하는 지점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고,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주변이 있다.
읽으면서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한 건, 혹시 나에게도 내가 기억못하는 어떤 가해가 있는건 아닐까? 하는 거였다. 이렇게 새까맣게 잊었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다른 사람을 때린 기억을 잊을 수 있나? 다른 사람의 손목에 담뱃불로 지진 게, 잊혀질만한 일이야?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됐는데, 어쩌면 나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나의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국민학교 때는 전교에서 인기있었던 아이와 한 반이었는데, 그 아이가 왕따를 주도한 적이 있다. 왕따 당한 아이를 어떤 이유로 왕따 시키려고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인기있는 아이 주변엔 늘 친구들이 많았고 이 아이에겐 많지 않았다. 나는 그런데 이 친구가 좋았다. 그래서 나는 이 친구랑 놀았다. 우리 집에 데리고 와서도 놀았다. 이름도 기억한다. 지금, 잘 지내고 있을까? 그 당시에 그 아이랑 노는 내 심정은 '왕따는 나쁜거야, 너의 뜻대로 되지 않겠어!' 같은 거창한 건 아니었고, 그냥 이 친구가 좋아서였다. 나는 좋은데? 이런거. 그래서 처음엔 눈에 띄지 않게 놀아야지 했다가, 그냥 나중엔 대놓고 놀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왕따를 당하거나 하진 않았다. 전교에서 인기 있는 아이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는 나대로 또 졸라 강해가지고... 그 아이가 나를 왕따시키자고 했으면 내가 굳이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내 주변으로 무리가 형성되었을 거다.
중학교 때도 그랬다.
친구 몇 명이 '쟤랑 놀지 말자'고 했다. 그러면서 눈에 띄게 그 아이를 따돌리려고 했다. 그 때는 따돌림 당하는 아이를 그렇게까지 좋아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눈에 띄게 다같이 한 사람을 무시하는 건 할 짓이 못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그냥 걔랑 놀았다. '쟤랑 놀지 말자' 고 말했던 애는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너무너무 좋아하는 아이였고 나랑 너무 친해지고 싶다고 편지를 자주 보내는 아이였는데, 그래서 나도 그 아이에게 잘해줘야지 마음 먹었었는데, 그런데 다른 아이를 그렇게 무시하는 건 너무 별로지 않나. 그러니까 만약, 내가 누군가를 싫어해서 일대일로 상대를 미워하고 무시할 수는 있지만, 그런데 무리들 틈에서 다같이 한 명을 무시하는 건 너무.. 비겁하잖아? 그래서 그냥 그 말 듣자마자 보란듯이 따돌림 당하는 아이 옆에 섰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주도했던 아이가 나를 포함한 친구들이 있는 자리에서 나를 가리키며 "락방이 때문에 따돌림도 못시켜" 라고 말했더랬다.
나는 어른이 된 지금도 그렇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 곁에 아무도 없는 건 정말 바라지 않는다. 그 사람의 주변에 그 사람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누구나 자기 편은 있어야 한다. 나는 나보다 약한 사람과는 싸울 의지가 전혀 없다. 그 싸움은 시작하지 않는다. 애초에 한쪽이 더 약하다면, 그건 싸움이 성립되지 않는다. 일방적인 괴롭힘이지.
그러니까 학교폭력, 왕따 같은 단어를 접하고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이 두 개의 기억이 떠오른다. 물론 저 기억들은 오래전의 것이고 (보진 않았지만) <더 글로리>같은 폭력은 그 당시에 내 주변엔 없었다. 어쩌면 있었는데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내 기억속에는 피해자인 나도 없지만 가해자인 나도 없다는 것. 그런데 장성욱의 이 책을 읽다보니, 기억이란 어차피 왜곡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나 역시 나에게 나쁜 걸 잊은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그러다가도 세차게 고개를 젓는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나는 후회하는, 후회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게는 후회되는 일들이 많다.
그건 나라는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친 선택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대에게 그 일이 당시에 괴로웠을 거라는 데에서 오는 것들이다. 내가 그 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그 때 그렇게 말하면 안되는 거였는데.. 같은 것들. 여전히, 아직도 나는 어떤 기억들이 불쑥 떠오를 때면 괴롭다. 내가 그런 말과 행동을 했던 사람이라는 게 너무너무 괴롭다. 상대의 손목에 담뱃불을 지지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분명 어느 때의 나는 상대에게 괴로움을 주기도 했던 사람이다. 지금 기억하고자 하면 딱히 떠오르는 건 없지만, 이건 불쑥불쑥 예기치않게 찾아오곤 한다. 아, 그 때 그랬지, 아 씨발 왜그랬지 ㅠㅠ 막 이렇게 되어버려. 그런 기억들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다고 그럴때마다 생각한다. 너무너무 괴롭다. 그런데 어떻게 상대에게 발길질을 하고 담뱃불로 지진 걸 새까맣게 잊을 수가 있지? 이게 어떻게 그렇지? 말이 되나? 나였다면, 내가 가해자였다면 나는 제대로 된 직장생활도 못했을 것 같다. 상담 받으러 다녀야했을 것 같아. 아마 수시로 내 머리를 쥐어뜯었을 텐데. 아 씨발 나는 쓰레기야.. 이러면서 괴로워하면서 대인기피증 까지 생겼을 것 같은데. 그런데 어떻게 그걸 .. 잊고 잘 살 수 있지? 마치 그런 일은 없었던 것처럼,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하다 못해 박연진도 문동은에게 자신이 가해한 사실은 알고 있었잖아? 그걸 잊었다고 말한 가해자 앞에서 피해자인 나는 뭘 느껴야하지? 충동적으로 용서의 계획을 복수의 계획으로 바꾼 것은, 인간이라는 부조리하고 불완전한 존재에게 너무나 당연한 수순 아니었나.
오늘 출근길에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었다.
마지막 부분을 읽는데 갑자기 추워졌다. 몸이 떨릴만큼 추워졌다.
학교폭력의 가해자이며 피해자인 이들의 삶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부터 앞으로까지 행복학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추워졌다.
이런 식의 끝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러나 이런 식의 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나는 그동안 왜 살아온걸까? 뭐한거지? 라는 생각이 한 편에 들었다면, 다른 한 편에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하지? 가 마땅히 따라오는게 좋을 것 같다. 그래야한다.
사족인데,
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문종필 문학 평론가의 발문은 별로였다.
무엇보다 '박선용'을 '박신용' 이라고 내내 잘못 기재했다.
한 번의 오타가 아니라 발문 끝까지 내내 그런다.
주인공의 이름을 잘 못 기재하다니, 책을 제대로 읽은 건 맞아? 라는 의문이 들어서 발문 전체가 별로로 느껴졌고, 어떻게 편집자도 잡아내지 못한채 책에 실렸을까? 작가에게 미안해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