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
아다니아 쉬블리 지음, 전승희 옮김 / 강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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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들은,

정찰을 위해 이곳에 머무른다지만 민간인에게도 가차 없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각별히 조심하자고 서로에게 일렀다. 그들의 눈에 띄면 안돼, 우리는 숨어서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고 밥을 먹었다.

그 날도 잘 숨었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개가, 우리와 함께 있던 개가 짖었다. 조용히 하라고 우리 모두 일렀지만 그러나 개가 짖었다. 아마도 개는 다른 이의 기척을 들은 것 같았다. 우리는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나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발견했다. 그들은 군복을 입고 있었고 우리에게 총을 겨누었다. 우리는 아니라고, 살려달라고, 우리는 군인이 아니라고, 그저 이곳에서 쉬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그들이 하는 말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처럼 그들도 우리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알아들었다고 달랐을까. 그들은 총을 쐈다. 내 아버지를 향해, 내 오빠를 향해, 내 삼촌을 향해. 그리고는 나를 그들의 차로 끌고 갔다.

나는 왜 살려두는걸까. 아직 채 어른이 되지 않아서? 아니면 여자라서? 나는 내 가족의 죽음을 눈앞에서 맞딱드리고 이제 내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서웠다. 두려웠다. 어차피 죽음은 곧 내게도 올 것 같았다. 어쩌면 죽는게 더 나은걸까. 나는 무력하게 그들의 차에 들어갔고 그들의 요새에 도착했다. 내가 도착한 후 장교로 보이는 사람은 다른 병사들 앞에서 나의 옷을 찢었다. 사막 한 가운데에서 그리고 남자 병사들이 가득한 곳에서 나는 옷이 찢겨진 채로 덜덜 떨어야했다. 이곳은 사막 위이고 모래들은 뜨겁게 타오르는데, 나는 떨었다. 이내 다른 병사 한 명이 호수를 연결했고 그 호수를 통해 나오는 물을, 장교는 내게 향했다. 물줄기가 내게 쏟아졌다. 나는 발가벗겨진 채로 병사들 앞에서 고스란히 내게 쏟아지는 물을 맞았다. 그들중 몇몇은 키득대며 웃었다. 이내 장교는 병사 한 명에게 뭐라 소리를 질렀고 그러자 그 병사는 달려갔다 와서는 장교에게 뭔가 건넸다. 장교는 그걸 내게 던졌다. 비누였다. 장교는 자신의 몸짓으로 내게 말했다. 비누로 씻으라고, 내 가슴에, 내 다리에, 비누 거품을 내라고 말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남성들의 눈길 속에서 나는 수치를 무릅쓰고 그가 시키는대로 비누칠을 했다. 장교와 그의 병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나는 거품을 냈다. 장교는 다시 손으로 막고 있던 호수의 물을 내게 쏟았다. 내 몸의 비누는 헹궈지고 있었다. 그가 옷을 찢은 이유가 강간이 아니라 몸을 씻는거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했을까. 씻기를 마치자 병사들이 옷을 가져왔고 나는 누구의 옷인지 모를 셔츠와 바지를 입고 그들이 이끄는대로 어딘가에 갇혔다. 병사 한 명이 보초를 섰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일어날 법하다고 모두가 추측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 아까 내 아버지와, 오빠와, 삼촌과 같이 죽었어야 했는데. 보초를 선 병사는 무엇으로부터 나를 지키려는 거였을까. 그것이 나의 안전이 아닌 것에는 틀림없다. 그가 지키는 건 나의 탈출일것이다. 병사들 몇이 차례대로 들어와 나를 강간했다. 비명을 지르고 악을 써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장교가 돌아왔고 나는 장교에게 뛰어가 당신의 부하들이 나를 강간했다고 울면서 얘기했다. 그는 내 옷을 찢었지만 강간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강간 만큼은, 살인을 저지를지언정, 강간만큼은 하지 않으려는 사람일런지도 모른다. 장교는 나를 끌고가 병사들 앞에 세웠다. 그리고 몇 마디 말을 했고 이내 분위기는 엄숙해졌다. 그리고 그가 끌고간 곳은 아까 내가 갇혔던 곳이 아니었다. 병사들이 그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 이동식 침대가 설치된 곳은 장교의 숙소였다. 내 침대가 장교의 침대 조금 옆에 마련되었다. 나는 옆으로 누워 숨을 죽였다. 여전히 나는 두려웠다. 그가 병사들의 강간으로부터 나를 지켜내려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늘 가족을 잃었던 일과, 병사들 앞에서 몸을 씻었던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이제 눈물도 마른 것 같았다. 나는 어떻게 될까. 나는 살 수 있을까. 이대로 사는 건 의미가 있을까. 그들은 나를 어떻게 하려는 걸까. 여기서 일을 시키려는 걸까. 장교가 나를 여기 재운걸 봐서는 더이상의 강간은 없는 거 아닐까. 그는 나를 여기에 두고 갈까. 그들은 나를 죽이려는걸까. 그들은 내게 일을 시키려는 걸까. 어쩌면, 정말 어쩌면, 나를 마을로 데려다주지 않을까. 아직까지 살려뒀다는 건, 앞으로도 살려두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런데 내가 사는 건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어떻게 될까. 내 삶은 그리고 내 미래는 어떻게 될까. 

옆에 누운 장교는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어딘가 아픈걸까. 어딘가 불편한걸까. 지금은 몇시인걸까. 나는 여기서 어떻게 해야하는걸까. 잠을 이루지 못하던 장교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가 내 침대로 왔다. 내 옆에 누웠다. 내가 크게 착각했다. 그는 나를 병사들의 강간으로부터 지키려던게 아니었다.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내 앞에서 총을 쏜 사람인데, 나에게 수치를 안겨준 사람인데. 그제야 나는 내가 살고싶어서 어떻게든 선해하려고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우리 말을 모르잖아, 아마도 내 가족들이 남자니까 두려웠나봐, 그는 나에게 수치를 주기 위해 비누를 던진게 아니야, 그는 아마 더러운 걸 못참는 사람인가봐, 그는 강간은 나쁜거라고 생각하나봐, 이 모든 선해가 나의 억지였다. 다른 남자들의 강간으로부터 나를 떼놓은 장교는 자신을 위해서는 나를 떼놓지 않았다. 그는 내가 비명을 지르자 자신의 손으로 내 입을 막았고, 그 밤, 나를 몇차례나 강간했다. 내가 어느 오두막에 갇혀도 강간을 당하는구나. 희망은 없구나. 나에게 미래는 있을까. 

날이 밝았다. 내 몸도 마음도 지쳤다. 나는 다시 끌려나와 처음 갇혔던 오두막에 갇혔다. 장교는 차를 타고 나갔고, 그러자 또 병사들의 강간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도 불쑥 이렇게 죽는걸까, 생각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장교가 돌아왔다. 나는 다시 장교에게 울며 소리쳤다. 나를 이제 그만 놔달라고, 당신의 병사들은 나를 강간한다고, 제발 나를 놔달라고 울며 소리쳤다. 장교는 병사들에게 무언가 지시했고 그러자 한 병사가 큰 삽을 들고 나왔다. 뭐지? 왜지? 장교와 병사들은 삽을 들고 나를 계속 끌고갔다. 어딘가에 멈췄을 때, 장교는 병사에게 또 무언가 지시했고, 그러자 병사는 가져온 삽으로 모래를 파내기 시작했다. 서서히, 사람 한 명 들어갈 구덩이가 파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아! 날 저기에 넣으려는 거구나, 날 저기에 묻으려는 거구나. 안돼. 나는 살고싶다. 나는 살고싶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나를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총소리가 들렸다. 내가 저기 저 구덩이에 묻히기 전에, 암흑이 찾아왔다. 나는 더이상 이곳에 없었다,



로 진행되는 리뷰를 쓰려고 했었다.

이 책의 1부를 읽으면서 그랬다.

유독 깔끔한 장교가 자신이 하는 일에 명분을 갖고자 최선을 다하는 장면을 읽으면서, 자신의 몸 씻기를 멈추지 않는, 그래서 포로로 잡아온 소녀를 벗겨 비누칠을 시키는 걸 보면서, 그런데 그녀의 말은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나 역시 듣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민간인을 죽이고, 자신의 곪아가는 상처를 들여다보고, 자신의 몸을 씻는 장교를 보지만, 그러나 무방비하게 끌려온 소녀에 대해서는 내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녀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고, 그러니 그 소녀의 이야기를 내가 리뷰로 적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병사들에게도 그리고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고 독자로서 희망을 가졌던 장교에게도 강간을 당하고 이내 죽음까지 당하는 소녀의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삶이, 그렇게 스러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가진 이야기를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로 그리고 더이상의 이야기는 할 수 없는채로 이렇게 끝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써보겠다고 생각했다. 내 리뷰는 소녀의 이야기여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갈등이 없는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자라는 것 하나 빼고는 그녀와 공통점을 가지지 않았다. 그녀는 전장에 있었고, 군인들을 피해 다니는 사람이었고, 눈 앞에서 함께 있던 성인 남성들이 총에 맞아 죽는 걸 봤으니까. 나는 그런결 경험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내가 써도 될까. 그녀는 갇혔고 수치를 느껴야했고 강간을 당했다. 그런 그녀의 이야기를 감히 내가 써도 될까, 라고 갈등했다. 그런데, 이대로 소녀를 그대로 묻어두는 건 세상이 해서는 안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진 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가 그녀의 이야기를 해주길 바랐다. 이야기없이 사라지는 여자는 더이상 두고볼 수가 없다, 고. 그런데,


2부를 읽으면서 아, 내가 오만했구나 생각했다. 

작가가 하고 있었다. 작가가 소녀의 삶을, 소녀의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2부의 다른 화자가 사반세기 전에 일어났던 강간 살인 사건을 알게되었고 하필 그녀가 살해당한 날이 내가 태어난 날짜와 같네, 하면서 그 사건을 면밀히 살피기로 한거다. 그 장소에 가보자, 그 일을 아는 사람들에게 들어보자, 그녀는 자신이 가서는 안되는 위험한 지역으로 차를 끌고 간다. 몇 번의 검문을 거치면서 두려워하고, 그러면서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일을 파보려고 한다. 살해당한 소녀의 사망일이 내가 태어난 날짜와 같다는 사소한 이유로 그녀는 목숨을 담보로 이동하고 또 이동하는거다. 


그러나 그녀가 확인할 수 있었던 건, 25년전의 상황과 지금이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25년전 소녀가 살았던 세상과 크게 달라진 건 없다는 것. 

25년전 소녀가 움직임마다 두려워했듯이, 지금 움직이는 그녀도 움직임마다 두려워해야 했다.

25년전 소녀가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눈 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았듯이, 지금 그녀도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눈 사람들과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이 책은 문학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보여준다.

25년이라는 간극을 한 자리에서 보게 해주고, 숨겨진 이야기를 짐작하게 해준다. 

현재의 상황을 보여주고 이미 사라진 사람을 끝없이 기린다.

그러니까, 내가 처음에 쓰고자 했던 소녀의 이야기를, 굳이 내가 할 필요가 없게끔, 이 책이 저 혼자 다 하고 있었다.

이 책은 내가 왜 문학을 읽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문학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보여주었다.


그 기사는 그 소녀의 이야기를 안 다루었기 때문에 총체적인 진실에 도달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 P92

그건 장애물에 대한 공포에서 생긴 공포라는 장애물이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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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1-09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아직도 멀었나봐요. 아직도 기대를 갖고 있나 봐요.
나는 그 밤에, 장교의 숙소에서 장교가 인간처럼 행동하기를 바랬나봐요ㅠㅠㅠㅠ 내가 바보네요.....

이 책 읽고 싶은데 이렇게 심장이 벌렁거려서 가능할까 모르겠어요.

다락방 2025-01-10 07:59   좋아요 1 | URL
이게 처음에 장교가 주인공으로 나오기 때문에 장교의 행동을 자꾸 선해하고 싶어집니다. 작가의 말을 읽다보면 가해자에 동화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요, 정말 잘 쓰여진 소설입니다. 강간에 대한 잔인한 묘사나 이런게 나오지는 않기 때문에 심장이 그렇게 벌렁거리지는 않을 것 같고요, 그렇지만 읽고나면 아프기 때문에.......... 저는 문학작품으로서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하지만, 그런데 아프긴 할거니까...... 선택은 단발머리 님께 맡기겠습니다. 그러나 놓치기엔 너무나 훌륭한 작품입니다!!

달자 2025-01-11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셨군요 다락방님 ㅠㅠ 전 어쩌면 다락방님이 이 책을 읽고 후기를 써주기를 기다렸는지도 몰러요..: 정말 딱 다락방님과 같은 페이지에 같은 생각을 하며 읽었어요.. 근데 전 마지막장을 덮고 나서 머릿 속이 하얘지더라구요. 후기를, 내 감상을 남기고 싶었는데 동시에 아무 글자도 못쓰겠더라구요… 다락방님은 어쩜 읽고 생각한 대로 글을 쓰시나요 멋져 넘 멋져

다락방 2025-01-14 11:35   좋아요 1 | URL
안그래도 이 책 읽고 달자 님 리뷰를 다시 읽었거든요. 그랬더니 그 리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더 확- 오더라고요.
정말 좋은 책이었어요, 달자 님. 사실 저도 어떻게 리뷰를 써야할지 몰라서 이정도의 글이 나왔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정말 정말 이 책이 좋은 책이며 모두들 읽어봣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