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유학이나 어학 연수의 경험이 전무한 내게는 '외국인 친구'가 없다. 단 한 명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해외 여행을 하면서도 친구도 애인도 잘만 사귀던데, 나에게는 그런 일도 없었다. 그러나 외국에 사는 친구들은 있다. 나를 알기 전에 이미 외국으로 거주지를 옮긴 친구들이거나 나를 알고난 후에 거주기를 옮긴 친구들. 그들은 저 멀리, 미국에 두 명이 있고 호주에 한 명이 있다.


그들이 대한민국이 아닌 그 먼 나라에 가 살기로 한 이유를 나는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한다. 알면 아는대로 모르면 모르는대로, 나는 그들에 대한 극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먼 거리에 있는 만큼 자주 만나지도 않고 또 먼 거리에 있다고 자주 연락하는 사이도 아니지만, 그러나 내 애정의 리스트에 그 친구들은 올라 있다. 내게 몇 명의 남자사람 친구가 있는데 두 명이 그렇게 외국에 있고, 그리고 4개국어 이상을 하는 나의 여자사람 친구가 그 먼 곳에 있다.


오늘은 그중 미국에 있는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가 보내준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과 커피를 놓아두고 찍은 사진이었다.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일요일을 보내고 있노라고 친구는 내게 감사인사를 전해왔다. 마침 엊그제는 내가 보내준 <초급한국어>를 단숨에 읽었노라 덧붙였다. 읽을까 하다가 남자 작가라 넘긴 책이었는데 아주 좋았노라고, 다시 읽어볼거라고 친구는 얘기하고 있엇다. 아마도 내가 보내준 책이 아니었다면 친구는 끝까지 그 책을 읽을 생각을 안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친구가 미국에 정착하고 난 뒤로 나는 꾸준히 책을 보내줬고 이제 친구의 방 책장에 다락방 이란 이름으로 한 칸이 따로 마련될 만큼 내가 보낸 책들이 쌓이고 있으며, 그 책들 모두 친구에게 좋았던 터다. 그 신뢰로 친구는 초급 한국어를 읽었고 아주 좋아했더랬다. 나는, 그걸 알고 친구에게 보낼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랬으니까. 내가 그 책을 읽고 좋았으니까.



'정혜원'의 <나의 독일어 나이>를 읽었다.
















읽기전부터 제목과 표지에서 주는 느낌이 좋을거라는 기대를 갖게 만들었는데, 정말 좋았다.

무엇보다 작가소개를 보고 나는 아직까지 생각하고 있다. 무엇때문에, 어떻게 그녀는 거기로 가 살게 되었는가, 하는 것.

작가 소개에는 이렇게 써있다.



<2018년에 회사를 그만두고 살아갈 환경을 바꾸고 싶어 베를린으로 갔습니다. 독일어를 모른 채 모르는 사람들과 사물, 사건의 사연을 상상하며 베를린에서 1년 넘게 지냈습니다. 2020년부터 독일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언어를 배우듯 도시를 새롭게 알아가며 여전히 베를린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작가소개 중에서



회사를 그만두는 건 아주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도 그만둔 적이 있다. 그러나 살아갈 환경을 바꾸고 싶어 베를린으로 가는 건 드문 일이 아닌가. 왜, 어떻게, 그녀는 베를린으로 가게 되었을까. 무엇이, 어떤 일이 그녀를 베를린으로 이끌었을까. 만약 별자리나 사주를 본다면, '네 인생의 이 시점에 유럽으로 가게 될 것이다' 같은게 쓰여져 있는걸까? 무엇보다 독일어를 알기 때문에 독일로 간 게 아니라, 일단 간 후에 그 나라 말을 익히고 있다니. 이것이야말로 용기 아닌가. 



내 삶은 지극히 평범하다. 초,중,고,대학교를 거쳐서 회사에 들어와 회사 생활을 하고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어떤 아픔이나 극한 행복이 있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어떤 특별함은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극히 남들처럼 살고 있다고 할까. 그러니까 내게 '살아갈 환경을 바꾸고 싶어 베를린으로 갔다'는 것은 아주아주 특별해 보인다. 엄청난 결심으로 보이고, 인생의 축을 바꾸는,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걸로 여겨진다. 인생의 방향을 바꾼다? 내게 그런 일이 있었나? 


물론, 나 역시 내가 바라보는 방향이 있다. 나는 인간이라면 무릇 방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방향이 있다면, 그러니까 저기 앞에 어떤 목적지가 놓여있다면, 이리저리 흔들려도 결국은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란 말이다. 그런데 독일로 간다는 것, 그러니까 그것이 꼭 독일은 아니어도, 내가 아직 언어도 모르는 곳으로 가 살아가기 위해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그 방향을 완전히 전환하는 일이 아닌가. 정혜원은 어떻게 그런 결심을 했을까? 정혜원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 태어난 곳이 아닌 완전히 다른 환경속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한 사람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나의 독일어 나이는 아주 짧은 에세이고 그것이 아주 커다란 흠이었는데, 그런데 이 짧은 에세이의 더 짧은 작가소개를 읽고 계속 그 생각이 난다. 어떻게, 살아갈 환경을 바꾸고 싶어서 독일로 갈 수 있었을까? 그것은 오랜 시간 그녀의 꿈이었을까? 그녀가 정해둔 인생의 어느 한 단계를 순차적으로 밟아나간 걸까? 아니면 아예 운이 바뀌어버린 걸까? 운명의 전환 같은 것이 일어난걸까? 왜 어떤 사람에겐 그런 선택이, 그런 결정이, 그런 방향 전환이 일어나는걸까? 나는 자꾸, 거듭 생각한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든지 말든지, 일요일 밤은 가고 있다. 잘도 가고 있구먼.

하긴, 일요일이 언제 내 사정 따위 봐준 적 있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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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7-09 2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초급한국어> 땡기네요. ㅎ 이 책도 좀 궁금하구요. 다부장 님 아니면 궁금도 안 했을 책들-

저도 집사2하고 이 어처구니 없는 나라 떠서 다른 나라에서 살 궁리 안 하는 건 아닌데 그게 참 쉽지 않네요. 그래서 이 삶의 터전을 아예 바꿔버린 사람들의 그 용기가 참 대단하단 생각이 들어요.

부장님의 베트남행 응원합니다~~

다락방 2023-07-10 08:59   좋아요 2 | URL
<초급 한국어> 좋았어요. 막 별 다섯 좋은건 아니고 별 넷 좋았어요. 한국 남자 작가들 꼴보기 싫은데, 그런데 초급 한국어는 달랐습니다.

저는 언제고 낯선 나라에서 살아보고 싶다, 고 생각한 적은 수차례이지만, 그것이 그곳에서 죽을때까지 사는 걸 의미하진 않았어요. 결국은 이곳으로 돌아오는 일에 대해 생각했고 또 아예 이곳에 발을 끊는 것도 아니었어요. 저는 다니러 가고 다니러 오는 그런 삶을 생각했어요. 아마도 저는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베트남에 정착하면 연락할게요. 꼭 오셔야 하는겁니다!! ㅎㅎ

잠자냥 2023-07-09 2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니….?


그래 자라… 6시 20분까지 출근하잖니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07-10 08:59   좋아요 1 | URL
이거 자주 해야겠어요. 일요일 밤마다.

자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23-07-10 0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10 0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록비 2023-07-10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 친구에게 책을 보내 주시다니 무한감동이네요 ㅠㅠㅠㅠ 저는 미국생활 xx년 동안 가족이나 친구에게 책 한 권 받아본 적이 없네요 ㅠㅠㅠ

다락방 2023-07-10 09:01   좋아요 1 | URL
오, 초록비 님도 미국생활을 오래 하셨군요! 저는 친구가 캐나다에 머물 때 캐나다로 책을 보낸 적도 있습니다. ㅎㅎ
먼 곳에 있는 친구에게 책을 보내는 일을, 제가 좋아합니다. 후훗.
초록비 님, 다시 외국에 가시게 된다면 말씀하세요. 제가 책 한 권쯤은 얼마든지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초록비 2023-07-10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분들 복받으셨네요! 다락방님도 복받으실 거예요. 외국에서 받아보는 한국어책 한 권이 얼마나 소중한지 한국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것 같아요.

다락방 2023-07-11 14:00   좋아요 1 | URL
그래서 친구도 보내주는대로 바로바로 책을 읽는 것 같아요. 제가 보내준 책이 친구에게도 좋게 읽히고 또 그 시간을 즐거워하니 보내는 자로서의 보람도 아주 큽니다. 후훗.

거리의화가 2023-07-10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해요. 어떤 도시든 여행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그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이어지지는 않더라구요.
다만 한국에서 살면서 지칠 때는 좀 있어서 그럴 때는 진짜 어디 뜨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현실적인 이유로 결국 내려놓게 됩니다. 언어는 힘들겠지만 그곳에서 정착해야 한다면 배워야 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 곳에 사는 이유와 계기가 중요할텐데 그 책에는 그 이유가 안 담겨 있나보네요. 그게 저도 궁금한데요ㅎㅎㅎ

다락방 2023-07-11 13:59   좋아요 0 | URL
저는 아주 오래전부터, 어릴 때부터 뉴욕에 살고 싶었는데요. 뉴욕에 여행다녀오고나니 그 마음이 사라지더라고요. 그건 뉴욕이 더이상 매력없는 도시라거나 해서가 아니라, 물가를 제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어요. 제가 지금 간다면 외국인 노동자에 이민자가 될텐데 그렇다면 고액 연봉자는 당연히 될 수 없을 것이고, 근근이 먹고 사는 정도로는 굳이 뉴욕에 살 필요가 있나 싶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살아보고 싶었던 곳은 뉴욕이었는데 그 꿈은 접었습니다.

그렇지만 여행하다 아름다운 도시를 거니노라면, 여기에 살아보면 어떨까, 좋지 않을까 싶기는 해요. 그러나 그렇게 상상하는 순간에도 거기에서 오래오래를 꿈꾸진 않았던 것 같아요. 좀 지내다가 어쨌든 다시 내가 태어난 한국으로 … 이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아마도 대한민국에 짱박히지 않을까 하는데 말입니다. 하하하하.

저자는 독일에서 살아보기를 결정하기 전에 독일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더라고요. 아예 모르는 곳으로 간 게 아니라 분위기를 알고 간 것이긴 합니다. 아, 쓰다보니 저도 어딘가로 가고 싶네요. 훌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