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지만 다른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는 조연이 되기도 하고 엑스트라가 되기도 한다. 물론, 씬스틸러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다른 사람 인생의 주연이 되고 싶기도 하지만 오디션을 보고 보기 좋게 탈락하기도 하고, 가까스로 캐스팅이 되었지만 금세 하차하기도 한다. 내가 주인공이 되지 못해 안타깝다고 발을 동동 구르거나 뒤늦은 후회를 해본다 한들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생각과 삶이 있으므로 내 후회 따위 간단히 무시하고 다른 사람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등장했던 second best는, 나는 조연이라고 생각했다. 주연인줄 알고 갔는데 조연이었던, 다른 사람의 삶. 주인공이 되고 싶었지만 주인공이 될 수 없었던 삶.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조연이 결코 연기를 못해서가 아니라는 걸, 재능이 없다거나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걸. 모든 드라마나 영화에는 그리고 내 인생에서도 주연이 필요하고 조연이 필요하다. 그래야 풍성한 한 편의 극이 완성된다.
로리는 그런면에서 볼 때 혼자 극을 이끌어가기 부족한 사람으로 보였다. 이미 극을 잘 이끌어가고 있는 사라를 향한 질투와 부러움을 가진 채로 저예산 영화를 찍어나가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저기 주연 배우가 눈 앞에 있는데도 제대로 캐스팅하지도 못하고 다른 극에 넘겨준다. 어쩔 수 없지, 하는 체념이 로리에게 잇었다. 이미 다른 극에 출연중인 배우를 중간에 빼앗아 오는 건 도덕에 어긋나니까. 그런 로리가 오스카라는 어마어마한 주연 배우를 만난다. 전세계적으로 인기 있고 찍었다하면 흥행하는 보장된 주연 배우. 그런 배우를 캐스팅할 수 있다니, 다행이라고 기뻐하고 이 극을 제대로 이끌어나갈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러나 로리가 찍는 영화에는 이렇게나 화려한 배우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저기 저 잭, 저 배우가 필요했다.
사라가 자신이 잘할 수 있는게 뭔지 알고 적절한 배우가 누구인지 바로바로 캐스팅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로리는 느리게 가는 사람이다. 로리에게 모든 일들은 느리게 진행된다. 극을 구성하는 것도 그리고 주연을 캐스팅하는 것도. 로리가 한 편의 근사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행착오도 필요했다. 천재적으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은 이른 나이에 전세계 동시개봉 영화를 찍어내기도 하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한 편의 영화를 겨우겨우 상영하기도 한다. 그러나 흥행이라는 것이 그 극이 성공했다는 것을 반드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만든 사람에게는 흥행하지 못했더라도 딱 이정도의 영화가 후회없는, 바로 내가 생각한 그 영화일 수 있다.
나는 오스카라는 조연이 그리고 사라라는 조연이 아까웠다. 각자의 삶에서는 충분히 화려한 주인공이 되는 사람들인데, 어느 순간 본인의 의도와는 달리 다른 사람의 삶에 조연이 된다. 사라는, 씬 스틸러가 더 적절할 수도 있겠다. 로리의 인생, 그리고 잭의 인생에서 이들은 조연이고 씬 스틸러이다. 십년 이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로리와 잭은 처음 만난 순간 강렬함을 느꼈으나 서로를 찾지 못하던 시간이 있었고, 그렇게 친구의 애인, 애인의 친구로 만나 어쩔 수 없이 친구가 되었고, 그리고 각자의 사랑을 해나가고, 일을 찾고, 거주지를 옮긴다.
로리의 인생을 놓고 보면 그리고 잭의 인생을 놓고 보면, 그 십년 이란 시간은 그들에게 필요했다. 천천히 자리잡아 가는 동안 상대를 알아나가는 일이 필요했고, 각자의 인생을 살아보는 것도 필요했다. 시행착오도 필요했다. 내가 사랑하는 너라는 사람을 더 잘 알아가는 동안 다른 사람을 만나 정착하려고 하는 일, 사랑을 느끼고자 했던 일들을 시도하는 것들은 그들의 인생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그들이 그동안 만난 사람들에게 딱히 악의를 가지고 사랑을 한 것도 섹스를 한 것도 아니었다. 순간순간에는 그 감정에 이끌려 사랑을 하고 섹스를 하고 결혼을 했다. 그리고 잘 살아보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맞지 않는 배우를 캐스팅한 느낌이 내내 그들에게 있었다. 그러니 그것은 잘 될 수 없었다. 미안해, 여기까지 촬영해왔지만 너는 나의 극에 어울리지 않아. 그들은 그렇게 만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라는 말은 잘못됐다. 멈춘 순간, 여기까지 걸어왔던 내가 있으니까.
사라는 잭을 주연으로 삼았다가 잭이 주연이 아님을 알고 다른 배우를 캐스팅한다. 이번에야말로 자기 인생에 맞춤한 배우를 캐스팅했다. 게다가 무대도 옮겼다. 그랬더니 그전보다 훨씬 극이 나온다. 잘된 일이다. 그래서 사라는 로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아름다운 곳으로 옮겨서 너도 살면 어떻겠니, 매일 바다를 보는 삶 좋지 않니, 게다가 내가 너의 이웃이 되잖니. 휴가를 맞이해 사라가 있는 호주에 와서 매일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사라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러나 로리는 여기가 자기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말한다. 여긴 너의 장소이지, 내 것은 아니야. 그러자 사라가 말한다.
'Where's yours?' she says, 'Because I'll tell you what I think. Your place isn't somewhere. It's someone. I'm here because it's where Luke is. You'd have gone to Brussels if Oscar was your place.' -p.401
너의 세상은 어딘데? 내가 생각하는 걸 말해줄게. 너의 장소는 어딘가가 아니야, 누군가야. 내가 여기에 온건 여기가 루크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야. 만약 오스카가 너의 장소였다면 너는 브뤼셀에 갔을거야.
그렇다. 사라는 호주에 왔다. 영국에 살다가 호주로 왔다. 루크가 호주로 와 살지 않겠냐고 했고, 사라는 여기냐 루크냐 선택하라 하면 루크를 선택하겠다고 이 먼 다른 나라로 와 살고 있다.
오스카도 로리에게 브뤼셀에 가 살자고 말했다. 승진을 했고 이것은 본인의 커리어에 좋은 일이고 그러나 브뤼셀 풀타임 잡이니, 우리 브뤼셀에 가 살지 않을래? 그러나 사라는 거절했다. 아니 갈 수 없어. 나는 엄마가 사는 이 나라에 있고 싶고, 여기에 내 직업이 있어. 오스카가 자신의 벌이로도 먹고 살기 충분하니 너는 일을 안해도 되지 않냐고 한 것도 로리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사라에게도 엄마가 사는 나라가 있고, 사라에게도 그곳에서의 직업이 있었다는 것을. 사라가 가진 게 없어서 호주로 간 게 아니라 호주에 더 갖고 싶은게 있어서 갔다. 로리는 브뤼셀에 있는게 더 탐나지 않았다. 그보다는 머무르는 쪽을 택했다.
나는 사랑을 움직임이라고 생각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사랑한다면 움직인다. 조카들을 만나러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가는 것처럼, 친구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처럼, 거기에 네가 있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 그것이야 말로 사랑의 큰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한다면 반드시 움직이는 것일까? 당신이 나의 장소이므로 나는 그곳으로 가는것, 그래야만 당신이 내 장소로 인정받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참일까? 아주 큰 확률로 여기보다 당신이 좋다면 움직이는 거야 사실이겠지만, 그러나 여기에서 거기로 움직이는 데에는 그 커다란 마음 외에도 다른 것들이 더 필요한 건 아닐까. 이를테면 그 시간, 그 당시의 자신에게 있는 상황과 환경 같은 것. 어떤 것들은 어쩔 수 없이 내 발을 묶어놓는 게 아닌가. 만약 브뤼셀로 오라는 사람이 오스카가 아니라 잭이었다면, 그랬다면 로리가 그 때 바로 오케바리 하고 움직였을까? 나는 그 때의 로리에게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로리에게는 결단을 내릴 용기와, 사랑이 무엇인지 배울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이 모든 것들이 모두 함께 만나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나는 당신에게로 갈 수 있는 건 아닐까.
어제 친구와 저 문장에 대해 얘기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가 머무르는 장소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우리가 머무르는 정착지가 될까. 종착역이 될까. 친구는 자신이 읽는 로맨스 소설에서도 연인이 끌어안으면서 You're my home 이라 말하면서 끝이 난다고 했다. 현실에서 우리가 어떻게든 퇴근후 돌아갈 공간이 필요해 집을 마련하고 싶은 것처럼, 정서적으로도 고단함을 쉬기 위해 그리고 더 충족시키기 위해 우리는 당신이란 집을 찾게 되는걸까?
나 역시 당신은 나의 집인것 같아, 라고 생각한 적이 있고 말을 한 적이 있다. 집이라면 그러니 평생 살면 좋았을텐데, 집이라고 느끼면서도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의 집이었는데. 그런데 헤어졌다. 왜냐하면, 내게는,
어마어마한 사이즈의 역마살이 있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