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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증거
비그디스 요르트 지음, 유소영 옮김 / 구픽 / 2021년 8월
평점 :
'베르기요트'는 23년전에 가족들과 안보는 사이가 되어 엄마아빠는 물론 여동생들과도 만나지 않고 있다. 엄마아빠는 소유하고 있는 오두막을 베르기요트의 동생 둘에게 주기로 했다는데 이에 오빠인 '보드'가 반대하고 나섰고, 그러면서 베르기요트가 이 가족과 왜 멀어졌는지, 부모님의 재산을 나눠갖는데에 왜 아무 관심도 갖지 않으려 하는지가 천천히 드러난다.
아마도 중간 지점에 나오겠지, 했지만 베르기요트의 '아버지'가 나오고 '다섯살'이 나오는 순간부터 불안했다. 대뜸 짐작가는 것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내 짐작에 그치기만을 바랐다.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 일이 그녀를 가족들로부터 멀어지게 한 게 아니기를 바랐다. 그러나 우리들의 아버지는, 오, 어김없이 어떤 자식들을 학대했다. 직접적 학대를 당한 자식이 둘이라면 그렇다면 나머지 둘은 그 학대를 직접 당하지 않기 때문에 괜찮았던 걸까. 아니, 넷중 둘이 학대당했다면 나머지 둘 역시 다른 형태의 학대에 노출된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언니를 학대하고 그 언니가 잘못될까봐 내내 언니만 돌보았기 때문에 뒤로 밀쳐졌던 동생들이 거기 있었으며, 그래서 언니가 가족들로부터 멀어졌을 때 부모님의 곁에서 부모님과 늘 함께하던 것도 동생들이었으니까. 그러니 아동학대의 피해는 단순히 그 학대의 직접적 피해자가 아니라 다른 형제들 모두에게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아동학대를 다루고 있다고 해서 자극적으로 그것을 묘사한다거나, 그 고통 때문에 펑펑 눈물을 쏟게 되는 작품은 아니다. 폭력에 노출된 아들은 이제 예순이 다 되었고 베르기요트 역시 오십대에서 시작하는 얘기인만큼 어린 시절의 그 일이 당사자들에게 얼마만큼의 영향을 끼쳤는지, 그것이 그들의 삶에 어떤 식으로 늘 항상 함께 있었는지를 얘기한다.
아동학대는 생존당사자에게 고통이지만 가족에게는 불편한 얘기가 되어 입밖으로 내기가 꺼려지며 설사 입밖으로 낸다해도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베르기요트가 괴로웠던 것은 자신이 당한 학대에 더해 자신의 말을 믿지 않고 자신을 사이코패스로 몰고 거짓말쟁이로 몰고 극본을 써낸것으로 모는 다른 가족들 때문이었다.
가해자는 아빠이지만 그러나 엄마에게 다른 삶이 가능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예쁜게 능력인 여자가 아니라, 경제적 능력이 있었다면 혹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면, 그래서 남자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었다면,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아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 남자에게서 탈출하는 게 저 남자여야 하는게 아니라, 이 남자에게서 탈출해서도 다른 삶을 살아낼 가능성이 있었다면, 그것이 가능한 여건이었다면 그러면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야기는 다시 쓰여졌을 것이다. 애써 없던 일로 여기며 살아가지 않아도 되었을테니까.
가장 아픈건 학대가 주는 고통보다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받고 싶었던 어린아이가 바로 그 때에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엄마 아빠가 나를 어떻게 대해도 나는 그저 사랑받고 싶어서 그렁그렁하는 어린아이가 거기 있었고, 그 아이는 자라서 부모로부터 거짓말쟁이 취급을 받는다. 이 생존자의 삶은 남들처럼 가정을 이루고 직업을 갖고 연애를 해도, 자꾸만 자꾸만 부저실듯 위태롭다.
아주 오래전에 텔레비젼을 통해 아동성폭력 피해자에 다룬 프로그램을 보았다. 생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고 한 까닭은, 생존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린시절에 당한 성폭력으로 성인이 되어 자살했기 때문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왜 이제서야 죽는거냐고, 여태 잘 버텨왔으면서 왜 이제서야, 라고 말을 하지만, 여기까지 버티려고 그 사람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를 악물었을까. 나는 그 프로를 보다가 소리내어 울었다. 학교를 다니고, 직업을 갖고, 연애를 하고, 자식을 낳는다고 해서 그 모든 것들이 없던 일이 되지도 않으며, 그렇게 쉰이 되고 예순이 되어도 풀어내지 못한 것이 차마 바깥으로 드러내지 못한 것이 그 안에 있다. 베르기요트는 쉰이 넘어서, 남들이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라고 말하는데도 기어코 말을 꺼낸다. 지금이 아니라면 대체 언제, 언제 말하란 말야? 언제 어디서 말을 해야 내 말은 신뢰를 갖게 되지?
당시의 증거는 베르기요트에게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삶 전체가 바로 그 증거엿다.
그녀의 삶이 바로 그 증거라고 그녀의 딸이 증언한다.
고통은 인간을 좋은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다. 보통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 누가 더 많이 고통받았나 논하는 것은 유치한 짓이다.
학대당한 아이들에게는 트라우마가 남는 경우가 많고, 그들의 감정적 내면은 파괴된다. 학대자의 사고방식과 학대 방식을 물려받는 일도
흔하다. 그것이야말로 학대의 가장 고약한 유산이다. 학대는 학대당한사람을 파괴하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을 어렵게 한다. 고통을
누군가에게, 특히 피해자에게 유용한 뭔가로 변화시키려면 강한 노력이필요하다. - P268
두껍지 않은 책인데 책장을 넘기는 것에는 속도가 붙지 않는것은 한 줄 한 줄 똑바로 읽어내려가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자극적으로 진행되지 않아 격렬한 감정을 가져오지는 않지만,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트라우마를 건드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아주 잘 쓰여진 똑똑한 책이다. '비그디스 요르트', 작가의 이름을 기억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