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나는 '윌라 캐더'의 《로스트 레이디》를 읽고 페이퍼를 썼더랬다. ☞ https://blog.aladin.co.kr/fallen77/12389775
야비한
청년 '아이비'가 남편 없는 '포레스터 부인'을 마치 제것인양 함부로 대하고 접근하는 것에 대해 언급했었다. 남편이 있을 때는
차마 그러지 못하다가 남편이 없어지고 나니까 제멋대로 만지는 부분에 대해서. 한 여자를 한 인간으로 동등하게 대우하는 게 아닌,
남자의 소유물로 보는 시선. 온전한 인격이 아닌 이제 내가 건드려도 되는 성적 대상. 나는 남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너무 싫고
찌질하고 야비하다. 한 여자의 육체는 그 여자 자신의 것이다. 저 남자의 것이 아니니, 이제 그녀의 곁에 그녀의 주인이 없으니,
내가 주인이 될 수도 있고 막 만져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 비열하지 않은가.
그리고 '캐롤 페이트먼'의 《여자들의 무질서》에서 나는 이런 부분을 만난다.
내가
처음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사회계약이 가부장적인 계약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
계약이 아버지들-그들이 동의함으로써 가족이 묶여지는 것이라고 여겨지는-에 의해 맺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범주가 아무나와
누구나를 뜻하는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개인들'은 사회계약을 맺지 않는다. 거기에 여자들의 몫은 없다: 자연적 주체들로서 여자들은
[계약에서]요구되는 수용력과 능력을 결여한 것이다. 이 이야기들에서의 '개인들'이란 남자들이지만 그들은 아버지로서 행위하지
않는다. 결국 이 이야기들은 아버지의 정치적 권력이 패퇴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남자들은 더이상 아버지로서의 정치적인 장소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들은 남편들이기도 하며-로크의 친구 티럴(Tyrrell)은 아내들이 '남편들에 의해 체결된다'라고 적고
있다-또 다른 관점에서, 사회계약에 참여하는 자들은 아들들 내지는 형제들이기도 하다. 계약은 형제들-혹은 형제애적
집단(fraternity)-이 맺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형제애가 자유와 평등과 함께 손에 손을 잡고 출현한 것도, 형제애가
정확하게 그것이 말하는바- 즉, 형제들 간의 사랑(brotherhood)-를 의미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p.72-73)
사회계약의 기준이 되는 것도, 체결하는 것도 남자들이며 여자들은 그 계약 내에서 왔다갔다 이동한다. 본인의 의지가 아닌, 자신을 소유한 남편의 의사로.
《로스트
레이디》에서 포레스터 부인이 행복하고 밝고 여유롭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부유한 남편 덕이었다. 그녀는 부유한 남편 덕에 좋은
집에서 좋은 풍경을 보고 좋은 것을 먹으며 누군가가 시중을 들어주는 삶을 살았고, 그 여유로운 삶은 그녀를 한층 더 빛나게
만들어주었다. 마찬가지로 그녀가 쇠약해지는 것, 우울해지고 침울해지고 빛이 사그라드는 것도 역시 아픈 남편 그리고 종국에는
부재하는 남편 때문이었다. 남편이 있었을 때 그녀는 모두가 받들어주고 존중해주는 여자였는데, 남편이 없는 여자는 이제 함부로
만져지는 여자다. 이런 상황에서 여자가 부유한 남편을 만나고 싶어하는 것이 여자의 잘못일 수 없다. 그나마 나은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여자는 남편의 힘을 빌어 좀 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해야 했던 것. 그러니까 여자가 더 나은 삶을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
존중 받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모두 여자를 소유한 남자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만약 사회계약의 당사자가 남자이듯 여자이기도 했다면 여자들의 삶은 그전에도 지금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며칠전에는
여자들의 무질서를 읽기 시작하면서 교육의 기회가 여자들에게 닫혀 있었다는 것에 대해 언급했었는데 ☞
https://blog.aladin.co.kr/fallen77/12383051 여자들의 무질서를 계속 읽다 보면, 아아, 내가
지적한 바로 그 지점이 언급된다.
로크는 남자(남편)의 힘과 능력이 아내들의
복종에 대한 자연적 기반이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가부장적 자유주의 안으로 흡수되는 이 관점은 자유주의 여성주의를 위한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여성주의자들은 힘으로부터의 논변을 오래전부터 비판하기 시작했고, 비록 오늘날에도 이 주장이 들려오지만, 남성의
정치적 권리의 규준으로서 힘에 의존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점점 그럴듯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동시대의 자유주의 여성주의자들은 메리
에스텔과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같은 훨씬 더 앞선 작가들의 안내를 따르며, [남자들에 비해] 모자라다고 여겨지는 여자들의 능력과
수용력이 자연의 사실이 아니라 결함이 있는 교육의 산물이라고, 고의적인 사회적 장치의 문제라고 공격했다. (p.79-80)
오늘 성경읽기는 민수기 27장-29장 이었다. 이런 구절이 나왔다.
아버지도 돌아가셨는데 우리가 아들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기업을 주지 않으면 어떡하냐, 우리에게도 기업을 다오, 요구하는 여자가 나온다. 오!! 구약 성경을 읽다보면 기업을 준다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검색해보니 가나안 땅을 주는 걸 일컫는다고 한다. 아버지가 없다고 아버지에게 예정된 땅을 아버지의 형제들에게만 주고 딸들에게 주지 않는다면 딸들은 어찌 살란 말인가. 우리에게도 다오, 라는 딸의 요구는 정당했고 그 말이 맞지 인정하고 여호와는 그렇게 한다. 다만, 여전히, 딸에게 땅을 주기 위해서는 '아들이 없으면'이라는 전제가 붙는다.
아들이 없으면, 남자가 없으면, 그러면 그 때 네 차례가 와.
'세스 그레이엄 스미스' 원작의 영화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줄거리를 거의 가지고 왔는데 배경에 좀비를 추가했다. 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넷을 비롯한 그녀의 자매들은 좀비와 싸우는 전사들로 나온다. 오만과 편견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이 집안은 딸만 있고, 딸에게는 아버지의 재산이 상속되지 않는바, 엘리자베스의 엄마는 딸들을 좋은 집에 시집 보내려고 애를 쓴다. 부자 사위 만나려한다고 속물이라고 어떻게 그녀를 비난할 수 있을까. 애당초에 여자로서는 돈을 만들어낼 수도, 벌 수도 없는데.
영화속에서 엘리자베스의 아버지가 죽으면 그 재산은 딸들이 아닌 먼 친척 남자에게로 간다. 그러니 마땅히 딸들에게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딸들은 도대체 어떻게 아버지의 재산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민수기에서처럼 '그것은 부당하오 나에게 주시오' 라고 하면 '네 말이 맞다' 하고 줄 수 있는게 아니라, 그 시대의 룰을 따라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을 먼 친척 남자와 결혼하면 된다. 하아- 답답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내 아버지의 돈은 딸인 나에게로 올 수 없다. 그 돈을 쓰고자 한다면 본 적도 없는 저 먼 친척 남자랑 결혼해야해. 대환장파티...
자, 여기서 인도의 지참금 얘기를 들여다보자.
여성들은
결혼할 때 부모의 집을 떠나 매우 멀리 떨어진 남편의 가정으로 들어간다. 젊은 여성들은 일단 결혼하고 나면 죽은 뒤에라야 남편의
집을 떠날 수 있으며 모든 고통과 굴육을 참아내야 한다는 권고를 받는다. 며느리는 새 가정에 적응하려면 늘 최선의 행동을 해야
한다. 며느리는 시가 식구들에게 고분고분 순종해야 하며, 자신이 소유한 물건에 대해서도 사심 없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남편의
가족은 현금은 물론 특별히 지참금 용도로 제작하거나 구입한 보석 및 가정용품을 받는다. 지참금을 딸이 받는 상속 재산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Goody 1976).
이와
관련해서 집고 넘어가야 할 두 가지 중요한 사항이 있다. 첫째, 지참금은 신부가 아니라 신랑 가족에게 전달된다. 시부모는
지참금의 분배에 관한 완전한 통제력을 갖는다. 둘째, 내가 아는한, 토지는 절대 지참금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여성에겐
재산이 없다. 이른바 그녀의 재산으로부터 아무런 부를 창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젠더에 따라 특정된 성격이
만들어진다. 남자들은 국가 경제에 공헌하고 생계비를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소중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여자들은 남자에게 의존하고, 외부세계에 대해 무지하며, 자녀양육과 가사에 몰두한다. 그런 이유로 여자들은 지나치게 과소평가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바로 지참금 마녀 사냥에서 핵심이 되는 문제다. -페미사이드, p.231-232
어디든 어느 시대든, 사회계약 당사자는 남자대 남자였으며 여자는 그 안의 부속물일 뿐이었다. 이 소유에서 저 소유로 넘겨진다. 그러므로 세상에 땅이 존재하고 화폐가 존재하여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넘겨질 때, 거기에서 여자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다. '여자'가 시집가기 때문에 아버지는 지참금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남자인 아버지'의 손에서 '남자인 남편(혹은 그의 가족)'에게 전달된다. 그 돈은 결코 '시집가는' 당사자 여자의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 땅과, 화폐와, 재산이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그것은 여자들의 몫이 아니었다. 여자들은 여기에서 저기로 보내지는대로 혹은 데려가는대로 이동하면서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아이를 낳고 만져짐을 당한다. 나는 왜이렇게 로스트 레이디의 그 장면이 잊혀지지 않을까. 그 때 받은 그 당혹감, 억울함, 분노, 슬픔이 내 안에 너무 깊숙하게 박혀버렸다. 결국은 '싫다'는 나의 의사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리는 그 지점이 싫다. 아련했던 그 책 전체 분위기를 두고 나는 포레스터 부인의 남편을 잃고난 뒤의 무력감만이 너무 강하게 남았다. 비열한 놈을 견뎌야 하는 그 순간이.
요즘은 매일 출근해서 스트레스가 나를 잠식하는 걸 느낀다. 보통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책을 잘 못읽고 있지만 그래도 읽을 때면 읽는 순간이 너무 좋아서, 책만 읽으면서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회사고 뭐고 다 때려치고 책상에 앉아 옆에 책을 쌓아두고 차곡차곡 읽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다 뭔가 생각나면 다른 책 찾아보기도 하고 또 뭔가 생각나면 글로 쓰기도 하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만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밥벌이에 투자하고 있으니 이게 뭐람.
너무 스트레스가 눌러 담겨져 있어서 힘들다. 어제는 밤 아홉시부터 잤다. 아무것도 할 의욕이 없어서. 물론 열한시에 깨서 새벽까지 잠을 못자고 스트레스에 압박 당하고 있었지만..
보통 힘들때 누가 생각나거나 하지는 않고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까, 어떤식으로 이 길을 지나칠까 생각하는 편인데, 오늘은 힘드니까 사람 생각이 났다. 사람은, 내 경우에, 좋거나 기쁠때, 스스로가 자랑스러울 때 생각나곤 하는데, 힘든데 생각나니까 더 힘들다. 우먼스 타이레놀이 사무실 책상에 있는데 스트레스에 한 알 먹을까.
여자들의 무질서 2장을 읽는 중인데 어렵다. 어려워도 선택해서 같이 읽기로 약속했으니까 계속 도전해보도록 하겠다.
책..살까? 또 신간 소식도 들려오고 막..
계약 이론가들의 ‘승리‘는 정치적 권력으로부터 가부장 권력을 분리시키는 것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성적 통치를-필머와 같이-아버지의, 다시 말해, 정치적인 통치 아래 포함시킬 수 없었다. 그 대신 사회계약 이야기는 성적 내지는 부부적 권리를 자연적인 것으로 선언함으로써 기원적인 정치적 권리를 은폐시킨다. 양성 각각의 자연본성으로부터 여자들에 대한 남자들의 지배가 따라 나오는 것으로 여겨지며, 루소는 이 주장을 『에밀』5권에서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 P70
여자들은 여자들이 종속 안으로 태어나며 그들의 종속이 자연적이며 정치적으로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개인주의‘와 ‘보편주의‘의 모순을 거의 단번에 포착했다. 예를 들어, 17세기 말 메리 애스텔(Mary Astell)은 ‘모든 남자들이 자유롭게 태어났다면, 모든 여자들이 노예로 태어난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질문했다. - P71
아담의 최초의 지배 혹은 정치적 권리는 다른 남자가-아들이-아닌 여자에 대한 것임을 공언한 뒤, 필머는 부부적 권리를 부성의 권력 아래로 포섭한다. 이브와 그녀의 욕망들은 아담에게 종속되어 있지만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통치의 기원적인 수여와 전-인류의 아버지 안에 위치하고 있는 모든 권력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다‘라고 필머는 계속해서 말한다. 창세기의 성경 이야기에서 아담과 동물들이 땅 위에 자리 잡은 이후에 비로소 이브가 창조된다는 것을 상기하라. 더 나아가, 그녀는 처음부터(ab initio) 창조된 것이 아니라 아담으로부터(from) 창조되었다-따라서 아담은 어떤 의미에서 그녀의 부모이다. 필머는 모든 정치적 권리를 아버지의 권리로서 취급할 수 있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가부장적 아버지가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의 창조적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 P6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