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꾸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처음 세상에 알린 것도, 웹하드 카르텔을 폭로한 것도, 소라넷을 폐지시킨 것도 모두 여성이었다. 디지털성범죄라는 단단한 장벽에 균열을 내기 위해 수많은 여성이 무던히 돌을 던졌다. 정부 대책은 늘 한발 늦었다. 여성들이 밀고 당기면 겨우 한 발 떼는 식이었다. 불법촬영물 유포가 논란이 된 지 2년 만에 정부는 디지털성범죄 피해방지 종합대책을 내놨다(2017년 9월), 전국 17개 지방경찰청에 사이버성폭력 수사전담팀이 만들어졌다(2018년 3월).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가 문을 열었다(2018년 4월), 촬영물을 동의 없이 유포하면 처벌하는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2018년 11월). 웹하드 카르텔 방지 대책을 내놨다(2019년 1월). n번방 방지법이 통과됐다(2020년 4·5월). 그리고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안이 확정됐다.
(2020년 9월).
디지털성범죄에 맞서다 하예나와 서승희는 활동가가 됐다. 하예나는 이후 2016년 DSO(디지털 성범죄 아웃)를 꾸려 2019년까지 활동했고, 서승희는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를 만들어 피해자를 지원한다. 백가을은 디지털성범죄 연구자가 돼서 지속적으로 여성에 대한 잡지를 만들고 있다. "우리 역할은 이후에 나타날다른 팀들이 전력을 다할 수 있도록 길을 닦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활동할 수 있는 것도 이전에 활동한 팀들 덕이다."(리셋) 여성의 연대로 세상은 바뀌고 있다. (장수경 기자) - P16

음란물, 국산 야동은 없다. 그것은 디지털성폭력‘이다. 그의 운동은 이 한마디로 집약할 수 있다. 그는 온라인 음지에서 벌어지던폭력을 오프라인으로 끌고 나와 기어이 드러나게 했다. "이 영상이진짜라는 보장이 있냐?"는 수사기관의 폭력과 부딪히며 ‘대한민국을 상대로 싸웠다. 그리고 불법영상 공유와 성폭행 모의가 이뤄지던 사이트 소라넷을 폐지시켰다. 그는 불법영상물을 쫓는 하이에나, 하예나 전 디지털성범죄아웃(DSO Digital Sexual CrimeOut) 대표다.
하 전 대표에게 평소 팬심을 가지고 있었던 ‘추적단 불꽃’은 그를 만나 여러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스치는 가을바람이 유난히 따스하던 지난 10월29일, 서울의 한 맛집에서 만났다. 식당 문 앞에서서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은 게 무색할 만큼, 우리는 3시간 가까이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냈다. 가해자들의 가해 행위를 이야기하며분노로 달아오르기도 했지만, 이따금 20대의 일상을 나누며 깔깔웃기도 했다. (추적단 불꽃) - P18

마녀의 이름과 나이, 직업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의 활동은 대부분 안다.
마녀는 2014년부터 ‘재판 방청 연대를 시작했다. 끈질기게 성범죄를 판단하는 사법부를 감시한다. 이제 많은 성범죄 재판에서사법부를 지켜보고 피해자와 연대하는 여성들이 있다. eNd도 그중 하나다. 마녀는 마모되지 않고 끈질기게 활동하고 싶다. 우리도그러려고 한다. 마녀는 피해자들이 부디 살아주기를 바란다. 우리도 간절히 바란다.
우리, eNd팀은 마녀의 이름과 나이, 직업을 모른다. 대신 더 많은 것을 마녀한테 배웠다. 어떻게 연대해야 할지, 어떻게 지속할 수있을지,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할지. 마녀는 최근 연대자 D(이하 D)로활동명을 바꿨다. 마녀로 일궈온 활동이 마녀라는 이름에 갇히길원치 않았다. 언제든 대체 가능한, 젊은 여성의 연대 활동을 뒷받침하는 자리에 있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강하디강한, 깊디깊은, 그럴 때 쓰는 ‘디, 연결하는 어미 ‘디에서 새 활동명을 따왔다. 데블,
데인저, 드림… 어떤 D로 이해하든, 괜찮다. D는 한때 피해 생존자였으나, 활동가가 됐고, 물론 연대자이며, 또한 개인이다. 피해자 D,
활동가 D, 연대자 D, 개인 D의 고민과 바람을 듣는다. 배운다.
-eND(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팀) - P24

D는 2021년부터 시스템 감시를 구축하는 데 골몰할 계획이다. 방법은 이렇다. 여러 연대자를 모으고 그들을 교육한다. 연대하는 다수의 개인이 감시 영역을 나눈다. 체계적으로 재판을 기록하고 분석해 문제를 발견한다. 출발은 교육이다. D는 판결문 듣아보기‘ 시리즈를 만들고 있다. 청소년 대상 자료도 따로 만든다.
2020년 한 해 디지털성폭력 사건 재판에 참여한 연대자를 불러 모아 발표하는 자리도 만들 생각이다.
활동가 D와 개인 D를 철저히 분리하고 그럴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해도, 성범죄 사건을 따라가며 정신적으로 겪는 고통은 어쩔 수 없다. 많은 연대자가 겪는 일이다. 가끔 피해자의 사망 소식을 들을 때 특히 괴롭다. 그럴 때면 "다른 피해자들에게라도 삶이라는 선택지를 줘야 한다"고 생각하며 버틴다. 그러기 위해 활동을 지속해야 하고, 지속하기 위해 지치지 말아야 한다. 다른 활동가들한테 D가 하고 싶은 말이다. "피해자의 말, 시간,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함께해주시는 활동가분들께 애정과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 다만 한 가지, 부디 스스로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연대도 활동가 자신을 지키지 못하면 의미 없습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쉬어야 할 때 쉬고, 도움이 필요하면 요청하십시오. 호흡을 길게 가져가면서 하나씩 해나갑시다. 그럴 수 있어요."

<피해자로 4년, 활동가로 6년>

그리고 한때 자신이었던, 어느 순간 다시 자신일지 모를 피해자에게 말한다. 피해자로 4년, 활동가로 6년을 지내며 겪은 것들,
본 것들, 만난 이들 때문에 간절함은 더하다. "당신들과 앞으로의시간을 공유하고 싶어요. 당신 곁에서 무언가 할 기회를 주세요.
어떻게든 바꿀 테니 가지 말고 부디 있어주세요. 당신이 말하는 것과 당신들의 시간이 단단한 현재 위에서 미래를 향할 수 있게, 당신들이 원하는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노력할게요." - P25

To. 가해자들

나는 <한겨레21>제1317호 ‘그루밍 성착취 "2분 안에 답하지 않으면 그들이 왔다"에 나왔던 강지오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약 4년 동안 트위터 등에서 피해를 당했다. ‘n번방 이전의 n번방‘ 피해자인 내가 너희에게 편지를 쓸 날이오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 이 편지를 욕으로 다 채울 수 있을 정도로 나는 분노한다. 하지만 후회 없이 하고싶었던 말을 여기에 적어보려 한다.
너희 중 반성하는 사람이 있을까. 없을 것 같다. 경찰이 디지털성범죄자를 잡는 와중에도 2년 전 나에게 했던 것처럼, 또다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계정을 만들어서 다른 피해자를 노리며 협박하고 있지 않을까. 너희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으로 경찰에 잡혔는지 알 길이 없는 나로선, 너희는 조주빈이고, 문형욱이고, 강훈이다. 아직도 난 그날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4년 동안 겪어온 일들을.
지금도 집으로 협박 편지를 보내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 가족에게 편지를 들킬까봐 하루에도 몇 번씩 우편함을들여다본다. 집 밖에 나가면 유포된 영상 속 나를 누군가 알아보진 않을지, 내일 내가 살아 있을지 잠이 드는 순간까지 전전긍긍한다. 이 고통은 끝난 것 같으면서도 끝나지 않았다.
나는 하루 24시간 중 2시간은 집에서 보내고, 4시간은 잠을 자고, 12시간은 일한다. 나머지 6시간은 너희를 찾는 데쏟고 있다. 나는 내가 겪었고, 또 현재 겪는 일들의 증거를 모두 모아 법적으로 독립이 가능한 스무 살에 신고할 거다. 그래서 자신들을 공무원이라 말하며 나를 집단으로 성폭행한 약 20명이 공무직에서 해임되고 처벌받도록 하는게 내 목표다. 이외에 나를 희롱했던 이들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레고 블록을 밟았으면 좋겠다. 너희가 발바닥의고통을 느끼며 운 나쁘게 하루를 시작하길 바란다. 내가 받은 고통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나를 괴롭히고 희롱했던초반 4개월만큼이라도 실형을 살았으면 한다. 나는 너희가 감옥에서 사회와 격리되길 바란다.
왜 피해자인 내가 밖에 나가는 걸 두려워하고, 트위터에 가입했냐는 질문과 조사를 받아야 할까. ‘소년원에 갈 수도있다‘는 말을 왜 내가 들어야 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우문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날 괴롭히는 것이 있다.
왜 너희는 이전과 다름없는 일상 속에 편하게 잘 살까.
이젠 내 차례다. 나는 너희가 당당히 살 수 없도록, 저지른 짓을 평생 뉘우치며 살도록 세상을 바꿀 것이다. 힘들고어려운 길이란 걸 잘 안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가 더 많겠지만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기에 이 현실을 변화시킬 거다. 계속 부딪치다보면 사회도 조금씩 변하지 않을까. 너희의 시대는 끝났다. 머잖아 범죄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공포에 떨길 간절히 바란다. 또한 이 편지를 보는 다른 피해자가 있다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괜찮지 않을 수도 있지만, 괜찮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끝으로 나는 피해자이지만 디지털성범죄라는 전쟁 속에 살아온 생존자로서, 이겨내고 반드시 잘 살 거다. 내 앞은찬란하게 빛날 테지만, 너희의 앞은 썩은 시궁창만 남아 있길 빌고 또 빈다. - P30

"다 (삭제를) 못했어요, 분명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11월4일 <한겨레21>과 만난 이도연(가명)씨는 한숨을 푹 쉬며고개를 떨궜다. 그는 전 남자친구로부터 디지털성폭력 피해를 입었다. 가해자는 이씨가 목욕하는 장면 등 밝혀진 것만 수십 차례촬영했고 이를 인터넷 성인카페 회원과 교환했다. 가해자와 교제한 지 3년여 흐른 뒤에야 이씨는 그 사실을 알게 됐다. 추궁 과정에서 본 가해자가 사용하는 클라우드 계정에는 이씨의 피해 촬영물뿐 아니라 성인카페 회원에게서 전송받은 여성의 나체 사진이 가득했다.
범행을 위한 ‘세컨드 계정(타인 명의로 만든 계정)으로 보였다.
(고한솔 기자)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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