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 관련 책들을 읽어오면서 한 번쯤 그 흐름에 대해 정리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흐름의 정리를 내가 하는 것은 내 역량 밖의 일일 것 같아 누가 대신 해줬으면 했는데, '로즈마리 퍼트넘 통'과 ' 티나 프르난디스 보츠'가 해줬네. 그렇다면 그들의 노고가 담긴 책을 나는 읽는 것으로써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로 끝나면 너무나 간결한 해피엔딩이겠지만, 이 책은 그렇게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읽기 전에 마련해두고 책을 한 번 휙- 훑어보면서 아아, 뭔가 논문인가..읽을 수 있을 것인가 했는데, 어떤 스토리보다는 역사, 개요에 관한 참고서같은 책이라서 수월하게 읽어낼 수가 없다.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멤버 한 명은 노트를 꺼내놓고 읽어야 한다고 했는데, 나 역시 다이어리를 꺼내서 메모를 하면서 읽고 있다. 


그동안 읽어왔던 여성주의 책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책도 서문,서문,서문으로 시작한다. 그중에는 역자인 '김동진'의 서문이 있는데, 그 서문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독자들도 이 책에 실린 다양한 페미니즘 관점 중 가장 좋아하는 관점 혹은 페미니스트를 한 명쯤은 만날 수 있기 바랍니다. -역사서문중, 김동진


저 구절을 읽는데 어떤 기대감이 생겼다. 이 책을 다 읽은 사람들과 너는 어느쪽에 제일 마음이 가? 어디를 지지하는 것 같아? 라는 물음과 대답을 교환하다보면 아주 재미있고 의미있는 시간이 될 것 같은거다. 

자유주의 페미니즘, 급진주의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미국의 유생인종 페미니즘, 전세계 유색인종 페미니즘, 정신분석 페미니즘, 돌봄 중심 페미니즘, 에코 페미니즘, 실존주의 페미니즘, 제3의 물결 페미니즘과 퀴어 페미니즘 등이 차례대로 나와있는데, 현재 제1장 자유주의 페미니즘까지 읽기를 마친 후에 이 책을 읽는 것은 내 생각보다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어떤것인지, 누가 어떤 걸 주장하면서 흘러갔는지도 보여주고 또 그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비판도 들려준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아 그러했군, 하면서 읽게 되었다면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도 음 역시 맞는 말이야, 하게 되는 거다. 그런식으로 읽다 보면 결국 나는 어느 지점에 제일 가까운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대표는 '베티 프리던'이 있다. 가정주부들의 '이름 없는 문제'를 지적하고 언급했던 페미니스트, 그 유명한 [여성성의 신화]를 쓴 페미니스트. 그 책을 우리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에서 함께 읽기도 했는데, 그 책을 읽으면서 나도 아쉬운 점을 적어두기도 했었다. 그러나 베티 프리던이 그 당시에 그런 책을 쓸 수 있었다는 것 자체는 우리가 환영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전에 모짜르트의 천재성을 보여줬던 영화 [아마데우스] 에서 아주 인상적인 장면을 보았더랬다. 궁중 작곡가인 '살리에리'가 작곡을 하나 하고는 뿌듯해하며 모짜르트에게 들려주는거다. 이거봐, 내가 작곡했어 좋지? 하는데, 모짜르트가 그걸 들어보더니 음 좋긴 한데, 그걸 이렇게 하면 어때? 하면서 거기에 살을 붙여가지고 더 근사한 곡으로 만들어버리는 거다. 한 번 듣고 어떻게 하면 더 좋을지를 머릿속에서 파바박 생각해서 살을 붙이는 것은 모짜르트가 천재라는 것에 확신을 더해주는 일화일 것이다. 그러나 '더 좋은 곡'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곡'이 우선해야 했다. 살리에리가 만들어둔 곡이기 때문에 모짜르트는 거기에 살을 붙일 수 있었다. 애시당초 그 곡에 대해서라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은 살리에리다. 그리고 그 유를 더 근사한 유로 만들어 버린게 모짜르트고. 아, 물론 모짜르트는 천재적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작곡가이긴 하지만 말이다.


베티 프리던이 자신의 사상과 책으로 비판과 비난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 비판과 비난을 받았다는 것 역시 베티 프리던의 작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자, 이런 생각이 있어, 이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야, 라고 세상에 내보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건 이런 점에서 잘못되었어', '그보다는 이런 식으로 나아가야 했지'라고 덧붙일 수 있었다. 결국 처음부터 완벽한 방법을 내보일 순 없지만, 서서히 우리는 좀 더 나은 것을 향해 힘을 모을 수 있게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잘못된 것일지라도 무언가가 존재해야 한다. 베티 프리던은 그 당시에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사람이었고, 후에 사람들은 거기에 살을 붙이고 있다.

비판과 비난을 가득 받을지언정 일단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은 그 성과를 인정해줘야 마땅하다.



이 책을 읽기 전의 나는 내가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가장 가까울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자유주의 페미니즘 밖에 읽질 못해서 확신할 순 없지만, 저자 서문에서의 짤막한 개요들을 읽다보니 나는 어쩌면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더 가까운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 그 모든 페미니즘들에 대하여 차근차근 다 읽다보면 내가 어느 쪽에 가까운지 좀 더 분명해지리라. 




페미니즘에 대해서 이 공간에 여러차례 얘기하곤 했지만, 나랑 같은 페미니즘을 지향한다고 해서 무조건 그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내게 남을 순 없다. 마찬가지로 나랑 다른 페미니즘을 지향한다고 해서 내가 내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현재 나와 다정하게 지내는 사람들 중에도 내가 지향하는 페미니즘을 페미니즘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고, 나랑 바라보는 바가 같았으나 내가 딱히 친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페미니스트는 완벽한 인간, 흠없는 인간이란 뜻이 아닌데, 페미니스트라고 정체화하는 순간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여러가지를 덧씌우고 억압하고 제약하고 그리고 또 기대를 한다. 너는 페미니스트니까 무조건 내 편이 되어줘야지, 라는 식의 억압도 존재하고 너는 페미니스트라면서 거기서 왜 그렇게 행동해? 라는 제약도 들어온다. 나는 이 모든 사건들을 수차례 마주하면서 아프고 고통스럽기도 했다. 갈등과 번민도 있었지만 정말 끔찍하고 싫은 기억도 있다. 어떤 순간들의 선택에는 후회하고 또 어떤 순간들의 선택에는 내가 잘했다고 쓰다듬게도 되는데, 최종적으로 지금은 내가 옳다고 믿는 방향을 보면서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가자고 다짐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라는 인정 자체에 대해 아무런 욕망도 갖지 않게 되었다.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 페미니스트가 되는 건 아니니까. 설사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말을 들어도 아 임 오케이. 페미니스트라는 정체화나 타인의 인정같은 게 내게 중요치 않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그보다는 내가 보는 방향을 향해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참고서 같은 책을 읽는 것은 매우 힘겨운 시간이 되겠지만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또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볼지 기대되고 친구들과도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될지 궁금하다. 자유주의 페미니즘 읽기는 마쳤고(그렇다고 모든 걸 다 습득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음은 급진주의 페미니즘 차례다. 그렇지만 오늘은 자유주의 까지만 읽고 마쳐야지. 머리도 좀 쉬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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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09-06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많은 사람의 다양한 생각을 하나의 이즘으로 묶는 것 자체가 무리죠. 가장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던 사람이 자기 집에서는 가장 억압적인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말이죠. 결국 어떤 사람이든 생각의 층위는 다양하고 무슨 이즘이라는건 그것의 대표흐름만을 표현할뿐인듯싶어요. 그래도 그런 분류가 필요한건 그속에서 내가 동의하는 생각 그리고 삶의 방향들을 더 쉽게 찾아낼수 있는 길잡이정도로러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요즘 어려운 책은 읽기 싫어서 그냥 다락방님을 비롯한 다른분들의 글을 눈팅하는것만으로 만족하고 있네요. ^^;;

다락방 2020-09-07 07:40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바람돌이님.
어제 이 책의 2장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읽는데, 그걸 읽으면서도 또 제가 백프로 급진주의와 같다고 생각하지도 않게 되었거든요. 앞으로 남은 장들을 읽으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바라보며 나아가는게 다른 사람들과 언제나 일치할 순 없는 것 같아요. 세상은 워낙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살고 또 처한 상황도 역시 다르니까요.
바람돌이님, 책을 읽으면 너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면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책을 읽고 쓴 글을 읽는 것도 저는 좋다고 생각해요. 그러다보면 ‘그 책이 정말 이렇게 말했나‘ 라는 의심이든 ‘그 책에서 이런 좋은 말을 하다니!‘라는 궁금증이든 어떻게든 책으로 다가설 수도 있게 될테고요.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는 것은 그대로 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

syo 2020-09-06 1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에요... 모차르트는 살리에리가 좋은 곡을 만들지 않았어도 바로 더 좋은 곡을 내놓을 수 있었을 거예요.... 물론 그렇게 만든 곡은 살리에리의 곡을 바탕으로 한 곡과 전혀 다른 곡일 테지만, 오히려 처음부터 모차르트가 만들어서 훨씬 더 좋은 곡일 확률도 없지 않아요.

천재와 수재의 차이는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천재 좋겠어-_ㅠ

다락방 2020-09-07 07:42   좋아요 1 | URL
맞아요, 모짜르트는 너무나 쉽게(영화여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살리에리의 곡을 변형시켰어요. 그건 그 사람의 재능의 극히 작은 일부일 뿐, 애시당초 무에서 유를 창조한 곡이 살리에리가 만든 곡보다 훨씬 많고 성공했죠. 천재는... 뭐랄까.. 제가 감히 뭐 어떻게 흉내내볼 수도 없는 저어어어어어어어기 어디쯤에 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천재로 산다는 건 어떤걸까요? 어쨌든 지금 내 삶과는 다르겠죠.... 이건 아닐거야, 이건....... 하하하하하.

공쟝쟝 2020-09-08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빨리 읽고 싶다...!!!...

다락방 2020-09-08 08:27   좋아요 1 | URL
저도 그 다음장도 빨리 읽고 싶은데 어제는 다른 책 읽느라 멀리했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