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한나 아렌트 관련 책을 읽고 페이퍼를 쓰면서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내가 한나 아렌트 읽기를 시작하면서 한나 아렌트에게 몹시 반했던 것은, 한나 아렌트가 그 행동의 최고봉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페미니즘을 알게 되고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일은 분명 의미가 있지만, 그렇게 말로써 내가 어떤 사람이다 정체화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실제로 그런 사람이라고 보증해주질 않는다. 나는 진실한 사람이다, 라고 말하지만 거짓을 일삼을 수 있고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다, 말하면서 불의로 가득찬 삶을 살 수도 있다. 나는 너를 사랑해, 라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그 안에 마음을 담지 않기는 또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내가 너를 보러 가는 그 행위, 약자를 위해 몸소 나서는 그 행위. 행동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예전에 비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정체화하는 여성들이 많아지자 백래시도 심해졌다. 백래시 이전에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게 무슨 페미냐' 혹은 '너 페미니스트라면서 왜그래'라는 지적으로 상대의 말과 행동을 억압하려고 한다.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선언이 페미니스트 전체를 대표하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 여성 한 개인의 단점이 여성 전체를 대표하게 되듯이, 페미니스트라는 나 한 개인은 페미니즘을 대표하게 된다. 내가 그런 지적을 듣는 것 뿐만 아니라, 나 역시 초반에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재단하려 들었다. 당신이 페미니스트라면, 이라는 조건을 걸고 그 사람이 다른 식으로 행동하기를, 나와 같이 행동하기를 바랐던 거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내가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나는 무엇이다', '나는 누구이다'라는 선언에 앞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칭하지도 않았고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가르쳤던 하이데거보다 더 뛰어난 학자이자 정치이론가가 되었고,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최초의 여성 정교수가 되었다. 그녀가 프린스턴 대학의 최초의 여성 정교수가 됨으로써, 다른 여성들은 대학 교수가 여성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몸소 느꼈을 것이다. 그전까지 여성이 대학의 정교수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조차 가져보지 않았던 사람이라 해도, 한나 아렌트를 보면서 '오, 저럴 수도 있구나!'를 보고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한나 아렌트가 사유에 사유를 거듭하고 결국 인기 많은 대학 교수가 되기까지의 그 삶의 과정들, 그것들이야말로 그 어떠한 선언보다 많은 것들을 세상에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보여주는 행동으로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라는 영향을 미치는 사람. 그러기에 나는 너무 작고 보잘것 없는 쪼꼬미지만...




그러나 내가 한나 아렌트 읽기를 거듭하면서 내가 한나 아렌트가 깨달았던 것을 나 역시 스스로 깨달았다는 것, 이미 그렇게 행동했다는 공통점을 여러개 찾아냈다. 그걸 찾아냈다고 내가 한나 아렌트같은 어마어마한 큰 사람은 되지 못하지만, 이런 비슷한 점들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몹시 짜릿하다. 예를 들자면,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가장 좋은 토론 상대로 자기 자신을 선택했다. 끊임없이 자기에게 묻고 또 자기에게 답한다. 이 세상에 자신이 진정으로 믿을 사람은 자기 자신 뿐이라고 생각한 거다.



와... 이거 진짜 내가 잘하는건데.

사실 나는 한나 아렌트처럼 철학적인 질문을 던져 내가 묻고 내가 답하기 보다는, 내 안의 천사와 악마...혹은 욕망과 자제..가 싸운다고 보는게 맞겠지만. 나는 그저 쪼꼬미... 이 세상의 찌끄러기..


- 토요일 와인 안주 결정했어?

- 내 생각에 소고기가 좋을 것 같은데.

- 그보다 색다른 건 없어?

- 글쎄. 조금 더 생각해볼게.



이정도의 대화라든가,


- 그를 향한 마음이 너무 커.

- 집어 넣어.

- 포기가 안되는 걸.

- 그러다 너만 상처 받아.

- 상처가 꼭 나쁜 건 아니잖아? 이대로 사는 것보다 낫지 않아?

- 그건 그래. 그럼 지르자.

- 넌 나와 싸우는 거 맞니?
- 싸우지말자. 에너지 빨려..



이정도의 대화라든가.




게다가 나는 누누이 이 공간을 통해서도 얘기해왔다. 나 혼자 사는 세상이라면 내가 생각하고 예측한대로 세상이 흘러가겠지만, 이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때문에 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그래서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나는 이걸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자주 얘기하곤 하는데, 아빠랑 대화하다가도,


"아빠, 세상은 아빠 혼자 사는 게 아니라서 그래.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잖아. 다른 사람은 아빠처럼 생각하지 않고. 그러니 어떻게 예측대로 되겠어."


라고.


한나 아렌트 역시 벽의 물얼룩과 이런 대화를 나눈다. 공교롭게도 '발터 벤야민'의 형상을 가진 그 물얼룩은 한나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이렇게 생각해보게. 만약 이 세상에 자네 혼자밖에 없다면 자넨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어. 무언가를 생각하고 그대로 이행하면 되니까. 그런데 작은 문제가 있지. 자넨 혼자가 아니야. 지구상의 어딜 가든지 다른 사람들로 가득하거든. 게다가 전부 다른 말을 하고, 다른 것을 생각하며, 다른 일을 하지. 그럼 미래를 예측하기가 훨씬 어렵겠지?" -p.190



아아...나는 순간순간 한나 아렌트이고 발터 벤야민이고 그랬던 것인가... (네?)




발터 벤야민은 한나와 그녀의 남편인 '블뤼허'가 공통으로 아는 사람이었다. 발터 벤야민은 한나 아렌트와 매우 친했고, 그래서 그가 쓴 어떤 원고는 '한나 아렌트만 읽어볼 것'이라고 써있기도 하다. 그는 한나 아렌트에게 때가 되면 읽어보라며 그 원고를 전했고 그 후에 자살했다. 발터 벤야민은 한나 아렌트 부부의 공통 지인, 공통 친구였기 때문에, 한나와 그녀의 남편 블뤼허는 그가 죽은 뒤에도 그에 대해 함께 얘기할 수 있다. 벽의 물얼룩을 보고 '발터 벤야민 같다'고 한 것도 블뤼허다. 나는 이런 식의 대화가 너무 좋았다. 서로 사랑해서 함께 하는 두 사람은 필연적으로 둘만의 언어를 만들고 둘 만의 농담을 만들겠지만, 이렇게 자연스럽게 어떤 설명없이 '이거 저거 같지?' 물으면 '응 그러네' 라고 답할 수 있는 이런 분위기. 게다가 한나 아렌트는 결혼과 이혼을 겪고 두번째 만난 남편 블뤼허가 너무 좋다. 아니, 결혼하고 나서 둘이 너무 좋다고 막 이래.





나는 이런 거 진짜 너무 좋다. 상대를 좋아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 순간 좋다는 것을 끊임없이, 쉼없이 표현하는 것. 너무 좋아, 나도 좋아, 너도 좋아? 응 좋아. 이렇게 계속 얘기하는 것. 표현하는 것. 좋다는 감정이야말로 표현해야 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래서 저렇게 너무 좋아, 나도 좋아, 하는 게 진짜 너무 짜릿하게 좋은 거다. 이렇게 계속 좋다는 마음을 표현해주면 상대는 그런 나로 하여금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기는 하는걸까'라는 의심 자체를 갖지 않게 할 수 있다. 사랑에 대한 확신을 줄 수 있는 거다. 내가 이런건 또 기똥차게 잘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내가 사랑하는 걸 너무 잘 안다. 사랑해, 라고 하면 '알아'라고 할 수 있게끔 내가 한다. 내 조카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내가 얼마나 사랑을 잘하고 표현을 잘하냐면, 이렇게나 어린 조카도 내 마음을 안다니까?



각설하고.



한나 아렌트에 대해 얘기하자면 하이데거 얘기를 안할 수가 없는데, 일전에도 한나 아렌트 관련 페이퍼 쓰면서 하이데거 겁나 씹었던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정말이지 씹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 막 대학생이 되어 하이데거의 강의를 들으러 온 한나에게, 그녀보다 두 배 나이가 많고 유부남이면서 자식도 있는 하이데거는, 쪽지를 보내는거다!




저 쪽지의 모든 구절이 싫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여기의 다락방이고 저 당시의 한나 아렌트가 아니기 때문에, 한나는 저 쪽지로 마음이 움직이고 하이데거의 연인이 되며 아주 오랜 시간 그를 가슴에 품고 산다. 그는 오랜동안 그녀의 중심 축이기도 했다. 그녀는 결혼하고 나서도 그를 만나러 가는데, 이 하이데거 자식은 자기 와이프에게 한나 아렌트와 자신의 관계를 얘기하고 또 같이 만나기도 해. 하이데거의 아내인 '엘프리데'는 얼마나 속을 끓였을까. 빡쳐..




하아.

게다가 하이데거가 얼마나 한심하냐면, 한나 아렌트는 이미 스승을 뛰어넘는 정치이론가가 되어있었단 말야. 미국에서 최고 인기 정교수가 됐단 말야. 그런데도 여전히 자신이 한나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한나를 뛰어나다고 평가를 하고 있는 겁니다... 하이데거야, 그거 아니야. 청출어람은 이미 진작에.... 그걸 볼 수 있어야 해..





자기가 어떤 상황인지 잘 모르는 하이데거.. 그러나 자기가 잘난줄 아는 하이데거...



.......................




한나 아렌트의 이 책, 《한나 아렌트, 세번의 탈출》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장면을 꼽으라면, 당연히 열네살의 한나가 칸트를 다 읽고 칸트가 읽은 책까지 다 읽어버리겠다고 다짐하는 바로 이 장면이 아닐까 싶다.




아니 너무 좋잖아? 그림도 너무 딱이다.


열네살에 이미 칸트를 완독한 한나가, 당시의 저명한 학자들이며 예술가들과 토론하고 또 그들의 책을 읽었던 한나가, 프랑스에서는 세상에,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경감을 읽는다! 오오, 매그레 경감을 읽어?

나도 아직 안읽었는데. 그거 유명한 거 알지만, 나는 어쩐지 별로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단 말야?

그런데 한나 아렌트는 기지를 발휘해 경찰의 눈을 피하고 무사히 프랑스를 탈출하게 된다. 블뤼허는 '그 때 어떻게 그런 탈출을 생각했냐'고 묻자, 한나는 '내가 매그레를 왜 읽었겠니?' 답하는 거다. 오, 한나 짱!!




소설 하나도 허투루 읽지 않고 모든게 다 계획적인 한나 아렌트님... ♡

갑자기 매그레 경감 읽어보고 싶어서 어제 막 검색했는데 이제 그 시리즈 안나오나봐...










그러자 조르주 심농에 대해 무라카미 하루키가 뭐라고 했었는데...하는 생각이 들어 찾아보았다. ㅋㅋㅋ 하루키는 심농이 호색한으로 유명했다면서 자신의 에세이에서 심농을 언급했다.




심농 씨 본인은 노벨문학상을 노렸던 모양인데 결국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건 별로 상관없는 일이다. 생각해보라, 삼 년 전 누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심농이 섹스마니아였다는 것은 전설이 되어 문학사에 찬연히(는 아닌가) 빛나고 있다. (p.122)










한나 아렌트를 읽는 일은 즐겁다. 이 책 속에서는 하이데거를 개새끼라고 부르고 ㅋㅋㅋ 아도르노를 여우같다고 하는 동시대 학자들도 나오는데 ㅋㅋㅋ 웃김. 어쩌면 내가 숱하게 욕하는 주변의 누군가가 후대에 길이길이 남을 누군가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후대에 남길 이름 생각하지 않아도 딱 떠오르는 욕할 사람들 ... 지금도 너무 유명한 사람들이네.




그나저나 한나 아렌트는 칸트를 읽고나서 칸트가 읽은 책들까지 읽어보려고 하다니,

나는 한나 아렌트를 읽으면서 매그레 경감을 찾아 읽어야겠다. 무릇 독서란 그런 것이 아닌가...


이제 한나 아렌트에 관련된 다른 책들을 또 사고 읽어봐야지. 일단 찜해둔 것은 이렇게 두 권.


















나도 천천히 다 읽어볼거다. 한나 아렌트를 그리고 한나 아렌트가 읽었던 것들을.

인생은 이토록 수많은 목표들로 혹은 미션들로 가득차있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20-09-04 1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아요, 오늘 페이퍼요. 딱 제가 좋아하는 페이퍼입니다. 한나 아렌트 겁나 좋고요, 책 쌓고 그 위에 앉은 열네살의 한나 그림을 다락방님 방에서 보는 것도 너무 좋아요. 하이데거 씹는 것도 좋고, 그리고 다른 책으로 연결되는 것도요.
완벽한 페이퍼네요. 페이퍼가 갖춰야할 걸 다 갖췄어요. 정보, 재미, 교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완벽한거 아닙니꽈!!!!!!

2020-09-04 1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0-09-06 16:09   좋아요 0 | URL
후훗 역시 글은 내가 좋아서 쓰지만 남도 즐겁게 읽어주면 행복이 배가 되는 것 같습니다. 단발머리님께 좋은 글이라고 생각되어 제가 기뻐합니다. ㅎㅎ
열네살의 한나가 무려 칸트를 쌓아두고 읽고 칸트가 읽은 책까지 다 읽으려 한다는 건 정말 너무 짜릿하지 않아요? 제가 좀 더 어릴 때 한나 아렌트를 읽고 알았다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여러가지로 후회되는 삶이에요, 제 삶은... 왜 어릴 때 더 공부하지 못했나. 왜 고작 이런 사람밖에 될 수 없었나... 그렇지만 제 남동생이 말했듯이, 지금의 저는 제가 발현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모습일 겁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밀댓글님/ 저는 어제 예스24에서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샀습니다. 아직 배송되진 않았지만... 천천히 한 권씩, 뭔가 덜 어려워보이는 것들부터 읽어가면서 한나 아렌트를 좀 더 알아가고 싶어요. 책장에 특별히 한나 아렌트 칸을 마련해두고 싶습니다. 지금은 고작 세 권뿐이고 그마저도 한나 아렌트의 책들에 비하면 입문서랄까, 쉬운 책들이지만, 한권씩 한권씩 늘려가고 채워가는 것이 제 인생의 작은 목표가 되었습니다. 비밀댓글님께도 숙제가 될 것 같다면, 그 숙제 우리 함께 해나갑시다!

건조기후 2020-09-04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러븐(?) 다락방님이 아니다! ㅎㅎㅎㅎㅎ 다락방님이 한나 아렌트보다 훨씬훨씬 짱이에요. 비록 안주의 선택앞에서 자아와 토론을 하더라도 말입니다 ㅎㅎㅎ ❤️❤️

다락방 2020-09-06 16:10   좋아요 0 | URL
힝 감사해요. 오늘 진미채 다듬으면서 내가 잘못한 일들을 떠올리며 한숨을 여러차례 쉬었는데, 건조기후님의 이 다정한 댓글을 읽으니 불끈, 열심히 살아보자 생각하게 되네요. 오늘은 오늘의 족발을 먹겠습니다. 빠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