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와 형리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23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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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프리드리히 뒤렌마트'는 결국 추리 소설의 형식을 빌려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하고 있다. 어떤 예술이든 그 예술 장르의 특성을 통해 예술가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거지만, 프리드히 뒤렌마트의 이 시도가 조금 더 특별한 것은 추리 소설이지만 추리 소설 자체로서는 그렇게 큰 매력은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추리 소설속 등장인물들이 세상은 똥이며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고 엄청 장광설을 늘어놓는데, 그게 재미있다. 읽는 내내 '교고쿠 나츠히코 ' 생각이 났다. 미스테리+장광설 하면 교고쿠 나츠히코가 아닌가! 덕분에 교고쿠 나츠히코 다시 읽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가만 떠올려보니 그 뭣이냐..항설백물어 였나...사두고 읽지 않았다는 게 퍼뜩 떠올라버리네. 뭐든 읽고 싶다고 생각하면 집에 이미 갖추어놓은 나란 능력자... 차가운 도시여자로 태어나 차가운 도시여자로 늙어가고 있다.


추리에 대해 잠깐 언급하자면, 무슨.. 이 노(老)형사는, 뭐랄까, 지가 마음속으로 감으로 똭- 범인 찜해놓고 있어서 ㅋㅋㅋ 넘나 마음에 안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살다보면 촉이 뛰어난 사람이 있고, 아무래도 오래 형사로 일한 경력이 있으니 더 뛰어난 촉이 있겠지마는...... 좀.. 그렇잖아요? 독자가 같이 읽으면서, 흐음, 이랬으니 이 사람이 범인인 것 같군, 저랬으니 여기에서 뭔가 함정이 있겠군...같은 걸 할 수가 없어.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무튼 차가운 도시여자는 이제 푸시킨을 읽으러 간다. 이만 총총.



사람들이란 항상 똑같은 존재지요. 일요일에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중심 교회)에 가든 베른의 성당에 가든 간에. 거물 악한은 풀어주고, 조무래기 악당은 가둡니다. 요컨대 세상에는, 신문에 날 만큼 눈에 띄는 살인보다 단지 약간은 유미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관심을 도리지 않는 범죄가 한 무더기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범죄들도 환상을 갖고 엄밀히 살펴보면 신문에 난 살인과 똑같은 범죄란 말입니다. 환상, 바로 그겁니다. 환상을 가져야지요! 환상의 결여 때문에 한 착실한 상인이 식욕 항진제를 먹으며 점심 식사를 하는 사이에 흔히 어떤 장사에 휩쓸린 범죄를 저지릅니다. 어느 누구도 예상 못하고, 상인 자신은 꿈도 못 꾸는 범죄지요. 왜냐하면 아무것도 그것을 들여다볼 환상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계는 소홀함으로 인해 그릇되었고, 소홀함 때문에 몰락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 P148

이 같은 위험이 스탈린 전체와 그 밖의 요제프(스탈린의 이름) 집안을 몽땅 합친 것보다 더 크단 말입니다. 나 같은 늙은 사냥개한테는 국가에 봉직하는 일이 이미 마땅치가 않아요. 너무나 많은 사소한 사건이 있고, 너무나 끝없이 냄새를 맡고 킁킁거려야 하니까요. 그런데 정작 추적해야 할 돈벌이 야수, 진짜 거물급 짐승들은 마치 동물원 안에 있는 것처럼 국가의 보호를 받는단 말입니다. - P149

선과 악은 다시 떨어지기에는, ‘이것은 잘됐고 저것은 잘못되었다, 이것은 선으로 통하고 저것은 악으로 통한다‘라고 말하기에는 이 인류가 낳은 지옥과 천국 간의 저주받을 결혼의 밤에 너무나 깊이 서로 엉켜버렸습니다. 너무 늦었어요!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을 이미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복종이나 우리의 항거가 어떤 사건을 초래하는지, 우리가 먹는 과일, 우리가 자식들에게 주는 우유와 빵에 어떤 착취, 어떤 유의 범죄가 들러붙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희생자를 보지도 않고, 그에 관해 아는 바도 없이 살인을 하지요. 그리고 살인자가 알지도 못하는 새에 살해당합니다.
너무 늦었어요! 현세의 유혹은 너무나 크고, 은총을 누리기엔 인간은 너무나 보잘것없거든요. 알고 보면 은총이란 결국 살아가는 것, 그리고 헛된 존재로 머무는 것, 그 이상이 못됩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행동의 암에 부식당해 불치의 병을 앓습니다. 세게는 썩었어요, 경감님. - P246

사람들이 기도하는 모든 것, 올바른 행동과 그릇된 행동은 요행을 바탕으로 일어납니다. 선과 악은 추첨의 경우처럼 우연한 운명에 의해 우리 품 안에 덜어지지요. 우연에 의해 우리는 정의롭기도 하고, 우연에 의해 우리는 그릇되기도 한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허무주의자라는 거창한 단어를 쉽게 쥐고, 뭔가위협적인 낌새가 느껴지는 누구에게나 그 단어를 던지지요. 거창한 포즈를 하고는, 머릿속에는 더욱 큰 확신을 갖고서. - P272

우리는 개인으로선 세상을 구제할 수 없습니다. 그건 가엾은 시시포스의 작업처럼 희망 없는 일일 겁니다. 세상은 우리 수중에 놓여있지 않아요. 마찬가지로 한 권력자나 한 민족, 또는 그래도 가장 막강한 악마의 수중에도 놓여 있지 않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손에 놓여 있으며 신만이 결정을 내립니다.
우린 오로지 낱낱의 개인으로서만 도움을 줄 수 있지 전체로서는 도움이 안 돼요. 이것이 가엾은 유태인 걸리버의 한계이며 모든 인간의 한계랍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구제하려고 애를 쓸 게 아니라 세계를 버티어 이겨내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후대를 사는 우리에게 그나마 남은 유일하게 진실한 모헙이지요.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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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9-02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제 길게 뭐 이어지나 했더니 걍 끝이네요! 너무 짧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09-02 14:12   좋아요 0 | URL
원래 백자평으로 쓰려다가 밑줄긋기 해야해서 리뷰로 그나마 늘린겁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초딩 2020-09-02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라도 남겨 주시겠다는 말씀과 함께 이렇게 또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맘에 드네요 ㅎㅎㅎㅎ 좋은 밤 되세요

다락방 2020-09-02 21:33   좋아요 1 | URL
저 초딩님께 쓰겠다는 말을 안했다면 리뷰 안남겼을 겁니다. 읽고 저 쪽에 치워뒀다가, 내가 뭐라도 쓴다고 초딩님께 약속했으니 지켜야한다! 하고 하루 지나 이렇게 쓴것입니다!!!!

초딩 2020-09-02 21:51   좋아요 0 | URL
아 너무 감사하고 멋지세요~ 더 감사하고 싶은데 방음이 생각보다 굉장히 안되는 벽 때문에 옆 사무실의 어린 아주 어린 친구들이 소식적 고등학교 이야기를 한시간 넘게 하고 있어
귀를 틀어 막고 노래를 듣고 있는데
온통 기가 다 빨려 가고 있어요.
내일 아침에 자전거 자물쇠를 구해서 문을 걸어 잠그고 싶네요.
기력을 보충해서 또 감사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