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식물과 광물, 지질학을 연구하는 박물학자인 '에마 미첼'의 책 《야생의 위로》를 읽고 있다. 우울증을 겪고 있는 저자가 집 앞의 숲을 산책하면서 온갖 식물과 동물을 만나고 스케치하면서 자신의 우울감을 다스리는 글인데, 월(月)별로 계절과 감정의 변화를 적고 있고, 이 책의 시작은 10월 October 이다. 지난주 금요일 출근길에 10월을 읽었고 오늘 아침 출근길에는 11월 November 를 읽을 차례였다. 11월, 노벰버. 나는 좋았다. 11월은 11월이라는 것도, 노벰버라는 것도 좋았다. 어쩌면 많은 상념에 잠길지도 몰라, 라고도 생각했다. 나는 계절상 여름을 제일 좋아하고 월로 따지면 8월을 제일 좋아하지만-그렇다, 내 생일이 있는 달이라서 좋아하는 거 맞다- 11월 역시 좋아했다. 11월은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내게 조금 특별하고(사수자리!) 그래서 노벰버를 읽는 일은 몹시 기대되는 일이었다. 에마 미첼이 자신의 개 '애니'와 산책하는 어찌보면 단조로운 풍경의 이 책은, 저자 본인의 우울감도 잡아주지만, 독자에게도 평안을 준다. 출근길 지하철을 타고 자리잡고 앉아 11월을 펼치면서, 11월이야, 11월 좋아, 노벰버....이러고 있다가, 그렇게 읽어 내려가다가, 나는 안내방송으로 '개농'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개농?
개농이라고?
개농이 여기서 왜 나와?
나는 내가 제대로 들었나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고, 지하철 역 안내판에는 지금 문이 열리는 이 역이 개농이라고 분명하게 써있었다. 헐. 개농이라니? 개농은 내가 내려야할 오금 역 다음 역이잖아? 나는 잽싸게 내렸다. 이게 뭔일이야. 그리고 다다다닥 계단을 올라가 뛰어서 반대편으로 다시 다다다닥 계단을 내려가며 뛴다. 그리고 다시 확인한다. 그래, 이렇게 반대편 열차를 타야 내가 가야할 곳 오금에 이를 수 있다. 월요일 아침부터 이게 뭔일이여. 게다가 7분을 기다려야 열차가 온다니... 잠깐, '밖으로 나가 택시를 탈까' 했지만, 밖으로 나가는 시간과 택시 잡는 시간을 합치면 딱히 더 이로울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 그냥 기다리자, 하면서 다다다닥 뛰느라 흐른 땀을 손수건을 꺼내어 닦았다. 이게 뭔일이야. ㅠㅠ
그렇게 7분 기다렸다 반대편 열차를 타고 오금에 도착했고, 오금에 도착해서는 열차가 들어오는 시간이길래 다다다닥 뛰었지만, 예상대로 놓쳤고, 그래서 결국 십분 가량을 기다려서 3호선을 탈 수 있었다. 나의 흐르는 땀이여, 넘쳐 흐른 에너지여..... ㅠㅠ 인생 뭘까. 나는 아침부터 회의에 차 우울해졌다. 20년을 직장생활해도 이렇게 여전히, 내려야할 역을 지나쳐버린다. 이게 대체 뭔일이여. 그리고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고 이렇게나 반복되는데, 아아, 인간은(아니, 나는)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왜죠... 왜 나는 나에게 늘 미안해야 하는가. 어째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왜때문에 월요일 아침부터 다다다닥 이리 뛰고 다다다닥 저리 뛰는가. 왜인가, 나여...
여동생은 이런 나에게 야한 책 보고 있었느냐 물었고 나는 아니야, 야생의 위로를 봤다고!! 했지만, 여동생은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게, 어째서 야생의 위로를 보면서 나는 내려야할 역을 지나치는가. 도대체 여기에 푹 빠질 게 뭐라고 집중에 집중을 거듭하는가... 시무룩....
그렇게 평소보다 이십분 늦은 출근길, 지하철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탔고 또 내려서 회사를 향해 걷는데, 뒤에 어쩐지 나에게 아는 척을 할 것만 같은 기운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점점 더 빨라지는 것이 기어코 내게 아는척을 하기 위해서라는 그런 어떤 느낌적 느낌. 아아..나는 지금 당신이 누구든 아는척할 기분이 아니야, 평소보다 이십분이나 늦은 것도 싫고, 아침부터 에너지 너무 소비했고, 날 가만 내버려둬, 라고 생각하면서, 뒤를 돌면 어김없이 아는 사람이 나올 것 같은 기운을 애써 무시하고 부지런히 더 빨리, 더 빨리 걷는데, 아아, 그러나 뒤에서는 나를 불렀다. 차장님!
하아..왜불러, 왜, 왜, 나를 내버려두란 말이야, 흑흑, 눈물을 삼키며 뒤를 돌아보았더니 다른 부서의 남자 과장이었다. 내가 평소보다 늦게 오니 이렇게 만나버리는 구먼... 안녕 남자과장아.... 나는 오늘 이런 일이 있었다고 얘기했더니 남자 과장이 깔깔 웃으면서 '아침에 책이 읽혀요?' 라고 묻더라. 무슨 소리야, 아침 출근길 지하철 집중이 제일 끝내주지! 그렇게 둘이 걸으면서 회사 앞에 이르렀는데, 빌딩으로 들어서려니 저쪽에 임원도 오고 있다. 임원에게 인사를 하고 일단 남자 과장하고 나는 엘리베이터를 탔고, 나는 '못기다려, 나 빨리 가야해, 닫혀라닫혀라' 하면서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눌렀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남자과장은 빵터져서 웃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서 저기 임원의 모습이 보였고 그렇게 나는 가뿐하게 무시해줬다. 나는 오늘 아침 내릴 역을 지나쳤으니까, 나 건드리지마....... 나는 먼저 갑니다....................
어휴.. 힘들다.
여동생이 기운내라며 커피와 케익 쿠폰을 보내줬다. 언니 새로 나온 거래, 먹어봐, 하고. 이따 먹어봐야지. 후훗.
주말에는 이모 모드 가동하여 조카네 식구들과 함께 대천해수욕장에 갔다. 입구에서 체온을 재고 손목에 체온 검사를 마쳤다는 띠를 두른 뒤에 해수욕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오전에 도착했던지라 아직 숙소 체크인은 되질 않았고, 차 안에 짐을 둔 채로 조카들과 해변가로 나가 조카들은 씐나게 물속에 들어가 놀았고(물 너무 차가운데!!), 나와 여동생은 해변가에서 요가 동작들을 해보았다. 모래가 발밑에서 움직여서 균형잡기가 어렵군, 어떤 동작을 해야 될까, 이러며서 놀다가 점심을 먹고 숙소에 들어갔고, 리조트 앱을 다운 받아 쿠폰을 받으면 13,000원의 사우나가 무료라고해서 다운 받은 뒤에, 엄마와 조카와 나는 셋이서 사우나에 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사우나에는 사람이 없어서 거의 우리가 독차지했다고 할 수 있었는데, 나와 엄마는 따뜻한 물에 담그며 아이 좋다..하였지만 조카는 찬 물에서 잠수를 하며 깔깔대고 놀았다. 조카여...
그렇게 숙소로 돌아오니 온 식구가 갯벌 체험을 나간다 하고 나는 너무 피곤해... 너희들만 다녀오렴, 하고 모두를 보낸 뒤, 후훗, 너무나 달콤하게 숙소에 혼자 남았다. 와인을 한 잔 따라 마실까 하다가 살짝 졸려서 안마시고, 침대에 누워 《야밤의 공대생 만화》를 펼쳤다.
그리고 여기, 문학하는 바이런을 만났다. 아, 바이런이여.... 바이런이 어마어마한 수학자의 아버지라는 건 처음 알았네? 아무튼 바이런 바람둥이인건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세상이 다 아는데... 자, 잠깐 보자.
위의 사진에서 밑의 깨알 글씨 보면 '자기 누이와도 그랬다는 소문'이라고 적혀 있는데, 맹기완은 아마도 《미친 사랑의 서》를 아직 읽지 않았나보다. 그걸 읽어보면 그게 소문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을...
아무튼 바이런이 저지경의 난봉꾼이니 아내는 당연히 빡이 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남편이 문학을 하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바이런 이 놈이 시를 써서 그래, 시가 그를 난봉꾼이 되도록 했다!! 그렇게 자신의 딸에게는 수학을 공부시키는 거다.
그렇다면 딸인 '에이다' 가 낭만 없는 수학자가 되었느냐...하면, 에이다는 수학하는 바람둥이가 되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바람둥이는 시 때문이 아니었고 바람둥이는 문학 때문이 아니었다. 바람둥이는 수학을 해도 할 수 있는 거였어.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러다가 위에도 잠깐 언급한 《미친 사랑의 서》생각이 났고, 바이런에 대해서도 내가 드럽게 까둔 기억이 나기 때문에 과거에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게 됐다.
바이런이 어땠는지 한 번 보자.
결말이
그리 좋지 못했던 독실하고 부유한 애너벨라 밀뱅크Annabella Milbanke와의 결혼은, 그가 편지로 심드렁하게 청혼하고서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성사되었다. 그녀와 결혼하면 재정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 무엇보다 이복누이 오거스타의 치명적인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심산으로 청혼한 것이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이 결혼하도록 부추긴 것이 바로-바이런을 향한 감정이
그 못지않게 뜨거웠던-오거스타였다고 기록으로 남겼는데, 당시 오거스타가 내세운 이유는 "결혼만이 두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니까"였다고 한다. (바이런, p.111)
바이런은
그곳에서 제일 처음 사귄 정부를 버리고 이번에는 문맹 제빵사의 아내를 만나기 시작했는데, 그녀는 아예 남편을 버리고 바이런이
사는 집으로 들어가 열네 명의 하인 대열에 가정부로 합류했다. 바이런은 그녀의 불타오르는 색정과 특이한 버릇들-섹스를 하다가 교회
종소리가 들리면 성호를 긋는다든가 하는-은 좋아했지만, 레이디 캐롤라인을 떠올리게 하는 유난스러운 질투와 드라마틱한 언동에 곧
질려버렸다. 그래서 집에서 나가달라고 하자, 그녀는 바이런에게 식탁용 나이프를 휘두르더니 베니스의 대운하에 몸을 던졌다.
바이런에게 고용된 곤돌라 사공들이 그녀를 얼음장 같은 물에서 건져내 왔지만, 바이런은 꿈쩍도 안 하고 그녀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짐을 싸서 내보냈다. (바이런, p.118)
그러니까 바이런은, 누이와의 근친상간을 덮기 위해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결혼하고 나서도 근친상간을 유지했고, 또 다른 애인도 사귀었고, 또 다른 애인도 사귀었고, 애인을 가정부로 들이기도 했다는 것. 그러다가 결국 매춘에도 빠지게 된다. 정말이지... 에휴..... 나는 어릴 때부터 글 읽는 걸 좋아했지만 글 쓰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노래를 좋아했지만 노래 만드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아아, 어릴때부터 예술하는 남자란 어떤 존재인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세상 현명하고 지혜롭고 똑똑해. 물론, 이공계 남자라고 딱히 다를 것도 없지마는...
바이런만 읽고 났는데 너무 잠이 쏟아져서 숙소에서 기절하듯 잤다. 눈을 떠보니 낯선 곳이라 '나는 누구?' '여긴 어디?' 하게 되었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내가 지금 이모 모드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휴...
어제 집에 돌아와서는 샤워를 마친 뒤에 기절을 했고, 일어나서는 엄마가 끓인 된장찌개와 엄마가 구워준 조기 두 마리를 흡입했다. 아, 겁나 맛있어 진짜 짱이야, 대천 해수욕장에서 사먹었던 그 모든 음식들보다-쭈꾸미 볶음, 조개구이, 바지락 순두부- 최고 맛있어! 그렇게 밥을 맛있게 먹고 다시 침대로 돌아가 야밤의 공대생 만화를 펼쳤다. 만화로 과학자와 수학자들에 대해 얘기하고는 뒷편에 부록처럼 그들과의 가상 카톡대화를 올려두는데, 하하하하, '페렐만' 부분에서는 아아..아련....... 나의 감성이 촉촉해졌다. '자니?' 하고 싶은 나를, 맹기완이 알아...
어머니랑 전복 따고 산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이니... 대한민국으로 갔을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있던데.... 어디니 내 목소리 들리니....잘 지내니 보고싶다.....
자니?
월요일이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