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tacular 를 네이버 사전에 검색해보면 '장관을 이루는', '극적인' 이라는 뜻이란다. 그렇다면 이 영화 《spectacular now》는 '장관을 이루는 지금' , '극적인 지금' 정도의 뜻이 될텐데, 주인공 '셔터'(마일즈 텔러)가 언제나 현재를 즐기려고 하기 때문에 붙은 제목인 것 같다.


셔터는 고등학생이고 곧 졸업을 앞두고 있다. 주변에서는 셔터가 똑똑하다고 하는데 기하학 선생님이 하는 말이 무슨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도대체 이 학문을 왜 배워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그는 술취해 쓰러졌다 깨어난 길바닥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학교의 모범생 '에이미'(쉐일린 우들리)에게 자기의 공부를 도와달라고 한다. 공부도 잘하고 이미 대학에 합격도 해놓았고 미래에 나사에서 근무하겠다는 꿈까지 가진 에이미는 그간 셔터가 만나온 여자들과는 달랐다. 셔터는 늘 현재가 제일 중요했고 미래가 없다는 듯 살았다. 그러니 매일 파티에 파티에 파티 연속이었고, 그 파티의 주인공이었다. 어느 파티에서나 셔터는 자신의 여자친구인 '캐시디'(브리 라슨)과 화려한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즐기는거다.


마침 캐시디랑 헤어지기도 했던 터라 그렇다면 에이미랑 파티에도 같이가자고 셔터는 생각한다. 그간 셔터를 보아왔던 친구는 왜 너랑 어울리지 않는 아이랑 사귀냐, 너가 그동안 만나왔던 아이랑 다르지않냐, 고 묻는데 이에 셔터는 여태 한 번 남자친구를 사귀어보지 않은 에미이를 '도와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쇼를 한다 진짜... 남자 없는 여자를 내가 도와주겠어..같은 그런 마인드는 상대에게도 못할 짓이지만 스스로를 존중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마음은 사실 에이미에게 끌리면서 폼 잡으려고 그렇게 말한거라면, 그건 그것대로 개멍청이.. 아, 그런데 내가 이래서 셔터를 비난하려는 건 아니고, 남자들의 후까시야 뭐 두말하면 입아프니까.


매력은 개인적인 것이다. 매력을 가진 내 개인을 말하는 게 아니라, 상대의 매력이 내게 다가서는 순간, 상대로부터 매력을 느끼는 순간이 개인적이란 거다. 극중 '셔터'는 정말 내가 안좋아하는 타입이다. 미래가 없다는듯 파티를 즐기는 것도 그렇지만, 가장 싫은건 그가 허구한날 술을 마신다는 거였다. 그는 일자리에도 술을 가져가서 홀짝홀짝 마시고 운전을 할 때도 술을 마신다. 술을 마셔본 적 없던 에이미에게도 술통(뭔쥬 알죠, 그거 이름이 따로 있을 것 같은데 모르겠다..)을 선물하고 에이미도 홀짝홀짝 아무때나 술을 마신다. 저렇게 운전하기 전에 술마시는 거 진짜 너무 싫다, 생각하는데 결국 술도 마시고 감정도 격해져있던 어느 날에는 사고도 낸다. 사실 사고도 한두번도 아니지..


그런데 셔터는 나름 인기남인거다. 게다가 학교 내에서도 유명하고. 그래서 공부를 너무나 잘하고 똑똑하지만 스스로 예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남자친구도 한 번 사귀어본 적 없던 에이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셔터가 나같은 여자를 정말 좋아서 만날 리가 없다는 생각을 수시로 한다. 키스를 한 뒤로는 연락도 없어서 좌불안석(아아, 나 그거 알아. 나도 키스한 다음날 연락 오기전까지 이불킥을 수천번 했던 그 여름이 있다). 오늘은 공부를 하겠다는건지 어쩐건지도 연락도 없고... 어쩌면 졸업파티에 같이 가자고 한 것도 술김에 한 말일지도 몰라, 진심은 아니겠구나, 라고 당연히 생각하는 거다. 나로서는 도대체 이런 놈이 뭐가 좋다고, 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내가 여기 사는 이 나이의 나이기 때문이고, 저 나이또래의 학생들에게 학교의 인기남은 너무 핫한 동경의 대상이겠지. 어쨌든 그렇게 좀 위축되어 있는 거다. 나사에 들어갈 희망을 가진 여학생이 인기남이 자신과의 약속을 잊을까봐 기죽다니..



이게 남일이 아닌게, 나에게도 저런 일이 있었다. 오래전의 일인데, 나는 와 이렇게 멋진(?) 남자가 어떻게 나를 알게 되고 나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그를 알고 지내기 시작하면서 나는 좀 위축되어 있었다. 나는 상대와 나를 비교했고 나에 비해서 상대가 훨씬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다 부끄러운 과거 몇 개쯤은 있는 거잖아요...


어느날 그와 메신저로 대화를 하다가 다가오는 금요일에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금요일이 될때까지 그로부터 별 말이 없길래, 장소도 정할겸 어디로 할래, 라고 문자를 보냈더니 그로부터는 '음, 혹시 우리가 오늘 만나기로 했어?' 라는 답이 왔다.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그때 내맘 뭔쥬 알죠... 나는 그 날을 기다렸는데, 그 약속 조차 잊고 있었다니... 그때의 실망과 절망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 체념했다. '그럼 그렇지, 이 남자가 나를 만날 리가 없지' 라고. 나는 그에게 그렇다고 하자 그는 미안하다며, 자기가 그때 무슨 일이 있어 정신이 없던 까닭에 오늘 만나기로 했다는 사람이 세 명이나 있었다는 거다. 자신도 당황스럽다며 정말 미안하다고, 이미 처음에 말한 사람과 약속이 되어있다고 해서 오케이, 하고는 그 날 그를 만나는 것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포기했다. 그의 말이 거짓일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그러나 내가 그에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 역시 사실이잖아. 그런 오전을 보내고 매우 서운하던 차에, 하아, 평소에 만나자고 했던 다른 남자1에게 갑자기 연락을 했다. '혹시 오늘 보는 거 가능해?' 라고. 그러자 그는 콜! 하고는 선물까지 사들고 나를 만나러 왔다. 그렇게 남자1과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웃고 떠들면서도 '이게 이게 아닌데..'하는 씁쓸한 마음을 도무지 다스릴 수가 없었고, 앞에 앉은 남자에게 집중도 되지 않았고, 술을 다 마시고 집에 바래다 준다는 남자에게 한사코 거절을 했다. 술자리에서 그가 화장실에 간 틈을 타 다이어리에 그 때의 감정을 시로 쓰기도 했는데(응?)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무튼 졸라 문학여자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문학적이다. 슬픔을 시로 승화시킨다. 예술인이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나에게도 저런 찌질한 과거가 있기 때문에, 에이미가 혹시나 하고 쪼그라들어 있는걸 보는데 '알아, 알아, 내가 그 마음 안다' 이렇게 되어버려.... 하아-



누구나 그렇지만 셔터는 셔터 나름의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특별히 어떤 사건이 그에게 벌어진 건 아니었지만, 그는 오래전에 부모가 이혼하고 아빠를 그리워했던 것. 엄마는 아빠가 바람을 피웠다고 했지만 그건 엄마 말이고, 셔터는 아빠의 말도 들어보고자 오만년간 연락없던 아빠의 연락처를 알아내어 만나러 간다. 아빠를 그리워하는 셔터에게 아빠에게 연락해보라고 말해준 것도 그의 여자친구 에이미였고, 그런 아빠를 만나러 먼 길을 갈 때 동행해준 것도 에이미였다. 가서는 돈도 없고 여자에게 껄떡대기만 하고 한시간 뒤에 돌아오겠다는 약속도 깜빡하는 아빠를 보고 엄마의 말이 맞았다는 걸 깨달으며 좌절할 때 옆에 있어준 것도 에이미였다. 에이미는 그의 애인이면서 동시에 그를 한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해보지 못한 것을 시도해보게 하는 친구이기도 했다. 모든걸 다 알고 모든걸 함께 하는 사람. 셔터는 자신이 아빠와 똑같은 것 같아서 두렵고 에이미의 미래를 위해서는 에이미를 놓아주어야 하는게 맞다고 생각한다. 







집에서 혼술을 할때면 텔레비젼을 보려고 채널을 돌리게 되는데, 평소에 텔레비젼을 보지 않았던 터라 무슨 프로그램이 있는지 잘 모른다. 지금 이때는 어떤게 방송하고 있나, 하고 편성표를 눌러보다 보면 보고싶다는 생각이 드는게 1도 없어서, 결국 유튜브의 운동뚱... 을 찾아보게 되는데.... 편성표에서 최근에 자주 봤던 제목이 <저녁 같이 드실래요> 였다. 편성표에서는 제목만 볼 수 있어서 제목만 보고 나는 <한 끼 줍쇼>같은 먹는 방송 예능일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엊그제 월요일, 갈비찜과 김치찜에 소맥을 말아 먹으면서(네?) 채널을 하나하나 돌리다가, <저녁 같이 드실래요>란 제목이 떠있는데 송승헌과 서지혜의 투샷을 보고, 오오, 이거 드라마야? 하게된 것. 그러다보니 얼마전에 송승헌이 제주도에 내려가 <나 혼자 산다>방송을 찍으면서 드마라 촬영차 왔다고 햇었는데, 이것이 그것?


송승헌은... 참.... 너무 잘생겼지만 매력없는 대표적인 인물인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매력이라는 것은 느끼는 사람에게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란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들에게 잘생긴 것은, 잘생겼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매력이기도 할테니까. 그러나 나에게 다가서는 매력은 그것이 아녀...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결코 잘생김과는 거리가 먼..........(그만 두자, 보고 있으면 어떡해.)


아무튼 그래서 소맥을 홀짝이면서 이 드라마를 보게 됐는데, 내가 보고 있는 상황에서 파악한 바로는 김해경(송승헌)과 우도희(서지혜)는 자기들이 정한 '디너 메이트' 였다. 서로의 직장도 본명도 모른 채로 가끔 저녁을 함께 먹는 사이인 것. 그 전 회차들을 보지 않아서 도대체 어떻게 이름도 직업도 모르는 남자와 디너 메이트 같은 걸 할 수 있나, 나로서는 전혀 생각할 수도 없다 싶었지만, 서로의 요구가 맞아떨어진다면 뭐,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다. 그러니까 각자 그 당시 어떤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이러저러한 다른 관계 필요없고 가끔 밥이나 같이 먹을 사람이 필요했는데, 나도 그런데 너도 그래? 이러면 뭐, 그럴 수도 있겠지...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별로 그럴 생각은 없다. 이름도 소속도 모르는 남자와 디너 메이트? 흐음.


아무튼 그런데 우도희 에게는 우도희에게 집착하는 전남친이 있다. 오 신이시여, 대체 왜 전남친들은 그렇게나 찌질한 집착남에 머저리들인가요? 왜 하나같이 그렇게 되는건가요? 왜죠? 아무튼 이 전남친은 자신과 우도희가 헤어질 수 없다고, 우도희도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해서 집착하는데(개새끼), 그 날도 우도희의 집앞에서 우도희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그를 거절하는 우도희의 손을 잡고 강제로 끌고 가려고 하는거다. 우도희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이렇게 불쑥 집앞에 오는 것도, 팔을 잡는 것도 해서는 안되는 짓이다' 라고 얘기한다. 그렇지만 그 남자는 다시 우도희의 팔을 잡고, 아아, 우리의 백마탄 기사님인 송승헌 님께서 '그 손 놓으시지' 이러면서 등장하시는 겁니다.... 어이가 사라졌다..... 그러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이러면 안되는거야' 까지는 말할 수 있지만, 어쨌든 이 남자로부터 나를 구해주는 다른 남자..... 라니요. 그러다가 좀 씁쓸해졌다. 그럴 때 이 남자를 더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거, 나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하게 주춤하게 만드는 게 다른 남자여야만 가능하다니. 만약 혼자였다면 나는 그 위기를 피할 수 있었을까. 너무 좆같은 상황 아닌가. 약속도 없이 찾아오는 거, 싫다는데 붙드는 거, 모두 구질구질한 전남친의 잘못인데, 그런데 그 상황에서 피하기 위해서는 나 혼자만의 힘으로 안된다는 거, 너무 엿같잖아. 결국 다른 남자가 등장해야만 쪼그라들어서 사라지다니...



아무튼 이 전남친과 전여친은... 참... 뭐랄까... 그러니까 김해경에게도 전여친이 있다. 오래 사귀어온 전여친인데, 이 전여친 역시 자신이 허락하면 김해경이 자신과 다시 잘 될거라고 생각해. 어제 본 방송에서 다시 잘해보고자 하는 전여친에게 김해경은 '나는 너에게 화가 남아 있지도 않고 미련이 남아 있지도 않고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데, 와, 그 말에 진짜 공허해지는 거다.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 아무것도. 그러면서 나 자신에 대한 반성모드로 들어갔다. 나도 결국은 그런 전여친 중에 하나가 아닌가. 상대는 내게 화도, 미련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데, 나 혼자 뭔가 잔뜩 남아서 터뜨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살고 있는게 아닌가 싶은거다. 김해경의 전여친에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를 정리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내가 이걸 지금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주제인가 싶었던 것. 가슴이 시리네요...



우도희는 알고자 하지 않았는데, 우연히 김해경의 이름과 직업을 알게 되고, 그가 이름과 직업을 가짐과 동시에 그와의 관계가 그려진다. 그러니까 그는, 우도희가 함께 일하는 사람의 전남친이고, 그여자는 전남친에게 죽고 못살고...그렇다면 이 관계는 더 진행하지 않는게 맞고..해서 김해경을 불러내 이제 밥먹는 사이 그만두자고 말한다. 우도희에게도 그리고 김해경에게도 상대에 대한 마음이 생겨나고 있는 터에 이런 결정이라니, 우도희도 마음이 아프고 영문을 모르는 김해경도 마음이 시리다.


내가 어제 본방을 보기로 결정했던 건, 그 후에 김해경의 태도 때문이었다. 김해경은 이대로 디너메이트를 끝내고 싶지 않다. 그녀에게 마음이 생긴 까닭이고 자꾸 생각나는 까닭이다. 그래서 우도희를 찾아가 자신의 명함을 건넨다. 이 이름이, 이 번호가 나다, 이 사람과 다시 연락하고 싶다면 이 명함을 보고 연락하면 된다, 고. 나는 이 장면이 너무 좋은거다. 나는 거짓말을 싫어하고 숨기는 걸 싫어한다. 내가 누군가를 숨기는 것도 싫고, 누군가가 나의 존재를 숨기는 것도 지독하게 끔찍하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가 누군가를 만난다면 나는 그 일에 대해 세상 당당하고 싶고, 상대 역시 그러하기를 바란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게 숨겨야 할일이 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진 않다. 살다보면 그러나 그런 일이 있게 마련이고, 나 역시 숨겨야 하는 몇몇 관계들이 있었다. 그런 관계들 틈에 놓여있을 때는 만족과 행복을 크게 가져갈 수가 없다. 만족과 동시에 한 편에 우울함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환한 대낮에 만날 수 있는 사람, 누군가가 물었을 때 머릿속에서 이것저것 지우고 꾸며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이 나는 좋다.


김해경이 환한 대낮에 우도희를 찾아와 명함을 건네는 것은 이 모든것의 상징으로 느껴졌다. 나는 여기에 속해있어, 이런 일을 해, 이런 이름을 가졌어, 이것이 내 번호야, 앞으로 니가 나를 만나게 된다면 이렇게 나를 표현하면 돼, 라는 모든 것들의 상징. 나는 명함을 건네는 것이 너무너무 좋았다. 업무적으로 만난 것도 아니고 그간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했던 사이에서 건네는 명함은, 내게 예의바름이었다. 그 장면이 너무 좋았고, 그 장면이 마지막이어서 그 뒤가 궁금해지는 거다. 정장을 입고 찾아와 명함을 건넬 때의 김해경은 무척 매력있는 남자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예의바른 사람을 좋아했다. 깍듯한 사람, 숨길 것도 없이 정중한 사람. 그러나 나는 숨겨야 했던 사람도... 그만두자, 이런 얘기는.




















수이와의 연애는 삶의 일부가 아니었다. 수이는 애인이었고, 가장 친한 친구였고, 가족이었고, 함께 있을 때 가장 편하게 숨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수이와 헤어진다면 그 상황을 가장 완전하게 위로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수이일 것이었다. 그 가정은 모순적이지만 가장 진실에 가까웠다. - <그 여름>, 최은영,  p.253




최은영의 <그 여름>에서 위의 구절은 정말 핵심적인 구절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나의 애인, 나의 연인이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사람, 모든 얘기를 나눌 수 있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내가 애인과 헤어졌다는 얘기, 이렇게나 좋은 친구와 헤어졌다는 얘기를 가장 잘 들어줄 사람도 이 사람인데, 그런데 그 사람과 헤어진거라 더이상 말할 수 없는 상황.

연인과 가장 친한 친구가 한 사람인 것은 그렇다면 축복인가, 아닌가.



















작아. 귀여워. 엉덩이가 예뻐. 진짜 반투족이야. 슈그는 나한테 모든 걸 다 말하는 데 버릇이 들어서 쉬지 않고 이야기를 쏟아냈는데, 갈수록 더 들뜨고 사랑에 빠진 사람 같아 보였어. 그녀가 그의 앙증맞고 작은 발이 춤을 출 때에 대해 이야기를 마친 뒤 다시 금갈색 곱슬머리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내 기분은 진창에 처박혔지.
그만해, 슈그. 나 죽을 것 같아. 내가 말했어.
그녀는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어. 슈그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고 얼굴이 일그러졌지. 아, 셀리. 슈그가 말했어. 미안해. 그냥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던 건데, 나는 늘 너한테 이야기하니까.
말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면, 나는 이미 앰뷸런스를 탔을 거야. 내가 말했어. -《컬러 퍼플》, 앨리스 워커, P321




셀리는 슈그를 사랑했고 슈그도 셀리를 사랑했다. 이들은 오래 사랑했고 앞으로도 오래 사랑할거라 생각했는데, 슈그에게는 '새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새로 사랑하게 된 귀여운 사람에 대해 슈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셀리에게 조잘조잘 수다를 늘어놓는다. 슈그와 셀리는 서로의 마음속 얘기까지 다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가장 좋은 대화상대, 그리고 연인. 연인이면서 가장 좋은 대화상대였고, 늘 모든 걸 이야기 나누던 사람이라서, 슈그는 했던대로, 습관처럼, 새로운 사랑에 대해 셀리에게 수다를 떠는거다. 그러나 여전히 슈그를 사랑하는 셀리는 어떤 기분이 되어야 했을까. 늘 나에게 수다 떠니까 이 모든 걸 다 열심히 들어주는 대화상대가 되어야지, 할 수 있었을까. 여전히 슈그를 사랑하는데, 슈그가 새로운 사랑에 빠진 얘기를 대체 어떻게 대화상대로서만 들어줄 수 있단 말인가. 셀리는 너무 아프다. 너무 아프고 괴롭다. 너무 아프고 고통스럽고 슈그의 사랑에 대한 말들이 자신을 죽이는 것만 같다. 죽을 것만 같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 가장 친한친구이기도 하다는 것은 축복인가 아닌가.




셀리는 슈그를 사랑한다. 슈그가 사랑하는 사람, 가장 마음을 열었던 사람, 모든 대화를 나눴던 사람. 그렇다면 나는 여전히 슈그의 친구로서 슈그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하는가. 그러나 다른 사랑에 빠졌다는 그 말은 이토록이나 고통스러운데!

그러나 셀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든 폭력적인 전남친과 다르다. 그러나 셀리는 집착적인 전남친과 다르다. 셀리는 사랑에 대해 성숙한 태도를 지닌다. 그녀는 슈그가 다른 사랑에 빠진 것이 몹시도 고통스럽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질 권리가 슈그에게 있음을 '안다'. 슈그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자신이 정해줄 수 없다는 것도 역시 '안다'.


나도 슈그하고 같이 다니고 싶기도 하지만 슈그라도 그럴 수 있는 게 다행이야. 때로는 슈그에게 화가 나기도 해. 슈그의 머리카락을 홀랑 뽑아버리고 싶을 만큼. 하지만 그러고나서 생각하지. 슈그는 자기 인생을 살 권리가 있다고 말이야. 내가 슈그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런 권리를 빼앗을 수는 없지.-《컬러 퍼플》, 앨리스 워커, P346



너무 좋은 친구였던 터라, 다른 사랑에 빠져 다른 사랑과 함께 있는 슈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그 우정이 그립다. 셀리와 슈그는 가장 좋은 친구였으니까. 셀리는 슈그가 돌아오길 바란다. 그 우정이 너무나 그립다.



유일하게 괴로운 건 슈그가 돌아온다는 말을 안 한다는 거야. 나는 슈그가 보고 싶어. 슈그와의 우정이 어찌나 그리운지 슈그가 저메인을 데리고 오겠다고 해도 두 사람 모두를 환영해줄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려고 애쓰다가 죽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뭐라고 슈그에게 누구를 사랑하라 마라 할 수 있겠어? 내가 할일은 그저 스스로 진실되게 그녀를 사랑하는 것뿐이야.-《컬러 퍼플》, 앨리스 워커, P346



아아, 나의 연인이 나의 가장 좋은 친구이기도 하다는 것은 축복인가 아닌가.




연인이 가장 좋은 친구이기도 하다는 것은 축복일 것이다. 그런 행운은 좀처럼 찾아올 수 없으니까. 연인이 가장 좋은 친구이기도 하다는 것은 가장 궁극적인 관계가 아닌가.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게 아닐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마땅해야 하는게 아닌가. 그게 어려워도 실은 그래야 하는거잖아? 그러나 이건 위험이 너무 크다. 연인과 헤어졌을 때 가장 좋은 친구 역시 동시에 사라져버려. 리스크가 너무 크다. 고위험.. 최은영이 단편에서 말했듯이, 연인과 헤어지고난 후의 슬픔이나 고민을 가장 잘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친구 관계인 것을 유지하면, 셀리처럼 내 사랑의 새로운 사랑에 대한 얘기를 듣고 고통에 몸부림 쳐야해. 아아, 어쩌란 말인가.

나는 연인과 친구를 분리해둔 채로 살았었고 그것이 정신건강에 더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연인과 가장 좋은 친구가 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건 그 당시에 극도의 행복과 안정감을 주지만, 헤어지고 난뒤에 멘탈 찢기는게 장난이 아녀.. 최은영의 소설처럼, 내 모든 슬픔과 아픔을 다 잘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는 그와 헤어지기까지 내가 겪었던 고민들과 그와 헤어지고 나서 아팠던 일들, 그를 기다리는 마음, 새로운 사람을 만났던 시간들, 새로운 남자를 만났는데 섹스가 즐겁지 않았던 것들까지, 이 모든 얘기를 가장 잘 들어줄 사람이 그였는데 그 사람과 헤어져버려서 리스크가 너무 커... 나는 아직까지도 내 생각과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이 없다. 동성의 친구들조차 이해하지 못할 것들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그사람일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이 없다. 연인과 가장 친한 친구가 동시에 사라져버리는 건 인생에서 너무 치명적이야.. 그래서 친구만 가져올까, 생각해보지만, 그랬다가 셀리처럼 그의 말들로 나를 죽이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아니야, 이제 좀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그런 것들을 다스릴 수 있다, 고 생각해보지만 그렇다면, 친구는 과연 나 혼자의 마음먹기에 따라 할 수 있는 것인가. 연인이든 친구든 나 하나의 의지로는 되지 않는다. 내가 내민 손을 상대가 잡아야 가능한 것인데, 나는 과연 무엇을 잃은 것인가...



그러니 연인과 가장 좋은 친구가 따로 있다는 것은 또 그런대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것이다. <저녁 같이 드실래요>에서 우도희는 전남친의 집착이 짜증나고 새로운 남자에 대한 호감이 자라는 시점에 항상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친한 친구가 있다. 혼자 침대에서 뒤척이기도 하고 혼자 중얼대기도 하지만 그래도 연락해주는 친구가 있다. 썸남때문에 고민이라고 하면 '저질러버렷!'하고 말해주는 친구가 있다. 다쳤다고 하면 죽을 싸들고 오는 친구가 있다. 어쩌면 우리가 좀 더 안정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연인과 가장 좋은 친구를 분리해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아 모르겠다. 연인이 가장 좋은 친구가 아닌건, 사실 연인으로도 별로라는 거 아녀? 그냥 다들 알아서 잘 살자. 마음대로 살아요.. 연인이 가장 좋은 친구이든 아니든, 건강한 관계 여러개 만들어놓고 한 사람에게만 몰빵하진 말자. 그것은 하이 리스크에 다름 아니여... 우리는 살아가야 할터이니...



제이슨 므라즈는 <Lucky>에서 가장 좋은 친구가 연인이 되다니, 이 얼마나 행운인가, 노래하지만, 오오, 제이슨 므라즈여, 그것은 하이 리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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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6-17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 시간 축복이라 생각했지만, 축복이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을 이 페이퍼를 읽고 나서 하게 됐어요. 한 사람이 나의 모든 면를 이해할 수 없다고도 생각하구요. 오후에 읽은 <빌레뜨>에도 셀리 같은 마음이 그려져서 전 무척 괴로웠다죠.
락방님 페이퍼 전체적인 내용은 좀 슬픈데 그런데도 전 몇번이나 웃었답니다. 남자들의 후까시야~ 뭐 이런 명문장 덕분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06-17 16:31   좋아요 0 | URL
연인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과 가장 좋은 친구가 되는게 너무 당연한 거잖아요. 가장 좋은 친구가 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연인이 되겠어요? 그런데 그걸 한사람이 다해주면 그 사람이 사라졌을 때.. 전 어떡해요? 오 마이 갓 영혼이 박살나는거죠. 제가 제 삶을 잘 지탱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래서 단단한 관계를 여러개 만들어두는게 중요한 것 같아요. 단단한 관계는 그러나 원한다고 다 되는게 아니죠. 제가 상대에게 다정하고 마음을 열어야 상대 역시 저한테 그럴테니까요. 저는 여성주의 책 같이읽는 분들이 계셔서 너무 좋아요.. 우리 다정한 똑똑이들....

페이퍼가 슬픈데 웃음이 나는건 우리 삶이 그렇기 때문일겁니다. 살다보면 슬프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뭐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이 페이퍼는 삶을 녹여낸 뛰어난 페이퍼다, 뭐 그런 말이 되는겁니다. 엣헴.

단발머리 2020-06-17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제가 땡투했어요.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9월 도서에요. 부자되세요! 😤

다락방 2020-06-17 16:28   좋아요 0 | URL
네? 벌써 9월 도서를 사셨다고요? 8월 도서도 이미 준비된걸로 아는데, 아니, 비연님에 이어 단발머리님도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에 진심인 부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땡투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부자가 되는데 이렇게 도움을 주시네요. 복받으세요, 단발머리님. 샤라라랑~~

2020-06-18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18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18 1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18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