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지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페미니즘에 관심이 생기고부터 지금까지 소설을 제외하고도 80여권 정도의 페미니즘 서적을 읽어왔다. 어렵지 않게 에세이부터 시작해 소위 벽돌책이라 불리우는 책들까지. 그렇게 읽고나니 가끔 어떤 책들에 대해서는 '이건 내가 읽지 않아도 좋을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됐는데, '우에노 지즈코'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도 그중 하나였다. 사둔지는 오래였지만 이제는 '이런 기본적인 건 읽지 않아도 될 것같다'는 생각을 한거다. 그러나 나는 읽었고, 읽으면서는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일본 최고의 여성학자이며 사회학자라는 명성에 걸맞게 우에노 지즈코는 여성혐오에 대해서 아주 날카롭게 파악하고 분석한 것을 이 책에 알기 쉽게 썼기 때문이다. 우에노 지즈코의 책을 전에도 몇 권 읽어본 적이 있던바, 우에노 지즈코는 기득권을 가진 남성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비판하는데도 전혀 망설임이 없다. 이미 유명한 책(혹은 작품)을 보란듯이 비판할 수 있다는 것도 너무 좋았고, 사회현상들 이면에 숨겨진 여성혐오를 보란듯이 까발리는 데에는 속이 다 시원해졌다.


날카로운 분석에도 불구하고 포르노에 대해서는 규제하지 말자고 하는데에서 좀 놀랐다. 우에노 지즈코는 '상상력을 막아서는 안된다'라고 하는데, 나는 이미 포르노라는 것이 여성과 아이 그리고 인종에 대해서까지 혐오표현이라는 페미니스트들과 생각을 같이하는 바, 거기에 대해서는 우에노 지즈코와 의견을 달리했다. 우에노 지즈코는 상상력을 규제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포르노를 금지하자는 데에는 찬성하지 않으면서 그러나 아동 포르노도 안되고, 트라우마를 건드려도 안된다는 등의 조건들을 내건다. 나는 거기서 좀 갸웃했다.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저것도 고려해야 해, 라고 한다는 것은 어찌됐든 그것이 어떤 식의 피해를 가져올 것이 있다는 걸 안다는 것일텐데, 그렇다면 '되고' '안되고'의 기준을 대체 누가 어떻게 정할 수 있단 말인가.

우에노 지즈코의 포르노에 대한 입장에 대해서는, 이 책이 10년전의 책이기도 하고 또 우에노 지즈코가 1948년생인만큼, 현재의 포르노가 어떤 식의 영상을 송출하는지에 대해서는, '게일 다인스'가 자신의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 서둘러 부연해 놓아야 하는 것은, 포르노라고 하는 표상 안이라 할지라도 실재하는 어린이를 모델로 사용한 차일드 포르노는 별도라는 사실이다.

모델의 현실과 모델의 연기 사이의 경계는 대단히 모호하다. 살인 현장을 연기로 표현하는 피해자 모델은 살아 돌아오는 것이 가능하다. 미디어에 넘쳐나는 살인 신을 단속하라는 미디어 규제는 존재하지 않지만, 만약 그것이 연기자에게 트라우마적인 체험이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포르노 모델이 시나리오에 없는 실제 강간을 당하게 된다면 당연히 인권침해로 볼 수 있다. 또한 트라우마적인 포르노를 연기함으로써 받게 되는 영향 역시 간과해서는 안된다. (p.101)


포르노에 대해 표현의 자유이며 그것이 가져올 긍정적인 효과들도 있다고 생각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일단 나는 그런 쪽이 아니다. 나는 포르노 반대, 성매매에 반대한다.


내가 그것에 대해 우에노 지즈코랑 입장이 다르다고 해서 이 책이 나쁜 것도 결코 아니고 우에노 지즈코를 비난하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은 페미니즘, 사실 그보다는 '여성 혐오란 무엇인가'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아주 날카로운 안내서가 될것이다. 이미 페미니즘 책을 숱하게 읽어온 사람이라도 다시 읽어보기에 좋은 책이고. 여성혐오가 대체 뭔데,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혹은 '나는 여자 좋아해, 나는 혐오하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읽어보기에 매우 유용하다. 여자라고 여성혐오를 안하는 게 아니고 오히려 여성혐오를 했던 자신을 파악해야 여성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으니, 역시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호색‘한 남자가 여성을 혐오한다고 하면 모순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misogyny‘라는 연단어는 번역하기가 힘들다. ‘misogyny‘말고 ‘women hating‘이라는 표현도 있지만, 호색한 남자가 ‘women hating‘하다고 하면 더욱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바람둥이‘라 일컬어지는 남자들을 떠올리면 좋다. 그들은 ‘자기것‘으로 만든 여자의 수를 자랑하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여자라면 누구든 상관 않고 발정할 정도로 여체와 여성기, 여성성의 기호나 신체 부위에 자동적으로 반응하도록 조건 훈련된 ‘파블로프의 개‘가 바로 자신이란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그들이 반응하고 있는 것은 여성이 아니라 여성성의 기호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모든 여성을 ‘여자‘라고 하는 하나의 범주에 일괄 처리하는 그들을 이해할 방법이 없다. - P13

나가이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두 평짜리 방의 장지》(1972)에는 몸을 파는 여성에게 쾌락을 부여해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게 해주는 사창가 손님들의 ‘신사적‘ 문화가 그려져 있다. 이 소설은 남성 지배의 궁극적 형태를 언어화한 텍스트인 것이다. - P15

남자들 마음 속에는 ‘여자 없이 어떻게 안 될까‘ 하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 때문에 이성애 중심의 근대인에 비해 소년애를 칭송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여성 혐오가 더욱 철저하게 보이는 것이다. 남성성을 미화하는 동성애자들에 대해 내가 느끼는 불신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다. - P16

‘자기 여자‘란 말은 참으로 잘도 만들어낸 표현이다. ‘남자다움‘은 한 여자를 자기 지배하에 두는 것으로써 담보된다. ‘자기 마누라 하나 휘어잡지 못하는 남자가 무슨 남자냐‘는 판정 기준은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결코 인정하지 않는 이러한 여성의 객체화, 타자화-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여성 멸시-를 ‘여성 혐오‘라고 한다. - P37

사실 인간의 역사에는 남성/여성의 이항뿐만 아니라 ‘제3의 성‘이라 불리는 남성도 여서도 아닌 중간적인 젠더가 언제나 존재했다. 북미 인디언의 베르다쉬berdache, 인도의 히즈라hijra, 통가의 파카레이티fakaleiti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 범주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이다. 둘째, 여장女裝과 같은 여성성 기호에 의해 ‘여성화‘ 되어 있다. 셋째, 종종 종교상의 의례적 역할뿐만 아니라 (남성을 상대로 한)매춘에도 종사하고 있다. 그들은 ‘남성이면서 남성이 되지 못한 남성‘ ‘여성화된 남성‘이며 그들의 존재 의의는 오로지 남성을 위한 ‘성적 객체‘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제3의 성‘을 ‘n개의 성‘에 대한 증거로 언급해 온 이들이 많으나, 이상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남성과 여성의 중간적 성이라기보다는 성별이원제 하에 존재하는 하위 범주이다. 이들을 ‘제3의 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호칭인 것이다. - P38

누가 생각해낸 것인지는 모르지만 ‘위안부‘라는 명칭은 참으로 절묘하게도 지은 이름이다. 이 ‘위안‘은 오로지 남성의 ‘위안‘이지 ‘위안부‘에게는 지옥의 노예 노동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존자에 의한 증언이 등장할 때마다 "나는 ‘위안부‘가 아닙니다"라고 그 호칭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 P53

‘성적 약자론‘은 진짜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과 연결됨으로써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신체적, 사회적, 경제적, 기타 등등의 약자인 장애인 남성은 성의 자유 시장에서도 성적 약자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러한 성적 약자 장애인의 성욕은 충족될 권리가 있다고 인정되어 장애인의 매춘을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 마스터베이션 혹은 성행위를 위한 돌봄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등이 논의되고 있다. 여기서도 여성 장애인의 ‘성적 약자‘ 문제는, 의도적인지 비의도적인지는 모르나, 간과되고 있다. - P65

‘전원 결혼 사회‘는 여성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 그것은 결혼이 강제였던 사회, 결혼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선택지가 없었던 시대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 시대 결혼은 여성의 ‘평생 직장‘이라 불렸다.
그에 반해 결혼이 선택지의 하나인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여성의 혼인율은 저하하고 이혼율은 상승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여성에게 ‘평생 직장‘이외의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원 결혼 사회‘가 종언한 오늘날, 우치다 다츠루나 고야노 돈같은 남성론자가 ‘누구나 결혼 가능했던(해야만 했던) 시대‘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논하는 것, 야마다 마사히로와 시라가와 도코가 《결혼 활동 시대》(2008)를 논하는 것은 시대착오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P70

K군(무차별 살상 사건의 범인)은 말한다.
‘여자 친구가 있으면 일을 그만두지 않아도, 차를 도난당하지 않아도, 야반도주하지 않아도, 휴대전화 의존증에 걸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아직 희망을 가지고 있는 놈들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여자 친구‘가 모든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해줄 역전 홈런의 히든카드라 생각하는 그의 사고는 완전히 도착하고 있다. 실제 인과관계는 ‘일을 그만두거나, 차를 도난당하거나, 야반도주하거나, 휴대전화 의존증에 걸리는 놈‘한테 여자 친구가 생길 리 없다, 일 테니까.
- P74

그런데 남자에게 있어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학력이 없어도, 직장이 없어도, 수입이 없어도, ‘여자 친구만 있으면‘ 왜 역전타를 날릴 수 있는 것일까? 어째서 ‘인기‘가 다른 모든 사회적 요인을 웃도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여자 친구만 있으면 ‘나는 남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은 여성에게 선택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제2장에서 논한 세지윅의 호모소셜리티 개념에 의하면 남자는 여자에게 선택되는 것에 의해 ‘남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남자는 남성 집단의 정식 멤버로 인정됨으로써 최초로 남성이 되는 것이며 여자는 그 가입 자격을 위한 조건, 또는 그 멤버십에 사후적으로 딸려 오는 선물 같은 것이다.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은 ‘여자를 한 명 소유‘, 즉 문자 그대로 ‘자기 것을 하나 가지는‘ 상태를 가리킨다. - P74

여자가 교태를 부리며 남자를 조종하는 것을 가리켜 일본어로 ‘코털을 읽는다‘고 표현한다. 말 그대로 남자에게 기댄 채 아양을 떨며 대각선 45도 위를 올려다보면 시선 정중앙에 콧구멍이 오게 된다. - P77

‘여자 친구가 있었으면‘하고 바라던 K군의 외침이 진정으로 ‘사람과 관계를 가지고 싶다‘는 욕망이었다면 그가 선택했어야 하는 행동은 아키하바라에서 타인을 칼로 찌르는 행동이어서는 안 됐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행동을 근거로 판단했을 때, K군과 J군이 공통적으로 바랐던 것은 자신을 ‘남성으로 만들어주는‘, 독선적인 ‘여성 소유‘욕망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 P84

성욕은 개인의 내부에서 완결되는 대뇌 작용의 현상이다. 전미 성교육 정보 협의회(SIECUS)에 의한 정의와 같이 ‘성적 욕망‘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섹슈얼리티‘는 ‘다리 사이between the legs‘가 아니라 ‘귀 사이between the ears‘, 즉 대뇌 안에 있다. 대문에 섹슈얼리티 연구는 사실 하반신 연구가 아니다. 무엇이 성욕의 장치가 되는가는 개인이나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육체가 눈앞에 있지 않으면 성욕을 느낄 수 없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나 시렞로는 단순히 기호화된 신체의 일부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으며 완전히 버추얼한 심벌이나 영상으로도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사물이나 기호에 반응하는 즉물적即物的 경우도 있을 것이고 특정 판타지를 요구하는 복잡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완전히 오리지널할 수는 없으며 문화에 의해 학습된 ‘기성품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자기 식의 버전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 P88

나는 예전에 가부장제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정의한 적이 있다.
‘가부장제란 자신의 다리 사이로 낳은 아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멸시하도록 기르는 시스템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성을 멸시하는 것은 가능해도 어머니를 멸시하는 것은 남성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자기의 ‘근본‘을 더럽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 P147

사람은 ‘여성‘이 될 때 ‘여성‘이라는 범주가 짊어진 역사적 여성 혐오의 모든 것을 일단 받아들인다. 그 범주가 부여하는 지정석에 안주하면 ‘여성‘은 탄생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란 그 ‘지정석‘에 위화감을 느끼는 자, 여성 혐오에 적응하지 않은 자들을 가리킨다. 때문에 여성 혐오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페미니스트는 없다.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이 여성 혐오와의 갈등을 의미한다. - P158

시즈미는 ‘OL위원회‘를 조직하여 젊은 여성의 생생한 목소리를 모아 분석하였는데, 이 책은 ‘아버지와의 관계‘에 관한 약 1,500명 여성의 이야기를 모아 분석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약 50퍼센트의 딸들이 아버지를 싫어하고 있다‘고 한다. - P193

가정 내에서 최약자인 딸의 공격은 강자인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직접적으로 향하지 않는다. 약자의 공격은 더욱 약하고 저항하지 않는 이, 즉 자신의 신체와 영혼, 섹슈얼리티로 향한다. 아들의 공격성이 단순히 타벌 또는 타자에 대한 상해 행위로 향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렇게 자기 신체를 시궁창에 던져 넣듯 남성에게 바치는 성적 일탈(그 안에 매춘 행위도 포함된다)은 섭식 장애나 손목을 긋는 자해 행위와 같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 P227

프라이버시는 누구를 지키고 있는가? 바로 강자이다. 이 대답은 성추행과 가정 폭력 피해자, 성적 소수자에 의해 밝혀진 사실이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페미니즘이 부정하고 있는 것은 ‘남성성‘이지 개개의 ‘남성 존재‘가 아니다. 만약 ‘남성‘으로 분류되어 있는 자들이, 여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듯, ‘나라는 존재를 긍정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그리고 그것은 누구에게 있어서도 정당한 바람이다-여자들이 여성 혐오와 싸워왔듯이 남자들도 자신의 여성 혐오와 싸우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 P302

‘게이와 페미니즘은 같이 투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다음과 같은 답을 내린 적이 있다. ‘Yes, but 여성 혐오적이지 않은 게이들이라면 가능하다‘. 추가로 ‘섹슈얼리티 여하를 불문하고 여성혐오적이지 않은 남자들이라면‘이라는 조건을 덧붙여도 좋다. 페미니스트가 여성 혐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더욱 신중하게 ‘여성 혐오아 싸우고 있는 남자들이라면‘이라고. - P303

페미니즘은 여성에게 있어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길이었다. 남성에게도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길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 여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기 혐오‘와 싸우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제시하는 것은 더 이상 여성의 역할이 아니다.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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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0-05-12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문 중에 마지막 문구 더 콕콕 와박혀요.

다락방 2020-05-12 17:40   좋아요 0 | URL
수연 님 요즘에 아주 날개달고 책 읽으시더라고요. 쉬엄쉬엄 하세요. 지치지 않으려면 꾸준히 오래 천천히 가야지요. 화이팅!

단발머리 2020-05-12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우에노 지즈코라면 <나의 페미니즘 공부법>의 하루카 요코가 생각나요. 다정한 선생님은 아닌듯 하지만 ㅎㅎㅎㅎ 좋은 선생님 같기는 해요. 우리에게도 이 정도의 여성주의 학자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 좀 안타깝기도 해요. 학문적 업적, 성과도 있겠지만 우에노 지즈코가 학계에서 자리잡고 일해왔기 때문에 이정도라도 평가받는거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고요.
저도 이 책 읽어보려고요^^

다락방 2020-05-12 17:41   좋아요 1 | URL
전 이 책이 생각보다 괜찮아서 우에노 지즈코의 책들을 천천히 다 찾아서 읽어볼 생각이에요. 날카롭고 거친 태도가 너무 좋아요. ㅋㅋㅋㅋㅋ 이런 분이 일본에 계시다니 한편 다행이란 생각도 들고 말이지요. 이 책 읽어보세요, 단발머리님. 그리고 우리 우에노 지즈코도 열심히 찾아 읽고 아무튼 세상의 페미니즘 책들 다 정복해버립시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