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소설을 지금 당장 읽고 싶은 급한 마음에 어제 '미야베 미유키'의 신간을 부랴부랴 주문했는데, 기사 하나를 읽고서는 지금 당장 읽고 싶은 책이 바뀌었다. '게일 다인스'의 《포르노랜드》.
내가 한 주문을 취소하고 이 책을 넣어 다시 주문하려고 하는데, 이미 출고준비중이어서 취소가 안되더라. 하는수없이 새로 주문해야겠다, 참을까, 아니야 당장 읽고싶다, 하는데, 마침 다정한 알라디너가 봄맞이 책선물을 해주고 싶다며 읽고 싶은 책을 얘기해달라고 하는게 아닌가. 으앗. 말해도 될까, 그렇게 뻔뻔해도 될까 하는 고민은 사실 얼마 안하고 나는 대뜸 이 책을 읽고 싶노라 말했고, 그렇게 이 책은 내가 주문한 책보다 빨리 내게 도착했다.
저자 '게일 다인스'는 30년 넘게 포르노 산업을 연구해왔다 했다. 나는 이 책을 읽기도 전부터, 이 책은 내가 읽은 다른 책들과 합쳐 <포르노 3종셋트>라 부르면 되겠다 싶었다. '안드레아 드워킨'의 《포르노그라피》, '캐서린 맥키넌'의 《포르노에 도전한다》에 이어서 말이다. 남자들이 만약 그들 입으로 '포르노 3종셋트'란 워딩을 내뱉는다면, 그 말에 담긴 뜻은 나의 것과 얼마나 다를까. 오랜시간 포르노를 연구한 여성학자들의 책들로 이루어진 포르노 3종셋트와, 남자들이 말하는 포르노3종셋트는 그 결이 극과 극이겠지.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봤던 포르노 중 가장 수위가 높았던 것들을 포르노 3종셋트라 칭하지 않을까. 아마 그들이 본 게 너무 많아서, 3종으로는 차마 추리지 못할 수도 있겠다.
오늘 출근길에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머리말부터 한숨이 나고 답답해졌다. 자, 잠깐 보자.
남자가 포르노를 이용한 경험에 관해 얘기한다면, 여자는 조금 다른 경험을 고백한다. 나와 대화를 나눈 여자 대학생들은 대부분 곤조 포르노를 본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곤조는 점점 더 그들의 섹슈얼리티를 잠식하고 있다. 남자 파트너가 포르노 섹스를 그들의 몸에 시도해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섹스 파트너가 항문성교를 강요하거나, 얼굴에 사정하고 싶어 하거나, 포르노를 섹스 보조용으로 이용할 때마다, 이 여자들은 포르노 문화의 최전방에 서게 된다. 이들 중 몇몇은 항복하고, 일부는 협상하며, 다수는 자신의 섹스, 데이트 결혼 상대인 남자가 왜 항상 성적 한계선을 넘어서려고 하는지 혼란스러워한다. (p.22)
나는 대부분의 여자들에게 위와 같은 경험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게일 다인스가 언급한것처럼, 그리고 그 여자들중 몇몇은 항복하고, 일부는 협상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부는, 어디까지 해줘야 할까, 이거 아닌것 같은데 고개를 끄덕여아 하는걸까, 왜 이남자는 이걸 하고 싶어할까, 왜 이걸 내가 해주길 원할까, 나는 이 남자를 좋아하는데, 그렇다면 그 남자가 내 얼굴에 사정하는 걸 허락해야 하는걸까, 하고 혼란스러워할 것이다. 나 역시 그 어떤 일부 여자들중의 하나였으므로 위의 문장을 읽는데 너무 슬펐다. 슬프고 아팠다. 우리가 '함께' 섹스를 하기 위해 옷을 벗고 한침대에 들었다해도, 그 당시에 그가 나를 대한건 정말 '사랑하는 한 인간'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저 머리말에 불과할뿐인 내용, 고작 22쪽의 내용일 뿐인데 가슴을 망치로 수차례 내려치는 것 같았다. 때로는 고개 끄덕이면서, 때로는 웃으면서, 때로는 거절하면서, 그러나 여자들은 머릿속으로는 사실 계속 되뇌여야 하지 않았을까. 이건 내가 원하는거야, 나는 이 남자를 사랑하니까, 이거 나도 한 번 해보고 싶었던 거잖아, 뭐 어때 이것이 성적 자유지, 이것이 성적 일탈이지, 이거 나쁜거 아니야, 더한걸 시도하는 건 도전이지, 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하고 변명하고 변명해야 했던 시간들이, 우리에게 있지 않았나. 그 한침대 에서의 나는 그에게 사랑하는 인간이기보다는, 가슴 아프지만, 그 남자가 보았던 포르노 영상의 실험도구가 아니었던가. 니 얼굴에 싸보고 싶어, 니 항문에 넣고 싶어, 는 과연 그 남자가 포르노를 전혀 접하지 않았다면, 그런 영상을 본 적이 없다면, 그의 순수한 머리와 가슴에서 나올 수 있는 요구인걸까. 그걸 '보지 못했다면', 그걸 '알지 못했다면', 그렇다면 그걸 요구하거나 해보고 싶어할 수 있었을까.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여자들은 포르노를 본 적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포르노속의 여자들처럼 행동해야 하지 않았던가.
포르노를 연구하지 않아도 실상 여자들은 스스로 깨닫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포르노를 연구한 여성학자들은 이 점에 대해서 언제나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당신이 받은 폭력은 그 남자에게 흥분이고, 당신이 받은 고문은 그 남자에게는 쾌감이다. 당신을 보는 것은 이제 그 남자에게는 마스터베이션 거리가 된다.
- 《포르노에 도전한다》, 캐서린 맥키넌, p.24
왜 여자들은 포르노를 보지도 않았는데 포르노를 살아야 하는걸까. 왜 포르노물은 그저 포르노물로써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영화에서, 뮤직비디오에서, 광고에서 그것을 재현하며 또 전파하는가. 왜 여자들은 포르노를 보지도 않았으면서 포르노속의 여자처럼 꾸미게 되는가.
주류 잡지, 포르노 업계, 심지어는 일부 페미니스트조차 이런 변화를 두고 우리 사회가 점점 더 성적으로 자유로워지고 있다는 증거라며 축배를 드는 동안, 나와 대화를 나누는 많은 여학생들은 그 축제를 즐기지 못한다. 그들은 압박받고, 교묘하게 조종당하고, 획일화된 모습을 따르도록 강요받는다고 느낀다. 이들이 만나는 남자는 포르노 섹스를 기대한다. 그것은 유대감도 친밀함도 없이 익명으로 전개되는 섹스이며, 그것을 얻지 못한 남자는 그저 다른 여자를 찾아 나설 뿐이다. 여자가 남자의 기대에 부응한다 해도 마차가지다. 포르노 문화에서는 어떤 여자든 어느 정도까지 통상적인 '섹시함'의 기준을 충족한다면 다른 여자와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p.23)
물리적 폭력을 동반하지 않은 강간에 있어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건 가스라이팅과 그루밍이다. 상대 여성보다 나이가 많거나 지위가 높거나 혹은 유명한 남자들이 '섹스를 알아야 풍부한 글이 나와', '이런 경험을 해봐야해', '사랑한다면 이렇게 자꾸 만지고 싶은거야'를 끈질기게 반복하면서 결국 여자의 몸과 영혼을 착취한다. 섹스를 거부할라치면 상대를 꽉 막힌 여성으로, 보수적인 여성으로, 고지식한 여성으로 낙인찍으면서. 특히나 젊고 어린 여성에게 성적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부르짖는 사람은 누구인가. 젊고 어린 여성이 성적으로 자유로워졌을 때 가장 신나는 건 누구인가. 아, 너무 답답하고 가슴이 아프다. 이런 숱한 가스라이팅 중에 나 역시 들어본 말이 있어 가슴 아프다. 여자들은 포르노를 보지도 않았으면서 결국 포르노속의 여자가 되어야 하는건가, 자신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면서 어느새 포르노속의 여자가 되어있기도 하고. 포르노를 너무 많이 보고 살아온 남성들 때문에, 여자들은 포르노를 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느틈에 포르노를 살고 있다.
‘치모를 왜 그렇게 수치스럽게 잘랐느냐는 질문을 받자, 카타리나는 완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고 답하였다‘ 여자가 내밀하게 원하는
것이 그 사진에서는 아주 우연히도 남자가 여자들에게 바라는 것과 일치하였다. 이것은 포르노그래피의 가장 비열한 주제이다.
남자들이 주장하는 것을 해명해 보면, 여자, 자유스러운 여자들의 비밀스럽고 은밀하고 생생한 육욕이라는 것이다.
- 《포르노그래피》, 안드레아 드워킨, P219
당신이 성기의 털을 아이같이 미는 것은, 정말 당신의 뜻인가? 당신이 겨드랑이를 매끄럽게 만드는 것, 종아리를 매끄럽게 만드는 것은 정말로 당신 자신을 위해서인가? 당신이 잘록한 허리를 원하는 것은 정말 당신 자신을 위해서인가? 더 큰 가슴은? 긴 머리는? 더 도톰한 입술은?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은? 짧은 치마는?
그게 진정 당신이 원하는거고, 그게 정말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면, 그렇다면 그것은 왜 공교롭게도 포르노속의 여성들의 모습과 일치하는가? 그것은 그저 우연인가?
당신의 성적 자유가 남성들이 즐겨 봐왔던 포르노와는 아무 상관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아직 머리말인데도 나는 이토록이나 처절해진다. 본문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사실 내가 몰랐던 것들,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 전혀 색다른 것들이 나올 것 같진 않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랬던 적 없는 것처럼 화가 나고 속상하고 슬퍼지겠지.
그래도 읽는다. 읽을 것이다.
어제 내가 보았던 기사는 이것이다. ☞ https://news.v.daum.net/v/20200403163440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