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얼의 시사친구, 듣똑라> 라는 오디오파일 프로그램이 있다. 나는 팟캐스트나 오디오파일을 거의 듣지 않는 편인데, 요즘은 혼밥을 자주 하는 편이고 그 때 함께하기에는 독서나 영화보기 보다도 이렇게 '듣는' 프로그램이 딱이다. 영화는 화면(자막)을 봐야 하니까. 듣똑라 라는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그 프로그램 명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얼마전 트윗을 통해 이 프로그램에 이수정 교수님이 출연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래서 오오, 하고 이수정 교수님 편을 듣게 되었다.
이수정 교수님이라면, 뭐랄까, 딱히 페미니스트 라고 본인을 정체화하지도 않으시고, <이수정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에서 이다혜 기자랑 얘기하는 걸 들어도 '나는 무조건 여자편이다' 라는 식의 뉘앙스로도 전혀 얘기하지 않는 분이시지만, 그 분이 애초에 범죄심리학을 공부하고 또 지금도 계속 열심히 일하고 있는 이유는 피해를 당하는 약자의 편을 들기 위해서라고 누누이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런 피해는 여자나 아동들이 많이 당하고. 요즘은 아주 열심히 채팅앱의 미성년자 성폭행 피해를 알리고 막기 위해 힘을 쓰고 계신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정체화하는 사람을 보는 것도 힘이 되지만, 한 여성이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누구보다 앞서 나가고 또 정상의 자리에 있는 걸 보는 건, 그것대로 아주 큰 의미가 있다. 얼마전에 '한나 아렌트' 전기를 읽고 생각했던 것처럼, 여성이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정상에 있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다른 여성들에게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욕망과 실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거니까. 그런 점에서 요즘 이수정 교수님은 내가 매우 응원하는 분이고 또 감사히 생각하는 분이다. 작년에는 BBC 의<올해의 여성 100인>에 선정되기도 하셨는데, 아, 얼마나 롤모델로 적합한가.
그저 정상에 계신 그 존재만으로도 감사하고 그래서 듣똑라를 듣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마침 공부 얘기를 하셨다. 국내에서 박사학위까지 따고 정부의 일을 하게 되었지만 데이터분석으로 어떻게 강력범죄위험성을 알 수 있을까 싶어 재소자 면담을 신청한다. 그러나 너무 위험한 범죄자라 만나게 해주지를 않았고, 이수정 교수님은 이렇게 데이터 분석을 하는 것도 의미있지만 더 잘 알려면 재소자를 만나보는 게 맞는거다 싶어 해외파견을 신청한다. 여전히 사형제도가 존재하고 엄벌주의인 텍사스 헌츠빌로 가 그곳 대학에서 오전엔 대학원생들과 재소자들을 만나 심리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오후에는 대한민국에는 없는 형사정책 학부수업을 들었다고 한다. 이 얘기를 듣는데 너무 짜릿한거다. 누군가 정상에 있다면 정말 괜히 있는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달까. 게다가 여자라면 더하다. 남자들이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고 뒤를 봐주고 하는 것에서 멀어져있고, '여자라서' 한계를 느낄 수 밖에 없는 순간들이 수시로 닥쳐올텐데 정상에 올랐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인걸까.
듣똑라는 기자 세 명이 진행하는 프로니만큼, 기자라면 누구나 이수정 교수님께 전화해 의견을 듣지 않은 적이 없을 거라 했는데, 바쁜데도 어떻게 그렇게 기자들에게 대답을 잘해주냐는 질문이 나왔다. 이수정 교수님은 언젠가의 여름에 '강간을 피하는 방법'에 대해 기자가 묻는 걸 듣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해주기로 했다 하셨다. 강간, 성폭행을 피하는 방법이 어디있냐고, 그런 멍청한 질문이 어디있냐고. 그걸 자신이 말해주지 않으면 모를 것 같아서 계속 말하기로 했다는 거다. 최근에는 민주당에서 영입하려고 했다는데 5분 고민해보고 거절했다고 한다. 비비씨에서 자신을 선정한 건 자신의 지위때문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열심히 떠들고 있었기 때문일거라며, 그동안 하는 일이 잘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일거라는 거다. 그러니 자신은 앞으로도 솔잎을 먹는 송충이처럼 하는 일을 계속 열심히 할 거라고.
인터뷰가 다 참 좋았는데 특히나 외국가서 공부하는 얘기를 듣는 게 너무 좋았다. 짧게 나오긴 했지만, 국내에서도 이미 박사 학위를 땄으면서도 부족함을 느끼고 더 공부하는 부분이 너무 좋은 거다. 게다가 외국에서 공부하는 건 한국에서 모국어로 공부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을텐데. 내가 부족하고 그러니 더 해야한다, 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많은 걸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능한 사고방식인 것 같다.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뭘 모르는지도 모르니까. 내게 필요한 게 뭔지도 파악하지 못하니까. 그저 자신이 아는 게 최선이고 최고라고, 전부라고, 옳다고 생각하니까. 으으, 역시 공부하는 여성 그리고 자신이 맡은 바 일을 꾸준히, 한결같이 열심히 해 정상에 오른 여성의 이야기를 듣는 건 정말 큰 힘이 된다.
이수정 교수님 인터뷰 때문에 '공부'에 대해 또다시 생각하게 됐고, 그래서 사두고 미뤄뒀던 '타라 웨스트오버'의 《배움의 발견》을 읽기 시작했다. 아직 156쪽 까지밖에 못읽었고, 이 책의 주인공이자 작가인 '타라'는 열한살 무렵이다.
타라의 아버지는 절실한 모르몬교 신자이며 학교와 병원을 불신한다. 그곳은 사탄이 잠재해 있는 곳..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도 않고 병원에 보내지도 않으면서 아프면 아이들의 엄마가 약초로 치료해주는 방법으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다. 폐철 처리장에서 폐철을 회수하고 그걸 팔아 돈을 버는데, 그 과정에서 아이들로 하여금 그 일을 돕도록 한다. 아직 어린 타라도 그렇게 폐철처리장에 가 일을 하는데, 하아, 그곳에서 다른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크게 다친다. 폐철을 분리하는 과정에서 던지기도 하고 떨어뜨리기도 하면서 위험에 노출되는 상황이 빈번히 일어나는 거다.
어린 '타라'는 그곳에서 크게 다치고 다시는 폐철 처리장에 가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제대로된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는 타라는, 자신이 그곳에 가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언니처럼 다른 곳에서 돈을 버는 것' 이라 생각하고 마을로 가 베이비시터 자리를 구하고, 마카다미아 포장하는 일을 구한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베이비시터 임금을 받지 않을테니 내게도 피아노를 가르쳐달라'고 요구하며 피아노를 배우게 된다. 처음 피아노 독주를 들었을 때의 짜릿함과 강렬함, 그래서 배우고자 하는 욕망이 어린 타라에게 저절로 생겼던 거다. 이건 오빠가 들려준 교회 성가 합창 레코드에서도 느꼈던 경이로움. 그렇게 타라는 자신의 욕망으로 피아노를, 댄스를 배우게 되는데 댄스복장은 아버지가 '창녀이며 사탄'같다고 한 복장이라 중간에 그만둘 수밖에 없게 되고, 이번에는 노래를 배우게 된다.
내가 읽은 부분에서는 아직 타라가 학교 공부를 시작하지 않았다. 학교를 다녀본 적도 없는 타라가 여전히 아버지의 생각이 자신을 많이 휘두르고 있어 발레하는 또래 아이들을 보며 '어린 창녀들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러나 새로움과 놀라움에 이끌려 배우고자 하는 건 경이롭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타라의 아버지는 고집이 세고 본인만의 신념에 갇혀 있다. 운전하기 위험하다는 할머니의 조언에도 이동을 감행해 큰 사고를 한 번 내고서도, 다음에 또다시 감행해 또 큰 사고를 낸다. 할머니는 그런 타라의 아버지에게 실수로부터 배우지 못한다고 하는데도 타라 아버지의 고집은 꺽이지 않는다. 1999년 12월 31일에 종말이 올거라 식량과 총을 잔뜩 준비해두지만, 그러나 그 날 종말은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라의 아버지는 '내가 잘못된걸까'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타라의 오빠는 아버지를 도와 일을 하는 과정에서 크게 화상을 입는다. 아버지에게는 막강한 권력이 있어 아직 어린 아이들은 아버지가 허락한 세상에서만 살아야 한다. 학교도 병원도 금지되고 어린 나이에 위험에 노출되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가 없다. 그저 이것이 세상이려니, 하고 살아가야 하는데, 그렇게 다쳐도 병원에 가지 못하는걸 보는 게 너무 괴로웠다. 자기 신념, 자기 고집으로 아버지는 어린 아이들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있으니까. 그 어린 자녀들에게 폐철 처리장에서 일하도록 시키다니, 아동학대가 아닌가.
타라 웨스트오버는 열여섯살까지 학교 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면서, 병원에 가본 적이 없으면서 그러나 현재는 케임브리지 박사가 되었다. 이 과정이 어떨지 너무 궁금해 빨리 읽고 싶다. 열살, 열한살의 타라가 성가의 합창 레코드를 반복해 듣고자 했던 그 욕망,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던 욕망, 댄스를, 노래를 배우며 열심히 했던 그 욕망이 다른 학문에 어떻게 적용되어 실현됐는지 너무 궁금하다.
타라 위로 오빠인 타일러도 어느 순간 아버지에 반대하며 집을 떠났다. 대학에 가고 싶다며. 타라 역시도 아버지에게 무서움을 무릅쓰고 학교에 가고 싶다고 말을 한다. 그러니까 이런 순간들. 어린 자식들이 자라서 결국은 옳지 못한, 강압적인 아버지에게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이다' 라고 얘기할 수 있는 순간들은 얼마나 짜릿한가. 어린아이들은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만큼 약하지만, 자라서 혹여라도 겪었던 부당한 일들에 목소리를 낼 수 있을만큼 강해지는 순간이 온다. 결국 아이들은 부모보다 힘이 세지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 타라가 어떻게 아버지에게 더 목소리를 높일지, 어떻게 학교로 가게 될지 너무 궁금하다. 여기까지 온것만도 너무 대단한데, 그 다음은 또 어떻게 진행될까.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래서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는 게 나는 너무 좋다.
내가 타라였다면 나는 어땠을까.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으면서 나는 타라처럼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폐철처리장에 가기 싫으니 다른 방법을 찾자'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저 아버지가 보여주는 세계가 전부인양 살면서 그렇게 늙어가진 않았을까. 사람이 자라는 데 환경은 분명 큰 영향을 미치지만, 그러나 자신의 본성 역시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아, 정말이지,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보는 건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 좋다.
아 맞다. 그래서 책을 샀다...(응?)
배움은 소중하니까..
프랑스어 첫걸음 펴본 적도 없는데 베트남어 첫걸음 산 나를 어찌해야 할까... 정말이지 답이 없다.
「난 완전히 머리가 텅 빈 여자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단다.」 나와 오드리 언니에게 그 이야기를 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자신감이 깃들었다. 「남자들은 곤경에 빠진 바보 같은 여자들을 자기가 구하고 있다고 생각하길 좋아한단다. 엄마는 그냥 비켜서서 그 사람이 영웅 역할을 하도록 해주기만 하면 됐지!」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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