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에 친구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일상적 대화에서는 혐오표현임에 분명한 대화들이 섹스 중에 오고간다면, 그것은 그저 연인들 사이의 더티토크가 되는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일상에서의 혐오표현이 침대에서는 혐오가 아닌 것이 되는걸까. 혹은 혐오임에는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 내밀한 관계에서 서로에게 그것을 말하기를 허락하는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혐오인데 참고 있는 것일까, 분위기 깨기 싫어서?


나는 섹스중에 사실 그다지 어떤 험한 대화를 해본 경험이 없다. 그래서 혐오 표현이라고 하면 섹스중에 어떤게 오고갈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그것이 혐오인가 아닌가, 혐오이나 허용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바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내게서 나오는 답이 진리일 수도 참일 수도 없겠지만, 친구가 묻는 말에 선뜻 답할 수 없었다는 거다. 그러나, 행위에 대해서라면 내 생각을 말할 수 있었다.



행위에 대해서라면 나는 요즘 매우 생각이 많았다. 요즘 포르노에 대해, 음란 영상물에 대해 무척 많이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이건 계속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는데, 시작은 DSO 계정의 음란물 신고 트윗 덕분이었다. 다른 SNS 를 잘 하지 않아서 모르지만, 트윗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음란물들이 아주 많이 올라온다. 아예 성을 매매하는 계정에서부터 오프라인에서 만나 섹스를 하자는 계정까지 수두룩하고, 지인들의 사진으로 음란사진에 합성해주겠다는 것, 그리고 성관계 영상까지. 신고를 하면서 알게됐는데, 거기에 올라오는 성관계 영상은 소위 내가 알아온, 내가 경험해온 성관계 영상이 아니었다. 가학적인건 물론이고 불쾌함을 넘어 폭력적이고 수치스러웠으며 혐오스러웠다.



나는 살면서 포르노 영화를 본 적이 거의 없다. 이는 몇 번 언급한 적이 있는데, 감정 없는 육체관계에 대해 통 흥미를 느낄 수 없는게 아닌가, 해서도 그렇고 포르노를 어디서 어떻게 봐야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십대 초반에 [터보레이터]를 본 게 전부라 할 수 있는데, 터보레이터의 영상속 내용도 매우 충격적이었다. 터미네이터를 본따 만들었으나, 내용은 확 뒤집어져서, 미래에서 여자를 강간하기 위해 온거다. 그런데 영상 속 여자들이 매우 특이했던 게, 처음엔 강간하러 온 남자들을 보고 놀라지만, 이내 강간을 즐기고 헤어지면서는 다시 오기를 바란다는 거다. 이것이 강간판타지라는 것인가.



강간은 다른 사람의 몸에 성적으로 침범하는 것을 의미한다. 강간은 내가 허락하지 않았으나 내 몸에 억지로 밀고 들어옴을 의미한다. 나는 이것에 대해서라면 사람이 몇살이든, 성별이 무엇이든, 본능적으로 싫어할 것이며 두려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게 '어떤 여자들은 강간 판타지가 있다'는 말은 매우 갸웃한 것이었다. 그래, 다른 사람의 판타지에 대해서 내가 뭐라할 순 없지, 있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왜, 어째서 강간 판타지를? 그리고 내게 '나는 강간판타지가 있어'라고 말한 여자는 한 명도 없었던 반면, '강간 판타지 있는 여자들이 있다'고 말하는 건 왜 모두 남자였을까. 여자들은 스스로 강간판타지가 있다는 것을 남자가 아니면 말하기 두려워서였을까.


나는 최근 DSO 계정에서 같이 신고해달라고 음란 계정들을 올리면 그것을 부지런히 신고하고 있다. SNS특성상 성인 인증 없이도 가입이 가능하고 거기엔 초등학생도 그리고 고등학생도 모두 가입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영상들을 맞닥뜨릴 수 있다. 내가 본 영상들은 무척 충격적이었고 그걸 보면 성인의 영혼도 온전치 못할 것 같았다. 멘탈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걸 보고 있을 순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무엇보다 미성년자들이 이런 식으로 성인 남녀의 나체를 보는 것도, 그리고 성관계를 알게 되는 것도 끔직하게 싫어서(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성인남자의 고추를 보게됐고, 그것을 폭력으로 이해하고 있다), 부지런히 신고를 하고있다. 신고를 해도 박멸할 순 없고 계속 생겨나지만 그래도 끝까지 따라가 신고해주겠다는 마음으로 신고하고 있다.


신고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몇 개의 영상쯤은 보게 된다. 동물들과 관계하는 변태적인 성행위도 거기에 있었지만, 나는 거기서 여자를 피멍들게 때리는 영상들을 보았고, 여자 얼굴에 정액을 쏟아붓는 것도 보았다. 아주 많은 영상들은 여자들이 남자들의 고추를 물고 있었다(더러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침을 뱉거나 오줌을 싸거나 하는 것들도 있었고, 입 안에 정액을 쏟아붓는 것도 있었다. 더 쓰는 건 이 페이퍼 자체를 음란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그만하겠지만, 나는 그걸 보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영상 속에서 여자들이 설사 즐기는 것 같은 표정과 신음소리를 보인다해도, 내게 그것은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그 모든 행위들에 있어서 나는 너무 소름끼치고 수치스러워서 '여자들아 그런 거 하지마' 하고 간절한 마음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끔찍하게 여기는 나는, 그 영상들의 모든 행동들에 있어서 백프로 자유로운가?



아니었다. 나도 그 안에 어떤 행위들이 내 것이었던 적들이 분명히 있었다. 어떤 것들은 상대가 좋아하기 때문에 억지로 참기도 했고, 어떤 것들은 그렇게 참을 필요 없이 가능하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것들은 좋아하기도 했다. 나는 분명 저 영상들을 보며 폭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외부에서 봤을 때 그것은 분명한 폭력이었다. 애시당초 그들의 자세 자체가 달랐으니까. 그렇다면 외부에서 보기에 폭력이지만, 그것이 당사자가 되었을 때는 폭력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외부에서 보면 폭력인 것이 내 것이 되는 순간 괜찮아지는 것이 되는 것일까? 외부에서 봤을 때 폭력이지만 우리 둘 사랑하는 사이, 연인사이에서는 허용되는 것이야, 너 좋고 나 좋고 우리 둘다 좋으니 이것은 섹스야, 가 되는 것일까? 나는 내가 어느 순간 그것들 중 일부를 즐겼다는 사실을 놓고 보았을 때, 내 허용치는 그만큼이지만 저들 혹은 다른이들은 나보다 허용치가 더 넓다고 판단하면 그뿐인걸까.



우선 나는 그 영상들을 보고 매우 끔찍하다고 생각했고 아프다고 생각했다. 이런 걸 찍고 그리고 즐겨 보는 사람들의 영혼이 건강할 리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 영상이, 남자와 여자가 어떤식으로든 성관계를 맺고 있는 영상이, 내게는 분명 끔찍하게 느껴졌다. 정말 싫다, 는 감정을 갖게 했다. 이런 영상 싫다, 이런 행위가 싫다, 는 생각을 갖게 한거다. 그러나 놀랍게도 나는 다른 성에게는 이것이 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안다. 그 지점에서 나는 심한 괴리감을 느꼈다. 같은 영상을 보고 어느 한쪽은 아 싫어, 괴로워, 고통스러워를 느끼는데 어느 한 쪽은 네 얼굴로 내 정액을 받아줬으면 해, 같은 욕망을 느낀다는 게, 따라하고 싶어한다는 게 정말이지 처절하리만큼 괴로웠다. 이걸, 이 다름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왜그럴까. 이게 어째서 가능할까, 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여자들은 이 영상이 끔찍하고 남자들은 영상속의 남자처럼 하고 싶은 건 왜그럴까.

그건 아마도 굴복하고, 무릎꿇고, 더러운 걸 몸에 받는 쪽이 여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남자들은 힘을 쓰고, 핥는 걸 느끼고, 배설하는 쪽이고. 남자들이 영상속에서 고통스러워할 이유는 없었다. 고통스러운 말과 행동이 남자들에게는 없었다. 고통스럽지 않으면서 쾌락과 배설이 따라온다면, 게다가 자신의 힘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들에게 이 영상은 무엇을 가져다주는가. 왜 여자인 나는 고통스럽고 왜 남자인 너는 흥분하는가.



당신이 받은 폭력은 그 남자에게 흥분이고, 당신이 받은 고문은 그 남자에게는 쾌감이다. 당신을 보는 것은 이제 그 남자에게는 마스터베이션 거리가 된다. (p.24)



다시 강간판타지 얘기로 돌아가면,

나는 강간판타지를 가진 어떤 여자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처음부터 본인의 판타지였을까?

그러니까 만약 세상에 포르노가 없었다면, 강간하는 영상들이 없었다면, 그걸 찍고 보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 남자들이 없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저 스스로 '내 몸이 침범당하길 원해'라고 생각하게 됐을까?

섹스도 마찬가지다. 내가 했던 섹스들도, 내가 '내 의지'라고 생각했던 것들, 혹은 '나는 이건 별로지만 네가 좋아하니까' 참았던 것들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폭력이 아닌' 것이 될까.

나는 우리에게 포르노가 준 수치가, 포르노가 공급한 폭력이 내재화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야한다는 것이, 이러는 게 섹스에서는 응당 당연하다는 것이, 이것이 은밀한 관계가 가진 '특권'이라는 것이 내안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차곡차곡 쌓여버린 거란 생각을 하게된 거다. 만약 내가 그런 영상들에 노출되지 않았다면, 그런 영상을 찍고 보는 남자들이 없었다면, 그렇다면 내 섹스들을 돌이켜 보았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싶었을 것들은 과연 몇 개나 될까. 게다가 상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사실 나는 어떤 부분에서는 수치스럽지 않았나. 수치스러움을 참지 않았나. 어떤 요구들에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하는 마음에 '싫어, 그건 하지마' 라고 요구할 순 있었지만, 그러나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이정도 까지는 그래도 할 수 있지' 로 폭력을 내재화하지 않았나. 포르노를 보고 남자들은 폭력을 자신의 것처럼 만들고, 여자들 역시 그것을 자기 안에 쌓아버린 것 같다. 나는 포르노를 보지 않는 사람이고 아마 대부분의 여자들이 포르노 보기를 꺼려할 것이다. 물론, 보는 여자들도 있을 것이고. 그러나 포르노를 보지 않는 나같은 사람이라도 '남자들은 이런 걸 좋아하지' 정도를 어느 틈에 알고 있잖아. '남자들은 이런 걸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는 채로 시작하는 섹스가, 과연 평등한 관계에서 오는 섹스일까?

섹스에서, 네가 날 사랑하고 나도 널 사랑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평등한가? 평등했나?

단순히 어떤 자세를 취해서가 아니라 그 모든 시작과 끝의 순간들에, 나는 폭력을 내재화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왜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걸 보면 '그러지마' 하게되는 것들을 나는 하고 있었나. '내가' 하면 괜찮은 게 되는건가.

나는 수치스럽지 않았나.



당신은 살아남기 위해 수치심을 배우며 이 수치심을 성적 허세로 가리는 법을 익힌다. (p.28)






이 책 《포르노에 도전한다》의 원제는 《only words》이다. '단지 말' 이라는 제목인건데, 이 책을 읽다보면 이 얼마나 적절한 가져옴인지, 그러니까 국내에서 '포르노에 도전한다'는 제목을 이끌어올 이 책이 왜 '단지 말'이란 제목을 갖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어휴, 따먹고 싶게 생겼네' 라는 말을 내가 들었을 때, 그는 나를 '아직' '따먹지'는 않았으나, 그런 욕망을 가짐을 표현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듣고 매우 불쾌하며, 언제든지 저 남자가 그 말을 실행하지 않을까 두려워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저 표현'인건가? 그저 말만 한건데 뭐 어때, 하며 웃을 수 있는가? 저 '말' 자체에 성적 희롱이 담겨있다. 그것이 그저 말뿐인가.

맥키넌은 이 책 only words 를 통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바로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백인 전용'이라는 간판은 '유대인 사절'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차별행위로 간주된다. 인종 격리는 "나가!" "당신은 여기 못 들어오게 되어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으면 일어날 수가 없다. 상대를 높이는 것이나 깎아내리는 것이나 모두 의미 있는 기호나 의사 전달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바로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이다. (p.36)



인종적으로도 성적으로도 평등하지 못한 세상에서, '평등'은 '단지 말'에 불과하고, 그러나 차별적 '표현'은 그저 말뿐인 게 아니다. 그것은 행위에 다름아니다. 폭력적 말은 폭력적 행위다. 포르노에서 강간이 벌어지고 정액을 쏟아낼 때, 그 안에는 강간을 당하고 정액을 받고 있는 행위가 있다. 포르노를 '표현의 자유'로 변명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포르노 안의 행위들은 게다가 실생활에서도 행위로 이어진다. 그게 맥키넌이 '반포르노'를 주장하는 이유이고, 내가 그녀의 책을 읽는 이유이다.





캐나다는 이미 ‘표현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우선시하는 것은 여성의 평등권을 침해한다‘며 그러한 견해를 거부했다. - P10

이 책은 사람들에게 표현이라는 미명 아래 행해지는 해악의 실상, 즉 표현이라는 것이 여성과 어린이에게, 피억압 집단을 위한 평등의 가능성에, 특히 여성들의 인권에 무슨 짓을 하는지를 바로 볼 수 있게 하려는 시도이다. - P11

상당수의 포르노가 인종적·민족적 적대감을 섹스와 연결시킨다. 또 포르노는 공격행위를 쾌락으로 제시함으로써 힘없는 자에 대한 폭력에 대해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든다. - P17

전쟁중에는 세르비아 파시스트 군인들이 이슬람 여성과 크로아티아 여성들을 강간하고 살해하기 위해 수용소에 감금했다. 이런 강간·살해 캠프에는 포르노가 판을 치고 있었다. 그 캠프들에 있었던 여성들에 따르면, 군인들은 포르노에서 여성들에게 가해졌던 행위를 자신들에게 그대로 실행했다고 한다. 또 그녀들에게 자행된 성적 잔학행위가 그대로 포르노르 만들어지고 있다고도 보고된다. - P17

포르노는 뿌리 싶은 성적 부속물을 만들어내는데, 여성 혐오가 바로 그것이다. 그 여성 혐오는 다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포르노 옹호를 추진하고 떠받치는 역할을 한다. - P18

이렇게 수천 년 침묵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카메라가 발명되고, 당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카메라에 담겨지게 된다. 당신이 고통받는 동안 그 고통의 리듬에 맞춰 셔터 누르는 소리나 카메라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당신은 그 영상물들이 다른 어딘선가 매매되고, 사람들에게 돌려가며 보여지거나 서랍 속에 감춰져 있으리란 걸 잘 알고 있다. 그 영상물 속에, 당신이 겪었던 일들은 영원히 남게 된다. 남자들이 그것들을 갖고 있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 또 누구나 그 속에 담긴 당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참을 수 없는 일 아닌가. 그 남자가 당신을 포르노 제작에 사용하면서 보고 느꼈던 것은 그 영상물들을 통해 늘 다시 행해지고 되살아나며 또 느껴지고 있다. 당신이 받은 폭력은 그 남자에게 흥분이고, 당신이 받은 고문은 그 남자에게는 쾌감이다. 당신을 보는 것은 이제 그 남자에게는 마스터베이션 거리가 된다. - P24

당신에게 표현이란 마치 영화를 향해 소리지르는 것과 같다. "누구든 저 남자 좀 말려요!" 하고 소리쳐도 관객들은 아무 소리도 못들은 듯이 행동한다. 꼼짝도 하지 않고 영화를 보거나 당신에게 방해받았다는 듯이 자세를 살짝 고쳐 앉는다. 영화 속 장면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계속된다. 당신이 지른 소리의 여운이 귓속에서 사라지면 당신은 무슨 말을 하기나 했는지 스스로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당신 자신의 경험은 마치 당신 눈에는 보이나 멈출 수 없는 영화처럼 더이상 당신에게 현실이 아니다. 여성의 경우에는 이렇게 현실의 삶이 예술을 모사模寫한다. 당신의 현실은 포르노 대본이 그리는 대로 규정된다. 당신은 살아남기 위해 수치심을 배우며 이 수치심을 성적 허세로 가리는 법을 익힌다. 또 성적 무능과 이 성적 무능을 매력으로 만드는 법을 배운다. - P27

성의 은밀함을 배우고, 아는 것을 잊어버릴 때까지 말하지 않는 습관을 익힌다. 이런 것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 당신은 자기 몸을 빠져 나와 대신 다른 사람을 가장하는 법을 배운다. 당신은 애교가 넘치고 고분고분하며 곧잘 남을 흉내내는 아주 수동적이고 말이 없는 자아를 개발해낸다. 한마디로 말해 당신은 여성다움을 익히게 되는 것이다. - P28

미국 여성의 38%가 소녀시절 성추행을 당한다. 우리 여성 중에 24%가 결혼생활에서 남편에게 강간을 당한다. 우리 중에 거의 절반은 일생 동안 한 번 이상 강간 피해자가 되거나 강간당할 뻔한다. 많은 수가 두 번 이상 이런 경험을 겪고, 특히 유색인 여성이 심하다. 또 많은 여성이 여러 남자들한테, 그것도 대개 아는 남자들한테 당한다. 밖에서 일하는 여성 가운데 85%가 사용자들한테 성적 괴롭힘을 당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의사들에게 성적 괴롭힘을 당하는지,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섹스를 위해 매매되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남자들이 언제든지, 심지어 불황 속에서도 항상 돈 주고 성을 산다는 것이다. - P29

포르노를 옹호하는 것은 표현으로서의 성적 학대를 옹호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또 동시에 포르노 및 포르노 옹호가 여성들로부터 표현, 특히 성적 학대에 대항하는 표현을 박탈해온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성들에게 강요된 침묵과 우리를 둘러싼 포르노 논쟁의 소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여성들은 강요된 침묵 속에서, 여성들을 속박하는 굴레(이것에는 성적 특징이 주어지기 때문에)를 마치 스스로 좋아서 택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한편, 포르노 논쟁은 헌법의 보호 아래 활보하며 제대로 된 담론으로 (심지어 여성들에게도)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제로 통용되는 검열의 정의는 힘없는 사람들의 표현을 막는 정부의 행위라는 것에서, 국가권력의 배후에 숨어 힘없는 사람들을 침묵시키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폭력이라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 P31

수정헌법 제1조(譯註:1789년에 만들어지고 1791년에 효력 발생. "미합중국 의회는 특정종교를 옹호하거나 자유로운 종교행위를 금지하거나 언론 또는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또는 평온하게 집회하고 피해의 구제를 위하여 정부에 청원하는 인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가 이러한 생각과 감정의 교환 과정을 보장하고 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포르노에서 일어나는 일은 마음 속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현실세계에서 일어난다. 무엇보다 먼저 확인해 두어야 하는 것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여성들에게 섹스를 강요하고, 공갈협박하고, 압력을 넣고, 속이고 꾀는 것은 포르노에 들어 있는 사상이 아니라 포르노 산업이라는 것이다. 포르노에서 여성들은 윤간 장면을 찍기 위해 윤간당한다. 여성들은 윤간이라는 생각에 의해서 윤간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섹스 영화를 만들려고 여성을 폭행하고, 성기를 삽입하고, 사지를 묶어 재갈을 물리고, 옷을 벗기고, 음부를 벌려 래커와 물을 뿌리는 것은 포르노 때문이지 거기에 담긴 사상 때문이 아니다. 오로지 포르노를 위해 섹스 영화를 만들려고 여성들이 살해당하는 것이지 섹스살인의 사상이 그녀들을 죽이는 게 아니다. 포르노가 표현하는 사상을 사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런 짓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러나 포르노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런 짓들이 필수적이다. - P38

마찬가지로 포르노의 최종 소비단계를 보면 여성들을 공격하는 것은 포르노에 들어 있는 사상이 아니라 남자들이다. 포르노를 보고 만들어진 남성, 포르노를 보고 바뀐 남성, 포르노를 보고 충동을 느낀 남성들이 여성을 공격한다. 포르노가 시렁에서 뛰어내려 여성을 공격하지는 않는다. 이론상으로 여성들은 포르노가 가득 들어찬 창고를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다. 그래도 포르노는 껍데기 안에 조용히 들어 있다. 문제는 포르노를 만들기 위해 어떤 일이 저질러지느냐, 포르노를 사용하면 무슨 일이 발생하느냐 하는 것이다. - P39

포르노 소비자들은 어떻게든 그 포르노를 3차원의 세계에서 실행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조만간 어떻게든 그렇게 한다. 포르노는 그들에게 욕구를 일으킨다. 할 수 있다고 생각될 때, 그 행위로 처벌받지 않을 수 있다고 느낄 때, 그들은 실행한다. 그들은 매일매일의 생활로부터 흥분을 느껴 항상 성기가 발기돼 있을 수 있도록 이 세상을 포르노 천지로 만들기 위해, 그들이 택한 활동 영역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자신들이 갖고 있는 권력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 포르노 소비자로서의 교사들은 여학생 제자들을 자신과 잠재적으로 동등한 존재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되고 무의식중에 강간범의 입장에서 강간에 대해 가르칠 가능성이 있다. 의사들은 마취 상태의 여자들에게 성적 가해를 입힐 가능성이 있고, 분만 장면을 구경하거나 고통을 주면서 즐길 가능성이 있다. 또 의대에서 성교육을 하면서 포르노를 사용할 가능성도 있다. - P43

화장실 벽에 낙서나 하는 수준의 포르노 소비자들도 있지만, 사법적 의견을 쓰는 보시자들도 분명히 있다.
아마도 포르노 소비자들 중에는 배심원석에 앉아 있는 사람도 있고, 상원 법사위원회에 앉아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정폭력을 신고하는 전화를 받는 경찰관도 있을 것이고, 아동에 대한 성적 학대 기사를 편집하는 사람ㅗ 있을 것이고, 일반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포르노 소비자들 중에는 자기 처나 딸, 환자나 제자, 또는 매춘부에게 포르노를 보여주면서 거기 나오는 대로 시키는 사람도 있다. 또 그들 중에는 자기 종업원과 환자를 성적으로 괴롭히고, 자기 딸을 성추행하고, 자기 처를 구타하고, 매음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럴 때마다 포르노가 옆에 있고 그런 행위에서 빠뜨릴 수 없는 요인이 된다. 친목회에서 또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여성들을 집단 강간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때 그들은 포르노를 높이 쳐들고 큰 소리로 읽으면서 그대로 흉내 낸다. - P43

이들 중에 어떤 자들은 연쇄 강간범이 되거나 연쇄 강간살인범이 된다. 이런 행위들에서는 때로 포르노 사용과 제작과의 경계가 애매하다. - P43

그렇다고 해서 모든 포르노가 학대를 통해 만들어진다고 가정하는 것은 아니다. 또 일부 포르노가 강제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들어 모든 포르노를 금지하는 법적 근거로 삼으려는 것도 아니다. 경험적으로 볼 때, 모든 포르노는 성의 불평등 상황하에서 만들어진다. 거기 사용되는 사람들은 거의가 어렸을 때 성적으로 학대받은 가난하고, 절망에 빠져 있고, 가정이 없는, 팔려 온 여성들이다. 포르노 산업은 이런 상황을 악용하면서 이윤을 착취한다. 또 포르노 산업은 이윤을 낵 위해 이런 상황을 유지시킨다. 이런 상황은 자유를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선택을 강요한다. 노골적인 폭력이 들어 있지 않은 포르노의 경우조차도 여자들에게 그 장면을 연기하도록 만든다는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다. - P45

안드레아 드워킨과 나는 포르노를 ‘영상물과 말을 통해 여성을 복종시키는 생생한 성적 묘사물‘로 정의하는 ‘반反포르노법‘을 제안한 바 있다. - P48

포르노는 단순히 경험을 표현하거나 해석하는 게 아니라 경험을 대체한다. 메시지를 현실에서 가져오는 것을 넘어, 포르노는 현실의 자리에 대신 들어서서 실존적으로 거기 존재한다. - P51

포르노는 여자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여자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여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한 관념을 만들어내고, 여자에게 해서 되는 일은 무엇인가라는 시각에서 ‘여자란 도대체 무엇인가‘ 혹은 ‘여자가 어떤 것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여자를 다루는 남자는 과연 무엇인가‘에 관한 사회적 현실을 구축함으로써 그 제작과 사용 과정을 통해 세상을 온통 포르노 천지로 만든다.
사회가 포르노로 넘쳐나게 되면서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것이 바뀌고, 포르노 내에서의 표현 문제라는 관점에서 섹스 자체의 본질이 바뀐다. - P51

포르노에 나오는 여자들은 실제로 즐기는 것이고 강간은 시뮬레이션 기법이라는 주장은 하면서 왜 그 반대의 경우, 즉 여자들의 쾌감은 시뮬레이션 기법이고 강간은 실제라는 주장은 안 하는지 의문이 있을 수도 있다. 그 답은 소비자가 쾌감을 느끼려면 시나리오가 남자의 강간에 대한 환상, 자신은 여자를 학대하고 여자는 그것을 좋아하는 환상에 부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자에게 돈을 주고 처음에는 저항하는 것처럼 하다가 결국 굴복하도록 시킨다고 해서 그 섹스가 서로 교감하는 섹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포르노를 매춘의 수단으로 만든다. 그 섹스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돈이 강제력의 매개체가 되고 동의同意의 외양을 제공한다. - P55

섹스를 하면서 보는 것도 나중에 사진으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사진들은 전리품이며, 사진을 보면서 성적 만족을 느낀다. 나체춤을 에로티시즘의 ‘연출‘인가 아니면 에로티시즘 그 자체, 즉 하나의 섹스행위인가? 라이브 섹스 쇼는 어떻게 다른가? 영화에서 실제로 행해진 집단강간을 보는 사람과, 영화에 나오는 집단강간을 흉내내는 실제의 집단강간을 보는 사람, 또는 실제 집단강간을 보는 사람 사이에는 남자들이 성적으로 하고 있는 것을 놓고 볼 때 아무런 차이가 없다. - P56

미국의 명예훼손에 관한 법은 지배자들이 처벌받지 않고 종속된 집단에 대해 사실상 무엇이든 말할 수 있도록 허가하면서, 동시에 힘있는 개인이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을 핑계로 삼아 힘없는 사람들이 표현수단에 접근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매체의 권한을 뒷받침하는 효과만 낳고 말았다. 이런 상황은 집단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피해를 입는 쪽은 종속된 집단이며, 자신들을 나쁘게 보이도록 하는 진술은 사실이더라도 제소하겠다고 확실한 위협을 할 수 있는 쪽은 대부분 특권을 가진 자들이라는 사실에 의해 더욱 악화된다. - P119

영상물을 갖고 생각해 보자. 포르노를 금지하는 현행법은 우선 포르노가 여성들에게 해악을 준다는 시각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다. 그런데 포르노가 퍼지면서 새로운 시장(예를 들면, 비디오나 컴퓨터)과 합법적인 장으로 영역을 넓혀가서는 여성에 대한 학대가 점점 더 학대로 보이지 안게 되자, 즉 여성에 대한 학대가 점점 더 섹스로 보이게 되자 현행법은 더욱 약화된다. 그래서 법원은 무엇이 포르노이고 무엇이 포르노가 아닌지를 점점 더 알 수 없게 된다. - P131

성인 여성들을 사용한 포르노에 관한 법의 역사에 비춰 보면 아동 포르노의 경우는 ‘기적‘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동 포르노는 성취향이 다른 소수파의 표현(실제로 그렇더라도)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이들이 어린이와 섹스에 관한 ‘사상‘을 주장하는 것(실제로 그렇더라도)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아마도 심의를 받는 영화에 사용된 아이들이 남자아이들이었다는 사실이 이런 결론과 상관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동 포르노가 유해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면 순전히 어린이들과 성인들 사이에 권력의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 터인데, 여전히 그런 불평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 P133

이러한 표현과 평등 문제의 맥락 속에서 다시 한번 나와 안드레아 드워킨이 성안했고 인디애나폴리스시에서 통과시킨 반포르노 조례에 대한 사법적 의견을 살펴 보자. 이 조례에서는 포르노가 행하는 해악들을 정리해서 평등권에 대한 침해로 정의하고, 그런 해악들을 차별행위로 간주하여 소추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 조례에서는 포르노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들의 학대에서 차지한 포르노의 역할을 입증하고, 박탈된 자신들의 민권을 회복하고, 포르노를 중지시킬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그런데 법률적으로는 이것이 사상에 대한 검열로 간주되고 있다. - P133

평등이 단지 말에 불과한 게 아니라 현실인 사회에서는 인종족 또는 성적 공격과 모욕의 말들은 의미 없는 소리가 될 것이다. 사람과 물건 사이의 섹스, 인간과 종이조각 사이의 섹스, 현실세계의 남자와 비현실세계이ㅡ 여자 사이의 섹스는 성적 흥분을 깨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학대의 골동품들은 박물관의 공룡 뼈 옆에 있는 유리상자 속에나 들어갈 것이다. 지금은 침묵의 상황이 그 뒤에 숨어 있는 자들에게 하나의 권력 행위이고 침묵 속에 침잠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강요된 무권력의 경험이지만, 그 날이 오면 침묵의 상황은 권력행위도 아닐 것이요 강요된 무권력의 경험도 아닐 것이다. 그 날의 침묵은 생각을 넓힐 수 있는 휴식이 될 것이고, 표현에 모양을 지어주는 매력이 될 것이며, 새로운 대화의 시작이 될 것이다. - P155

1980년대 초반 미국의 인권운동가들과 여성운동가들은 콤스톡의 후예가 등장했다며 긴장했다. 그러나 제2의 콤스톡은 가부장적 권위주의를 수호하려는 남성이 아니라 포르노는 여성의 평등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이에 대한 제재가 법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캐서린 맥키넌과 안드레아 드워킨이었다. 변호사인 맥키넌과 작가인 드워킨은 포르노가 미국 사회의 여성의 불평등을 고착시키고 장려하는 주된 원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여성의 평등권이 표현의 자유만큼이나 중요하기 때문에 포르노를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포르노의 규제를 주장한 사람들은 성도덕과 윤리적 차원이나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그릇된 영향 등을 고려애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9-12-10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 쓰고 났더니 오늘치 에너지 다 소진되어버렸다..

단발머리 2019-12-10 12:33   좋아요 1 | URL
인용해주신 글들은 아직 다 못 읽고, 본문만 읽었어요.
읽기에도 힘든 글을 이렇게 정리하고 완성해 낸 그대에게 휴식 시간을 드리고 싶네요.
포르노에 관심이 없는데도 우리는 알아야 하고 읽어야 하네요 ㅠㅠ

다락방 2019-12-10 12:44   좋아요 1 | URL
힘들긴 하지만 너무 좋은 독서였어요. 어서 빨리 드워킨 책도 읽고 싶어요. 드워킨 책중에 <MERCY>란 원제를 가진 [신에게는 딸이 없다]라는 책도 얼른 읽어보고 싶은데 역시나 절판이고요 ㅎㅎ 출판사들이 분발해줘야 할텐데 말입니다.

[21세기에 지켜야 할 자존심] 보면 정희진 쌤이 앎은 고통을 수반한다고 하잖아요. 제가 알아가는 과정 역시 그러하리라고 생각해요. 고통스럽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편이 나았을까, 생각해보면 또 그건 그게 아니니까요.

열심히 읽을거에요, 단발머리님. 열심히 읽고 쓸거에요. 그래도 일단 오늘은 치킨 좀 먹어야겠어요 ㅎㅎ

잠자냥 2019-12-10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킨 먹을 만한 페이퍼네요. 두 마리 드셔도 될 거 같은데요. ㅎㅎ

전 여태까지 살면서 포르노 본 적 진짜 없는데, 이걸 또 거짓말한다고 생각하고는 괜찮으니까 말해보라고... ㅠㅠ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포르노 권장하는 사회도 참 정상은 아닌 것 같아요. 휴... 글에서 묘사된 부분만 읽어도 끔찍한데 그걸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니 세상 참....

암튼 치킨 많이 드세요. (참, 근데 발은 꼭 씻고 드세요 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12-10 17:4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치킨 허락 받았다. 만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포르노를 어떻게 보는지도 저는 잘 모르겠어요. 남자들은 어떻게 그렇게 잘 보는걸까요? 포르노를 보는 어떤 특별한 방법이 있는가봐요. 그게 그 위디스크.. 그런 데서 보는걸까요? 예전에 고등학생 때 목사 딸과... [동물적 본능]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이건 아마도 포르노 보다는 에로 영화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그 친구가 자꾸만 야한 거 보자고 저를 불렀는데, 저는 매번 갈 순 없었어요. 그렇지만 포르노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뭔가 알음알음으로 남자들끼리는 수단이 있는가 봅니다.

사실 포르노 본 여자들은 드물지 않나요? [터보레이터]도 같이 비디오방에서 보던 친구가 보다말고 토할 것 같다고 나가자고 해서 중간에 나왔던 기억이 있어요. 누군가에게는 토할 것 같아서 못보는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해보고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다니, 정말 괴이하지요?

아무튼 저는 퇴근을 하면 빨래를 돌리면서 치킨을 먹겠습니다.

발 씻고.. 꼭 씻고요... 냄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