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있던 약속은 태풍 때문에 취소되었다. 오전에 잠깐 이비인후과와 요가를 다녀오는데 바람이 너무 심한터라 도무지 오후의 일정을 진행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판단에서 우리 오늘 만남은 취소하는 게 좋겠다, 라고 친구에게 말을 거니 친구 역시 그게 좋겠다고 했다. 덕분에 토요일 오후가 내게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읽고 싶었던 책 읽으며 여유로운 토요일을 보내야지, 그렇게 나는 시몬 베유의 책을 잡았다.
그러나 다른 가족 구성원과 함께 사는 집에서 가사노동이 뻔히 일어나고 있는 걸 알면서 과연 주말의 여유로운 독서는 가능할까? 만약 내가 혼자 사는 사람이었다면 다른 모든 일들을 뒤로 미룬 채로 책 읽기에 집중하는 게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책을 읽으려고 폼을 잡고 있는데, 엄마는 부엌에서 뚝딱뚝딱.. 엄마도 그저 누워있기만 하면 좋을텐데, 그러나 엄마는 그럴 수가 없는 사람이다. 오전에 엄마 개인적인 약속을 끝내고 돌아와서는 시장에 가 명절에 만들 음식의 재료들을 사오셨고, 이내 저녁에 먹을 반찬을 만들기에 분주하시다. 아아..차라리 모를걸, 차라리 집에 없을 걸, 그 편이 내가 편했을텐데...라며 책에 집중도 못하고 있는데, 마침 엄마가 나를 부른다. 오이지를 만들건데 오이를 좀 짜달라는 거였다. 나는 내가 원했던 독서의 시간이 깨져버렸다는 아쉬움에 조금 화가 났지만, 그러나 가사노동을 엄마에게만 짐지울 순 없었다. 나가서 오이를 힘껏, 힘껏 짰다.
눈 앞에 일거리가 뻔히 보이는데 오이를 다 짰으니 이제 방해 말라며 다시 방으로 들어갈 순 없었다.
나는 빨래를 가지고 나가 세탁기를 돌렸고 다 된 빨래를 건조대에 널었다. 그 사이 엄마는 내가 먹을 저녁 반찬으로 소불고기를 만들고 동태찌기를 끓이고 있었다. 나는 텔레비젼 앞에 큰 상을 펴두고는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왔고 소주잔과 수저를 준비했다. 앞접시도 있어야겠지. 그렇게 엄마랑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고 설거지를 했다. 배가 부르다며 소파에서 쉬는 엄마에게 따끈한 차를 우려주었다. 토요일밤은 그렇게 책을 읽을 겨를도 없이 후딱 지나가고 있었다.
나랑 같은 상황에 놓인 남자들은 어떨까, 를 잠깐 생각했다.
그들도 집에 있는 주말이면 본인이 예정한 대로의 여유로움을 즐기는 대신 가사노동을 함께 할까? 부엌에서 뚝딱이는 엄마(혹은 아내)의 소리들을 넘기지 못하고 나와 무언가 도울까? 엄마가 저녁을 차리는 동안 세탁기를 돌릴까? 엄마가 저녁을 차려주면 맛있게 먹고 설거지를 할까? 고단한 엄마에게 따끈한 차를 내어드릴까? 아니면, 그들은, 계획했던 그대로, 자기 방에 콕 틀어박혀 책을 읽을까? 그리고서는 이번 주말은 여유롭게 하고 싶은 일들을 했어, 라고 주말이 지난 뒤 출근해서는 동료들에게 말할까?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줌파 라히리'의 [저지대]속 남자가 생각났다. 밖에 나가 정의를 부르짖고 혁명을 외치지만, 집에서는 식탁 앞에 앉아 가만히 엄마나 여자친구가 차려주는 밥을 받아먹는 남자. 그들은 자기 안의 모순을 직면하고 받아들일 줄 알까?
우다얀은 혁명을 원했지만 집에서는 남들이 해주기만을 기대했다. 식사 시간에 그가 하는 거라곤 자리에 앉아서 가우리나 어머니가 그 앞에 접시를 놓아주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줌파 라히리, 저지대, 203쪽
애덤 스미스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이 경제학의 아버지는 거의 평생을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가 집안일을 돌봤고, 사촌이 돈 관리를 했다. 애덤 스미스가 관세 위원으로 에든버러에서 일하게 되자 어머니도 함께 이사했다. 그의 어머니는 평생 아들을 돌봤지만, 저녁 식사가 어떻게 식탁에 오르는지를 논할 때 애덤 스미스가 언급하지 않고 넘어간 부분에 속해 있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집필할 당시 푸줏간 주인, 빵집 주인, 양조장 주인이 일하러 가기 위해서는 그들의 부인, 어머니, 혹은 누이들이 하루 종일 아이들을 돌보고, 청소하고, 음식을 만들고, 빨래하고, 눈물을 훔치고, 이웃과 실랑이를 해야 했다. 어떤 식으로 시장을 바라봐도 그것은 또 하나의 경제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가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 경제 말이다. (p.30)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가족구성원 모두가 자유로웠다. 각자 자기 몫의 외출을 하고, 나도 일찌감치 오후에 영화 <벌새>를 예매해둔 터다. 일전에 알라디너로부터 받은 커피와 케익 쿠폰도 사용할 겸, 나는 책을 들고 까페로 나갔다. 이번 여성주의책 같이읽기 도서는 <시몬베유의 나의 투쟁>이지만, 나는 시몬 베유의 다른 책도 사둔 터라, 일단 얇은 책을 꺼내 들고 나왔다. 시몬 베유의 책을 읽다보면 프랑스에 대해 궁금할 터, 몇 개월전에 읽었던 <유럽 낙태 여행>도 함께 가지고 갔다. 시몬 베유의 책을 읽다가 무언가 궁금해진다면, 그럴 때 유럽 낙태 여행도 읽어야지. 나는 그렇게 까페에 두 권의 책을 가지고 나갔고, 나란히 꺼내두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몇 해전에 남동생이 회사에 다니는 게 전망이 밝은 것 같지 않아 자기 사업을 하고 싶다며 이것저것 생각해 '이건 어떨까' 하고 내게 의견을 구할 때면, 나는 그 당시에 내가 생각하는 답들을 동생에게 들려주곤 했다. 한 번은 내가 생각하기에 전혀 도덕적이지 못한 일들, 설사 돈을 많이 번다고 해도 어디 가서 '나 이렇게해서 돈 벌었어' 라고 말하기에 껄끄러운 일에 대해서도 '이건 어때?' 하고 묻길래, 정색을 하고 '그건 안돼' 라고 말했었다. 돈 버는 거 너무 중요하고 나 역시 돈을 많이 벌고 싶지만, 그러나 어디가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동생에게 말했다. 내가 하는 일을 얼버무려야 한다면, 그 일을 하지마. 어디가서 누가 물었을 때 전혀 거리낌 없이 답할 수 있어야 해. 일에 있어서 도덕을 잃지 마. 돈을 설사 조금 덜 벌더라도, 윤리를 놓아서는 안돼. 돈을 벌 때 모럴을 꼭 가져가야 해, 그걸 염두에 두어야 해.
내가 하는 말이 동생의 귀에 닿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뒤로 동생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자랑스러운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내 조언 '탓'일까. 돈을 크게 벌지는 못하고 있다. 그저 이것이 윤리적으로 한 점 부끄러운 게 없으니, 언젠가는 빛을 볼 날이 있지 않을까, 하고 있을 뿐이다.
<국가가 아닌 여성이 결정해야 합니다>에 1950년대의 상황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낙태수술의 80퍼센트 이상이 의사가 '아닌' 사람들로부터 행하여졌다는 것. 그러나 물론, 의사들도 낙태수술을 하기도 했다.
의료계 종사자들은 수술 금지라는 위험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산파, 간호사, 일반의나 산부인과의들이 은밀하게 수술을 했습니다. 대체로 인간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종교계에서 지은 의료 시설에서도 곤경에 빠진 여성들이 도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수련의나 병원 경비들은 병원으로 긴급히 실려 오는 여성들을 속속 보곤 했습니다. 이 여성들은 위생 상태가 끔찍하고 어떤 의료 교육도 받은 적 없이 가장 초보적인 방식으로 산파 역할을 하는 이들에게 은밀히 찾아가 임신중단 수술을 받고 나서 만신창이가 된 채였죠. 이 산파들은 때로는 인간적인 호의로, 대체로는 돈 때문에 수술을 해 주었습니다. 무척 고급스럽고 수술 비용이 비싼 병원에서도 수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 중에는 임신중단을 허용하는 법에 반대 입장을 취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음성적으로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 돈이 된다는 판단에서였죠. (p.72-73)
나는 이 부분에서 도덕을, 윤리를, 모럴을 떠올렸다. 돈을 더 벌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음성적으로 수술하는 상황을 바라는 의사들. 자신이 가진 재능으로 돈을 벌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않는 사람들. 나는 만약 내가 이런 사람을 어떤 식으로든 알고 있었다면, 그것이 가족이든 애인이든 친구든 어떤 형태로든, 남동생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해주었을 것이다. 돈을 많이 번다는 거에 취해서 도덕을 잊지 말라고, 윤리를 잃지 말라고. 어디가서 니가 하는 일들을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러나 상대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일지는 내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랑 인연을 끊고 하던 일을 마저 하면서 임신 중단이 합법화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수도 있겠지.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윤리보다 돈이 더 앞서는 사람들이. 나는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하지만 어디가서 부끄럽고 싶지 않다. 내가 버는 돈에 대해서는 출처를 분명히 밝힐 수 있기를 원한다. 어디 회사에 다니냐, 무슨 일을 하냐, 라고 상대가 물었을 때, 속이거나 거짓말을 해서 그 상황을 비켜가고 싶지는 않다. 말하기에 조금 꺼려지는 일 같은 걸 겪고 싶지 않다.
그런 의사들과 대조되는 자리에, 바로 '343 선언' 속의 여자들이 있었다. 이 선언은 343인의 여성들이 자신의 임신중단 경험을 공개한 걸 말한다. 여기에는 시몬 드 보부아르, 프랑수아즈 사강, 카트린 드뇌브등이 포함된다.
이 선언은 무척이나 대담한 행동이었어요. 이 여성들은 임신중단을 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덧씌우는 오욕을 짊어짐으로써 사회에 맞섰습니다. 이들이 형법상으로는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다 해도, 개인적으로 감수해야 하는 결과란 무시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니 이 선언은 아주 강력한 투쟁이자 도발적인 행위였습니다. 결국 이 행동은 소송을 진척시키고 정부로 하여금 1920년 악법 개혁을 단행할 수밖에 없게끔 했지요. (p.74-75)
낙태가 불법인 국가적 상황에서 '나도 낙태했다'고 밝히는 일은 얼마나 용감한 일인가. 대한민국에서도 낙태가 불법이지만 그러나 많은 여자들이 낙태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이 위선적인 상황에서, 그래서 낙태한 사실을 알고 오히려 그걸 여자를 협박하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1971년의 프랑스에서 여자들은 오욕을 감수하고 낙태했다고 선언을 한다.
일전에 메갈리아가 한창 욕을 먹을 때, 많은 여성들이 '내가 메갈이다', '나도 메갈이다' 선언했더랬다. 메갈을 후려치려는 것에 대해 '나도 그렇다'고 함으로써 여성 구분짓기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여자를 구분 짓지마, 후려치지마, 편가르지마. 분명 거기에는 메갈리아 사이트에 한 번 가본 적도 없는 여자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더이상의 낙인찍기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그들은 스스로를 메갈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이 343 선언의 343명 모두가 '정말' 다 낙태를 했을까? 여기에는 분명 낙태를 한 사실은 없지만, 이 선언에 함께하고자, 임신중단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오욕을 뒤집어쓰는 여자들과 함께 하고자 기꺼이 나선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그랬다.
낙태가 불법이던 시절, 343명의 지식인 여성이 자신의 낙태 경험을 잇달아 밝히며 투쟁에 힘을 실었다. 이 여성들의 선언은 1971년 [누벨 옵세르바퇴르]라는 진보 잡지의 표지를 차지하며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제2의 성]의 시몬 드 보부아르 역시 이 선언에 함께했는데, 프랑스가 낙태권 투쟁에서 승리한 이후 자신은 사실 낙태 경험이 없다고 밝혔다. 343선언에 동참한 여성들이 우파 정치인들에 의해 '창녀 343'으로 불리던 때였으므로, 경험이 없더라도 그 멸시를 나누어 갖겠다는 뜻에서 동참한 것이었다. (유럽 낙태 여행, p.32)
여성들간의 연대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가 아닌 여성이 결정해야 합니다>에서 시몬 베유는 여성 연대의 존재를 믿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리고 이렇게 답한다.
물론 믿습니다. 삶에서 맞닥뜨리는 주요한 문제들 앞에서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연대를 만들어 냅니다. 직장 생활에서 일어나는 경쟁을 모른 체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서로 돕는 정신이란 무엇보다도 자연적으로 발휘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성들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몇 번이나 있습니다. 여성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늘 좋아합니다. 유럽 의회에는 여성 의원의 수가 상대적으로 많고, 이들은 매우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정무에 참여합니다. 그들은 여성인권위원회의 설립과 위원회가 내놓는 법안을 열렬히 지지했습니다. 불가항력적인 차별과 전통 때문일까요? 여성에게 남성과 다른 가치체계, 다른 우선순위, 다른 행동, 다른 관심시가 존재하기 때문일까요? 함께 어울려 살기에 여성들은 훨씬 더 용이합니다. (p.118-119)
이 책이 끝날 때까지도 시몬 베유는 멋지다.
시몬 베유는 90세가 되기 2주 전인 2017년 6월 30일 자택에서 사망했다. 아들 장은 7월 5일 공식 행사에서 "어머니께서 제 머리에 물을 끼얹은 것을 용서합니다"라고 말했다. 베유가 아들의 여성혐오적 발언에 넌더리를 내며 그의 머리에 물병에 들어 있던 물을 부어버린 것이다. (p.139)
하하하하. 여성 혐오적 발언이라면 아들이라고 넘어갈 수 있으랴. 물을 끼얹어 버린 어머니 시몬 베유라니. 너무나 근사하다!!
다시 한번 언급하자면, 9월의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는 [시몬 베유의 나의 투쟁] 이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준비 운동 차원에서 <국가가 아닌 여성이 결정해야 합니다>를 읽었다. 자, 다음 주에는 본격적으로 미션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빠샤!!
그런데 주말이 다 가버린 것이 사실이란 말인가..나는 이제 자야한단 말인가...
낙태 수술을 즐겁게 받는 여성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문제는 그저 여성의 말을 듣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여성에게 낙태는 비극이고, 언제나 그러할 것입니다. - P26
저는 미래를 두려워하는 류의 사람이 아닙니다. 젊은 세대들은 우리와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놀라게하곤 합니다. 우리 역시 우리가 길러지던 방식과 다르게 그들을 길러냈습니다. 젊은 세대는 다른 세대와 같이 용감하고, 열정과 헌신을 다할 줄 압니다. 그들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를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부디 신뢰합시다. - P53
여성이 위험을 무릅쓰고 위협을 감수하며 문제를 해결할 때, 이들 곁에는 아무도 없었거나 다른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여성들은 늘 그랬습니다. 여성들은 임신 중단을 하는 다른 여성을 도왔습니다. 때로는 도움에 금전적인 보답이 따르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가 순전히 연대에서 우러난 행동이었습니다. - P59
법조계에 여성들이 진입한 덕분에 임신중단을 둘러싼 논쟁이 발전할 수 있었어요. 피임에 대한 논쟁도 떼어놓을 수 없지요. 1920년 피임 관련 법조항을 보면 정말 믿을 숙 없을 정도로 말이 안됩니다. 의사를 포함한 그 누구라도 여성에게 피임에 대해 조언을 하는 일이 철저히 금지되어 있었어요. 월경주기를 계산하는 오기노 법이나 기초 체온 피임법 같은 것도요. - P65
오랫동안 이 문제를 교회와 전통의 영향이라 설명해 왔지만 저는 임신중단보다도 피임약의 발명이 남성들을 더 불안케 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섦명하면 좋을까요? 모성의 역사에서 피임이란 하나의 혁명이었습니다. ‘자신이 원할 때 아이를 낳는다‘ 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새로운 발상 이었던 겁니다. 피임약 덕분에 여성은 자립할 수 있게 되었고, 재생산을 결정하고, 심지어는 남성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아이를 낳을 계획을 세울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있어 역사상 큰 전회라 할 만 했어요. 오랜 과거부터 재생산을 주도하는 쪽은 남성이었는데 피임약의 등장으로 이 문제에서 단절된 거니까요. 많은 남성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했습니다. 박탈감을 느꼈고, 불안에 휩싸였어요. 피임약이 남성에게서 남성성을 앗아갔기 때문이죠! 이는 남성들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어요. - P66
당시 무척이나 끈끈한 결속력을 자랑했던 제 부처에서 두 명의 탁월한 여성 법률가와 함께 일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한 명은 최초의 여성 파리고등법원장인 미리암 에즈라티였고, 다른 한 명은 유능한 국가 고문이었던 콜레트 멤이었습니다. 우리 셋은 무척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셋의 입장은 같은 선상에서 만났습니다. 그건 바로 임신중단을 결정하는 최종 권한이 오로지 여성 자신에게 돌아가야 하며, 임신중단 수술이 반드시 의사에 의해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기준을 충족하고, 실질적인 적용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적합한 전략을 찾기 위해 계속 노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처 간 긴밀한 협업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죠. - P84
임신중단을 선택한 여성들이 안도한다고 하더라도 임신중단 수술은 본디 심리적 외상을 유발합니다. - P89
임신중단 수술을 유대인 학살에 비유했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이었습니다. 남성으로 가득했던 회의장에는 위선이 넘쳐났습니다. 회의장에 있는 일부 남성들은 은밀하게 자신의 애인이나 지인이 임신중단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시술소의 주소를 서로 주고받았습니다. - P93
베르나르 퐁은 농촌에서 의사 일을 했던 경험을 살려서, 외젠 클로디우스-프티는 기독교적 인도주의 정신으로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그 덕에 다른 의원들은 이 법안이 방임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위선에 종지부를 찍고 실질적인 고통을 경감하는 조치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 P95
이렇게 부적절하고 민주적이지 못한 역할극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다면 당사자라고 해도 수치스럽게 여기리라고 생각합니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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