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사랑 나쁜 사랑 3부작 2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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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소녀 였을때 지금의 남편과 만나 사랑에 빠졌던 여자는 그의 대학 입학을 돕고 그의 공부를 돕고 그가 직장에 들어가 어엿한 사회인이 되는 동안 계속 그의 옆에서 그를 돕는다. 그의 아이를 둘 낳고 주부로 살아가면서 그녀는 그전에 가졌던 그녀의 직업을 잊고 살았고,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남편과 아이들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남편은 다른 여자가 생겼다며 그녀에게 이혼하고 싶다고 말한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남편의 여자는 이제 고작 스무살이다. 게다가 남편의 애인이 스무살이 되기도 훨씬 전부터 시작된 만남이라, 그는 미성년자인 여자를 애인으로 두고 있었던 셈이다. 자신의 옆에서 경력단절이 되며 자신의 삶을 최상으로 만들기 위해 자리를 지켜주었던 아내를 배신한 데에서 그는 개새끼지만, 미성년자인 소녀와 연애를 시작한 걸로는 더 개새끼이다. 이래저래 쓰레기만도 못한 새끼이니 이 세상에 어디에도 그가 발붙일 곳이 없어야 마땅하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엘레나 페란테의 다른 소설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독하게 몹쓸 놈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내가 느끼는 건 이 남자에 대한 분노에 앞서, 하아- 남편의 배신에 다쳐버린 여자의 무너짐이다.



여자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그에게 바쳤고 또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기에 배신에 치를 떤다. 그가 떠난 자리에서 그녀는 그전에도 그랬듯이 공과금을 납부해야 하고, 보안에 신경써야 하고, 아이들 둘을 학교에서 데려오며 신경써야 한다. 둘이 하던 때에도 딱히 남편이 도와준 건 크게 없었지만, 그러나 둘이 하던 일을 혼자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녀는 자기 앞에 닥친 일상들에 힘겹다. 남편이 잠깐 방황하는 것뿐이라고,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지 않냐고 자기 자신을 다독여 보지만 쉽지 않다. 우리가 사랑했는데, 그가 어떻게 해야 내게 돌아올까, 그를 어떻게 있던 자리로 돌려놓을까 고민하느라 그녀는 힘들다. 죽을 생각도 해보다가, 아니야 나는 그렇게 무너져내리는 여자가 아니야, 이를 악물지만, 그러나, 그녀는 무너져내린다.



공과금을 제때 납부할 수 없고, 아이는 아프고 개는 죽어간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이성의 끈을 자꾸 놓친다. 아픈 아이를, 시름시름 앓는 개를, 열리지 않는 출입문을 열어야 하는, 당장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 앞에서 그녀는 자꾸만 과거속으로 빨려들어가며 현실을 벗어나려고 한다. 이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데, 아이가 아픈데, 개가 죽어가는데, 그런데 그녀는 자꾸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생각이 뻗어나가 좀처럼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다. 남편에 대한 신뢰와 믿음과 사랑이 배신으로 돌아온 것에 대한 충격으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러나 이 여자야 정신을 차리란 말이야, 나는 읽으며 얼마나 힘겨웠는지 모른다. 게다가 그녀를 힘겹게 하는 건, 자꾸만 남편의 애인과 남편이 함께 발가벗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는 데에 있다. 그의 몸에 내가 새긴 흔적들을 그녀가 그동안 다 지웠겠구나 생각하고, 나한테 했던 것처럼 그녀에게도 했겠구나 생각하고, 내 옆에 있으면서도 그녀를 떠올렸겠구나 생각해야 한다. 나는 이렇게 괴로운데 그들은 섹스하며 쾌락속에 있겠지, 생각한다. 혹시 그동안 나와 섹스하며 나를 최상의 상대라 생각했던 건 아닌건가, 지금 만난 새로운 여자야말로 진정한 짝이라 생각하고 있는건가, 생각한다. 나는 그와 오래 살며 그의 성적 취향을 닮게 되었는데, 이제 그는 그녀와 성적 취향이 닮게 되었겠지, 생각한다. 나는 그녀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그렇게 무너져내리면 안된다고, 바닥을 치고 올라오라고, 아이들이 아픈 걸 돌보라고, 당신의 몸을 돌보라고 말하면서도, 그녀의 무너짐에 동참해서 힘들었다. 이제 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취향을 맞추고, 다른 여자에게 익숙해지고, 다른 여자와 은밀한 농담을 새로 만들고, 다른 여자와 역사를 만들어나갈 걸 생각하면 어떻게 무너져내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가 무너져내리는 것을 보는게 정말이지, 너무나 힘겨웠다. 내가 지나온 시간이라 힘들었고, 지내고 있는 시간이라 힘들었다. 아, 나도 까딱하면 이렇게 이성을 잃고 무너져내릴 수 있었어, 하는 생각에 무서워졌다. 아, 내게 돌봐야 할 나보다 약한 존재가 있지 않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미칠것 같은 그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그녀의 영혼이 너무 힘들었다. 그녀가 결국은 그 시간을 극복하는지 보고 싶어서 힘겹지만 꾸역꾸역 책장을 넘겼다. 그에게 복수라도 하고 싶은 마음으로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보았지만, 아무 만족도 느낄 수 없는 그 서러움이 너무 슬펐다. 이건 비단 그녀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나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책을 다 읽고나자 나는 너덜너덜해져있었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데 길 한복판에 버려진 휴지가 된 것 같았다. 이대로 비가 계속 내린다면 흔적도 없이 약해지고 흩어져 사라지고야 말 휴지쪼가리...



너무 힘든 독서였다. 차라리 엘레나 페란테가 분노를 주는 편이 더 좋다. 무너짐말고 분노를 주세요, 페란테 님...

대신 지나도 우리 가족 모두에게 인심이 후했다. 우리 집에 올 때마다 항상 나와 아이들을 위한 선물을 잊지 않았고 내게 자기 소형차를 빌려주었다. 주말에 가서 쉬라며 케라스코 근처에 있는 자기 별장 열쇠를 내어주기도 했다. 별장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었기 대문에 우리는 기꺼이 지나의 친절을 받아들였다. 비록 딸과 함께 갑자기 들이닥쳐 우리 가족의 주말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기도 했지만.
상대방의 친절에는 또 다른 친절로 보답하는 것이 인지상정인지라 호의는 결국 사슬이 되어 우리 가족을 옭아맸다. 마리오는 어느새 카를라의 후견인이라도 된 듯 죽은 아빠 대신 카를라의 선생님들과 상담하러 다녔다. 언젠가 부터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크랄르에게 화학 과외까지 해주기 시작했다. - P11

그의 대학 시험 준비를 도운 것도 나였고 용기를 내지 못하고 망설이는 그를 끌고 시끄러운 푸오리그로타가를 가로지른 것도 나였다. 도시와 시골에서 몰려든 학생들로 주위가 북적이는 데도 터질듯이 두근거리는 남편의 심장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때 나는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남편을 이끌고 대학교 복도를 누볐다.
난해한 정공과목 복습을 도와주느라 남편 옆에서 며칠밤을 새운 것도 나였다. 나는 내 시간을 남편의 시간에 투자해 그를 더 강한 남자로 만들었다. 그의 야망을 위해 내 야망은 접어두었다. 남편이 낙담해서 위기를 맞을 때마다 남편을 위로해주기 위해 내게 닥친 위기는 덮어두었다. 남편이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그의 시간 속에 스며들었다. 나는 집안일을 하고 요리를 하고 아이들을 돌봤다. 일상생활을 위한 귀찮은 일들을 도맡았다. 그러는 동안 남편은 비천한 출신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집스레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올라갔다.
그랬던 그가 이제 와서 나를 떠나버린 것이다. - P116

지금껏 그에게 바친 내 모든 시간과 에너지와 노고를 몽땅 가져가 버린 것이다. 내 모든 노력의 결실을 다른 계집과 즐기기 위해서 가져가 버렸다. 내가 남편을 낳고 길러 지금의 모습으로 만드는 동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랑 말이다. 이보다 더 부당한 일이 어디있단 말인가. 그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게 이런 모욕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의 총기가 흐려진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우리 둘만의 추억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어디선가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남편에 대한 사랑이 더욱 강렬히 느껴졌다. 열정이라기보다는 불안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남편에게 지금 당장 내 도움이 필요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대체 어디에서 남편을 찾아야 할지 몰랐다. - P117

여자는 흔하디흔한 성욕을 대단한 호의로 오해한다. 남자들의 성욕을 사랑하고 지나치게 현혹된 나머지 사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하고만 관계를 가지고 싶어 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오직 한 사람과 관계를 가지고 싶어 한다고 착각한다.
그렇다. 여자는 특별한 남자가 자신의 특별함을 알아주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성욕에 이름을 붙인다. 나만의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 ‘내 사랑‘ 이라고 부른다.
아! 황홀함이니 설명할 수 없는 짜릿함 따위는 엿이나 먹으라지. 남자는 여자와 섹스하고 나면 다른 섹스 상대를 찾는다. 그런 남자들에게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시간이 흐르면 먼저 여자는 떠나고 다른 여자가 오기 마련이다. 나는 수면제를 몇 알 삼키려 했다. 나의 내면 가장 어두운 곳에 누워 잠들고 싶었다. - P139

둘은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섹스를 하고 있었다. 둘은 분명 밤새 섹스할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나 몰래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괴로움에 경련을 일으킬 때마다 그들은 쾌락에 못 이겨 경련을 일으켰다.
나는 이제 그만 힘들어하기로 했다. 깊은 밤 그들의 행복한 입맞춤에 나는 복수의 입맞춤으로 맞서야 했다. 나는 버림받고 혼자가 됐다고 무너져 내리거나 미쳐버리거나 목숨을 버리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조금 망가지기는 했지만 나는 괜찮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온전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누구든 내게 상처를 주려 한다면 나는 그대로 되갚아줄 것이다. 나는 스페이드의 여왕이다. 나는 독침을 품은 말벌이다. 나는 시꺼먼 밤이다. 나는 불 위를 걸어도 타죽지 않는 불멸의 생명체다. - P143

카를라에게서는 나와 똑같은 맛이 날까? 나와 똑같은 냄새가 날까? 혹시 남편은 지끔껏 내 맛과 체취를 혐오스러워했던 것은 아닐까? 지금 내가 카로노에게서 느끼는 것처럼? 나를 만난 후 수십 년이 흘러 카를라를 만나고 나서야 남편은 자신에게 맞는 체취를 찾아낸 것이 아닐까? - P153

정말이다. 나는 바보 같았다. 감정의 수로가 꽉 막혀서 삶의 에너지가 흐르지 않게 된 지 오래다. 마리오가 세심하게 제공하는 황홀한 부부생활에 취해 내 존재의 의미를 가정주부로만 한정지은 것은 너무 큰 실수였다. 마리오의 만족감과 기쁨, 날이 갈수록 성공 가도를 달리는 그의 삶을 내 자존감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너무나도 큰 실수였다. 그중에서 가장 큰 실수는 그와 함께 있어도 내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끼지 못하게 된 지가 이미 오래인데도 그 없이 살 수 없다고 믿었던 일이다. 손끝에 스치는 그의 피부를 마지막으로 느껴본 지가 언제였던가. 그의 입술의 따스한 온기를 느낀 적이 언제였던가. - P275

우리 관계가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그의 어떤 면을 보았던 걸까.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남편의 생각과 행동과 말투와 기호와 성적 취향을 얼마나 많이 닮게 되었을까.
나는 그런 식의 질문으로 종이를 여러 장 채우곤 했다.
마리오에게 버림받은 후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도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는데 왜 아직도 그의 흔적을 몸에 간직하고 살아야 하나.
내가 그의 몸에 남겼던 흔적은 나 몰래 은밀한 관계를 지속했던 지난 몇 년 동안 이미 카를라에 의해 지워졌을 것이다. 한때는 내 몸에 새겨진 그의 흔적이 사랑스럽게만 느껴졌다. 이제는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 그의 흔적을 내 몸에서 떼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내 자아를 손상시키지 않고 그가 남긴 흔적만 내 몸과 마음에서 깔끔하게 긁어낼 수 있을까. - P320

앞으로 다시는 이런 자리에 오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이런 일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절대로 다리 놔주기를 좋아하는 지인들이 마련한 자선 행사를 찾아다니지 않을 것이다. 상대 남자가 제대로 작업하고 있는지, 여자가 제대로 반응하고 있는지 확인하면서 만남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훔쳐보는 이들 앞에 나가지 않을 것이다. 이미 파트너가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광경은 구경거리일 뿐이었다. 손님들이 모두 떠나고 식탁에 음식 찌꺼기만 남았을 때 농담거리로 삼기 딱 좋은 소재가 아닌가. -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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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08-12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116쪽 읽는데, 딱 홍상수 감독 부인이 생각나더라구요.
시어머니, 치매인 시어머니를 한참 모셨다고 그러런데, 세계적인 감독이 되고 사랑 찾아 떠났죠.
다 자기 일이니까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살겠지만.... 제일 좋은게 사랑이고 제일 잔인한 것도 사랑 같아요.
서로 영혼의 짝이라 믿고 있겠죠.... 허허...

저도 이 책 읽을 때 힘들었어요. 화자가 너무 제정신 아니어서.... ㅠㅠ 정신차려라!!! 하면서요

다락방 2019-08-13 07:58   좋아요 0 | URL
화자가 무너져내리는 게 보이니까 미치겠더라고요. 게다가 아이도 아프고 강아지도 아프고 문은 안열리고 ㅠㅠ 아 저 너무 스트레스. 집어던질까 하다가 그래도 바닥 치고 올라와서 일상으로 돌아오는 걸 보고 싶은 마음에...
화자가 자꾸만 새애인하고 함께 있는 남편의 모습을 그릴 때마다 저도 같이 그리느라고 대환장했답니다 ㅠㅠ

비연 2019-08-12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안 읽고 좋아요 만.. 책 다 읽으면 차분히 읽기로~

다락방 2019-08-13 07:58   좋아요 0 | URL
비연님 이 책 읽기 엄청 힘드실거에요. 포기의 순간이 수시로 찾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