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정해 준 자리가 마음에 쏙 들었다. 맨 앞자리라서 선생님 목소리도 잘 들렸다. 나보고 아무 데나 앉으라고 했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쩔쩔맸을 거다. 보나마나 자리를 못 고르고 땀만 흘리고 있었을 게 뻔하다. 그렇게 계속 망설이다가 친구들한테 놀림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3학년이 된 첫날인데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이제 자리가 정해졌으니 걱정할 일이 하나 줄었다. (p.7)


















어제는 안산에 있는 여동생네에 갔다. 조카들과 라이언 킹을 보고 제부와 함께 술을 마셨다. 늦은 밤, 일곱살 조카는 제 엄마와 자러 들어갔는데, 열 살 조카는 제 방에서 책을 한 권 뽑아 내게로 가져왔다. 이모 이거 같이 읽자, 하고는 내게 이 책을 내민다. 이모가 읽어줘, 말하며 조카는 내 옆에 나란히 앉았다. 내가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자 조카는 내 어깨에 제머리를 기댔는데, 그 때의 행복감은 정말이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정말 모를거야. 내가 사랑하는 아이가 내 어깨에 기대어 있는 그 기분...


나는 제목도 처음 보는 그런 책을 펼쳐 읽는데, 아아, 그러나 첫부분부터 나의 마음이 요동친다. 나는 딱 위의 인용문만큼을 읽다가 한숨을 쉬고 말았다. 조카는 이모 왜그러냐고 물었고, 으응, 이모 3학년때가 너무 생각나서, 라고 답했다. 어땠는데? 왜? 말해줘! 조카가 내게 요구했고 나는 그래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타미야, 이모가 초등학교(사실 국민학교였다, 나는)3학년때는 반 아이들이 60명이 넘었거든.

응.

그때 남자아이들을 쭉 키 순으로 세우고 여자아이들도 키순으로 세워서, 제일 작은 남자아이, 여자아이가 짝이 되어서 앞에서부터 앉았어.

응. 이모, 우리도 그래.



그랬다.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에는 번호는 가나다 순이었지만 짝은 키 순으로 됐다. 새학기가 되어 반을 배정받고 나면 복도에 쭈욱 일렬로 세워서는 제일 작은 아이들끼리 맨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앉아가며 짝이 되었다. 나는 항상 3,4번째 줄에 앉았는데 그 때는 내 키가 보통 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보통보다는 약간 작은 키가 아니었나 싶다. 인상적인 건 6학년 때였다. 6학년 때에는 여름방학이 끝나니 선생님이 다시 복도에 줄을 세웠던 거다. 그 때 너무 놀랐던 게 내 앞에 앉았던 남자 아이가 내 훨씬 뒤에 앉게 됐다는 사실이었다. 그 방학동안 녀석은 훌쩍 커버린 것이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방학 끝나고 다시 자리 배치를 한것이겠지. 방학 끝나고 훌쩍 커버린 애는 그 아이 하나만은 아니었을텐데, 내가 그 아이를 기억하는 건, 그 아이가 내가 좋아하는 아이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의 이름은 철수였지만, 뭐 지금 하려고 하는 이야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어쨌든 3학년 때의 나는 매우 수줍은 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을 정도로 수줍은 아이었어. 조카가 읽어달란 책 속 주인공처럼, 선생님이 뭔가 정해주는대로 하는 게 내게는 세상 편했다. 그리고 그래야만 했다. 나 역시도 선생님이 '네 마음대로 앉아' 라고 했으면 어디에 앉을지 몰라 당황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러니까 그 3학년 때. 


선생님은 어느 날, '내일 하루는 여러분 앉고 싶은 사람과 같이 아무데나 앉도록 해' 라고 말씀하셨다. 요지인즉, 앉고 싶은 남녀 아이가 짝이 되어 앉고 싶은 자리에 앉으라는 거였다. 아이들은 즐겁다고 소리를 질렀고, 하교할 때는 매우 시끄러워졌다. 아무개야 내일 나랑 앉을래? 좋아, 아무개야 우리 같이 앉을까? 여자아이 남자아이 할 것 없이 서로 자기가 함께 앉고 싶은 아이를 알고 있는가 보았다. 거침없이 같이 앉자 제안하고 응하는 아이들을 보는 게 매우 부러웠다. 나는 전혀, 전혀 그런 제안을 할 수 없었다. 누구에게도. 감히 엄두가 나질 않았다. 다른 아이들은 다음날 원하는 아이와 짝이될 수 있다는 마음에 신났는지는 몰라도 나는 전혀 아니었다. 나는 학교에 다시 와야 하는 내일이 지옥처럼 느껴졌다. 정말이지 너무, 너무, 너무 싫었다. 



기다리지 않았지만, 오지 않기를 바랐지만, 어김없이 다음날은 왔다. 나는 학교에 갔고, 미리 온 아이들이 저마다 신나게 떠들고 있는 걸 보았다. 나는 어디에 앉아야할지도 모르겠고 누구랑 앉아야 할지도 몰랐다. 나는 그래서, 하는수없이, 그저 원래 내 자리에 가 앉았다. 내가 늘 앉던 그자리. 그리고 내 옆자리에 누가 올지는 나도 모르는 상황에서 얼른 이 하루가 지나가기를 바랐다. 그리고 수업 시간이 가까워오고, 내 빈자리는 누가 와 앉았다. 바로 어제까지도 내 옆에 앉았던 그 남자아이었다. 계속 내 짝이었던 아이. 하아-



선생님은 반을 한 번 휙 둘러보고는 아이들에게 저마다 그 아이와 왜 앉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너는 왜 그 아이랑 앉았니? 물으면 아이들은 잘도 대답했다. 얘랑 앉고 싶었어요, 얘가 앉자고 했어요, 라고. 그리고 선생님이 내 짝에게 물어보았다. 너는 왜 걔랑 앉았니? 라고. 그러자 짝은 이렇게 답했다.



"아침에 오니까 얘가 여기 그대로 앉아있더라고요."



아이들은 모두 와- 하고 웃었다.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내 짝이 말하는 그 때 당시의 뉘앙스는 '내가 원한 게 아니라 마치 얘가 내가 여기 앉아달라는 듯이 앉아있었다'는 거였다. 아이들은 그래서 웃었다. 나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얼른 이 하루가 끝나기를 바랐다. 나는 지금 이 짝과 짝이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다른 애들에게도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창피함이, 그 수줍었던 시간이, 어제 조카에게 책을 읽어주는데 확 떠오르는 거다. 지금이라면 왜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낯선 행동이지만 나는 그 때의 내 수줍음과 창피함이, 얼른 집에 가고 싶었던 그 마음이 생각나 너무 안스럽다. 왜그랬니, 왜그랬어.



그 당시에 나는 y 라는 남자아이를 좋아했다. 우리반 부반장이었다. 그 아이를 좋아했는데, 그 아이는 다른 여자아이와 거침없이 '나랑 앉자' 이러면서 서로 좋아서 앉았단 말이야. 나는 감히 말을 꺼낼 엄두도 안났다. 남자아이들에게 말을 걸지도 못하는 수줍은 아이었어. 물론 이러다가 5학년 때는 남자애들 패고 다니는 애가 되었지만.... 졸라 패고다녔다 그 때.  남자애들이 하도 괴롭히는데 하지말라고 해도 말을 안듣고 선생님한테 일러도 말을 안들어서, 그냥 내가 패버리고 다녔어...인생....깡패라는 별명이 붙었었다. 아니, 5학년때 그렇게 돌변할 아이었는데 3학년 때 왜 수줍음의 왕이었나...


하아.

그 때의 그 수줍은 내가 생각나 너무 짠하고 안타깝고 책 속 주인공이 이해되었다. 아아, 선생님이 자리 정해주는 게 제일 편해요,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 마세요..



지금의 나는 그 때와는 성격이 완전히 변해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사람이 되었다. 미용실에 가서도 내가 원하는 머리스타일을 바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데, 어느날은 원장 선생님이 결정이 빠르고 확실해서 너무 편하다고 하시더라. 지금의 나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도 거침이 없다. 좋으면 좋다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고, 그걸 실천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만약 성인인 지금의 나에게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같이 앉고 싶은 상대에게 '앉을래?'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잘못도 아니고, 내 마음을 숨겨서 상대가 모르는 것도 싫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주기를 나는 원하고, 나 역시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기를 원한다. 다만, 이 생각을 하다보니, 그러나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같이 앉고 싶은데 앉을래? 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나는 여전히 내 안에 어떤 수줍음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만약 너무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했다가 거절을 당한다면, '아니'라는 답을 듣게 된다면, 아, 너무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그래서 아마도 나는 그렇게 청하진 못할거야. 다만, 거절 당해도 가슴이 아프지 않을만큼만 좋아하는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을까. 나랑 같이 앉을래?



그 어린 날, 그 수줍고 부끄러웠던 날이 지나고 며칠 뒤. 여자아이들 몇 명이서 학교 운동장 정글짐 앞에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 때 y의 원래 짝이었던 여자아이가 내게 말했다.


"y가 너 좋아한대. 너랑 앉고 싶었대. 근데 너한테 말을 못하겠더래. 그래서 h한테 같이 앉자고 했대. 근데 이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래."



하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이 밥통아, 니가 진작에 나한테 말했으면 나는 그 수줍은 날을 보내지 않고 즐거이 보낼 수도 있지 않았겠니? 하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나도 너를 좋아했는데..... 하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용기가 없으면 안된다, 여러분. 용기가 없으면 내가 원하는 사람과 앉지 못해. 용기가 없으면 사실은 딱히 원하지 않는 상대와 앉게 되는 것이야. 여러분. 용기를 내자, 용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내가 너를 좋아한다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속으로 아무리 외쳐봤자 상대는 내 말을 듣지 못하고, 상대도 나도 다른 사람을 택해서 앉게 된단 말이다. 물론, 거절의 답이 올 수도 있다. 그러면 아파, 많이 아프지. 아아. 아프면 안되는데...아프지말고 행복하자 우리..




몇 해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2년만에 만나는 남자를 앞에 두고 그간 어떻게 지냈느냐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미 다 지나버린 일이고 또 앞으로도 아무 가능성 없는 사이이니, 이럴 때나 얘기하자, 하는 마음으로 묵혀두었던 얘기를 했었다.



"나 그 때 당신 되게 좋아했었어."

"그럼 말을 했어야지. 왜 바보처럼 말을 안했어?"

"말한다고 어떻게 될 것도 아닌 것 같아서."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말했으면 어떻게 됐을 수도 있지."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시간이 지난 다음에 하는 고백은 무슨 소용이람. 그렇게 그 만남이 있은 후에 우리는 각자의 갈 곳으로 갔고,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다. 정말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었지, 5년간은...... 




아아, 조카는 어제 왜 하필 저 책을 가져와서 30년 전으로 나를 데려다 놓았나. 왜 그 수줍던 나를 불러냈나. 나는 이제 더이상 수줍은 아이가 아니야. 내가 원하는 것을 확실히 아는 어른이 되었어. 그리고 이제는 딱히 숨기고 싶은 마음도 없어. 거절은 여전히 아플 것 같아 망설이게 되지만, 이제는 어떤 아픔은 감당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걸 안다.



늦기 전에 얘기하자. 나는 너랑 앉고 싶다고. 그거 말하지 못하면 이렇게 삼십년 지나서 내가 그 때 왜그랬지 하게 된다.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을 수줍음과 안타까움으로 보내게 된단 말야. 그러니까 말해야 돼. 설사 거절당하는 아픔을 무릅쓰고라도 말해야 한다고. 나는 너랑 앉고 싶다.



나는 너랑 앉고 싶다. 이것이 나의 진실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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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7-29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심이 다락방과 주먹 다락방 사이의 4학년 다락방은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던걸까요!!

다락방 2019-07-29 14:3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게요. 저도 그게 생각이 나질 않아요. 정신차려보니 저는 주먹 다락방이... 그렇지만 제가 먼저 애들 때리고 다닌 건 아니에요. 굳이 저 괴롭히는 애들만 무지막지하게 팼어요. 왜괴롭혀, 왜,왜,왜 이러면서 ........................( ˝)

감은빛 2019-07-29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6학년때 좋아했던 여자아이가 제 뒤에 앉았었어요.
저 역시 당시에는 소심하고 수줍은 아이여서 졸업할 때까지 그 아이에게 얘기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그 아이가 제 뒤에 앉아 있었던 것이 좋았어요.
그 아이의 목소리나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곳에 앉아 있었던 것이 좋았어요.

다락방님 글 읽으니 괜히 저도 어린시절이 떠오르네요.

다락방 2019-07-30 08:34   좋아요 0 | URL
저는 학년 올라갈 때마다 좋아하는 남자아이는 언제나 한 명씩 있었던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나름 금사빠... 였던것 같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린 시절이라니, 아, 정말이지 너무 오래전의 이야기에요. 아주 오래전입니다. 휴..

띠롱띠로리 2019-08-12 0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글투가 너어무 좋아 새벽 세시가 넘너서도 다락방에서 나가질 못하네요

띠롱띠로리 2019-08-12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것이야 라고 하실 때 특히요 박준 시인 리뷰다신거 우연히 보고 들어왔어요 좋은 글들 감사합니당

다락방 2019-08-12 07:43   좋아요 0 | URL
우아 감사합니다.
새벽 세시까지 제 공간에 머무셨다니, 게다가 글을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너무 좋네요.
제가 오래전부터 글을 써서 아주아주 글이 많으니까 언제든 오셔서 충분히 머물다 가셔요. 히힛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