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고 답을 얻는 학문이라면, 혹은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생각하기 때문에 더 나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 라고 답하는 건, 우리가 철학자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크다는 걸 의미한다. 철학자는 그냥 사람이고, 알려진 수많은 철학자들의 성별이 남자인데, 그들 모두 그냥...'남자'였다. 철학자라는 타이틀은 보기 좋지만 듣기에도 좋지만, 그냥 남자였어.

















헤겔을 처음 접하는 나로서 이 책은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다. 만화라는 특성상 글과 그림으로 헤겔의 [역사철학강의]에 대해 알기 쉽게 풀어주어서, 입문자에게 적합하다. 읽는데 속도가 빠르지는 않지만 힘주어 읽다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도 되고 또 재미있다. 물론, 힘주어 읽어야 한다는 게 포인트다. 그냥 설렁설렁 넘겨서는 이 역시 이해하기 힘들 것. 

이 책으로 접해서 다행이었던 게, 중간중간 헤겔의 역사철학 강의에서 헤겔이 한 말은 무엇이었는지 인용되었는데, 그 인용문만으로 보자면 나는 아마 이 책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화에서 풀어줬기 때문에 아, 이게 이런 뜻이구나 하는거지. 무슨 글을 그렇게 어렵게 써놨던지. 에휴.. 풀어 놓으면 다 우리가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인데 다들 그렇게나 어렵게 쓴 이유는 무엇일까.

당장 도전하지 않더라도 이 만화책으로 다른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천천히 조금씩 알도록 해봐야겠다.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 빌려놨는데, 아마 읽지 못하고 돌려주게 될 것 같다. 헤겔 한 권 읽는데 일주일 걸렸고, 헤겔 읽고 나면 일 년은 쉬어야 될 것 같은 이 기분...




역사 철학에 대해 강의를 하고 학생들로부터 질문도 받고 명성도 있었던 헤겔이지만, 자신의 집 가사도우미를 임신시킨다. 자신의 집 가사도우미로 하여금 애낳게 했다는 것만 언급되어 사실 그들 사이에 무슨 로맨스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이것이 로맨스였을 것 같진 않고(고용인과 피고용인 아닌가!), 게다가 설사 그것이 로맨스였다한들 하하하하, 헤겔은 아이와 아이 어머니에 대해 곁에 있는 아버지나 남편이 되어주지는 않았다. 물론 세상의 쓰레기같은 많은 코피노들처럼 헤겔이 싸튀충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양육비는 주었고 모르는 척하진 않았으니까. 그러나 헤겔은 그렇게 가사도우미와 아들을 저기에 둔 채로, 다른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산다. 아아, 남자여... 왜 가사도우미를 그냥 두지 않나요. 그녀에게 욕망을 느껴서 관계를 맺었다면, 맺기 전에 쌍방 동의 했나요? 그렇다면 낳은 아이를 왜 엄마에게 맡기고 양육비만 주었나요, 왜때문에 다른 여자랑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고 살았나요?


헤겔이 가사도우미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거나, 그녀를 그저 성적 대상으로만 보았거나, 신분의 차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뭐가 됐든 그러면 안되는 건데 그렇게 했다. 그렇게 헤겔의 첫번째 아들은 아버지랑 같이 살지 않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는 아들이어야 했지.


남자여.

헤겔, 그냥 남자로구나.

역사란 무엇인가, 그 역사는 그렇다면 왜 그렇게 진행되었는가, 우리는 거기에서 무얼 알 수 있는가, 정신은 역사를 이루는 힘이련가... 같은 거 백날 천날 떠들었지만 집에 가서 가사도우미 임신 시켰지.


남자의 인생이여...




이 책의 뒷면에는 헤겔에게 영향을 미쳤던 몇 명의 철학자들에 대해 짧게 언급이 되어있다. 아아, 그리고 나는 거기에서 너무나 유명한 이름 '쇼펜하우어'를 만난다. 쇼펜하우어는 헤겔과 경쟁 관계에 있었다는데, 나는 이런 글을 읽는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천재성과 독창성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곧 자신의 진가를 알아보고 자신의 철학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쇼펜하우어는 헤겔과 같은 시간에 강의할 것을 고집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패였습니다. 그의 강의는 외면당하고, 사람들은 헤겔 강의에 몰려들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자존심은 형편없이 망가졌고, 그의 철학은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이를 두고 쇼펜하우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철학을 밥벌이 수단으로 타락시키는 헤겔이라는 '협잡꾼'에게 속은 것이라고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쟁심은 쇼펜하우어의 일방적인 것이었습니다. 헤겔은 이미 최고의 철학자로서 그의 능력과 탁월함을, 헤겔 자신은 물론이고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책속에서




아아, 쇼펜하우어의 이 열폭 ... 열등감 폭발 어쩔 것이야. 철학을 연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철학을 알려주고자 하는 사람이지만, 그러나 자신보다 소위 '더 잘나가는' 헤겔을 보고 너무 열등감 폭발해서 '협잡꾼' 이라 부르는 사람, 헤겔의 강의를 듣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하는 사람..아, 그냥... 그냥 남자야...... 열등감 폭발하는 남자.... 그냥 그뿐이야. 뭐 별다를 게 없어. 천재성? 그거 그냥 자기가 자기를 그렇다고 생각하는 거잖아. 꼭 벼는 익을 수록 고개를 숙여야만 하는 건 아니겠지만, 정말 많이 아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많이 모르는지에 대해서도 아는 법인데, 내가 아는 거 이렇게나 많아 천재적인데 이런 나를 몰라주는 새럼들 어리석은 새럼들........ 어리석은 새럼들이 헤겔만 좋아해, 그 협잡꾼을... 이러다니 너무 그냥... 너무 남자잖아.... 쩝....... 쇼펜하우어, 그 유명한 이름, 그러나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던 나는 이렇게 그의 열등감 폭발을 보며 아, 걍 남자구나... 한다. 걍 남자여.



(앗, 소나기가 내린다!)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은 고등학생들의 이야기이다. 주인공(린제이 로한)은 학교의 인기많은 여자애(레이첼 맥아담스)의 인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살 빠지는 식품'이라며 스낵을 건넨다. 학교의 퀸카는 자꾸 자기가 살이 찌는 것 같아서, 그럴 때마다 불안한 마음에 그 스낵을 먹는데, 그런데도 살이 빠지기는 커녕 자꾸 살이 찌기만 해서 미칠것 같은 기분이 된다. 주인공은 그 스낵을 자신이 건넸지만, 그러나 이내 깨닫게 된다.



'아, 쟤가 살찐다고 해서 내가 날씬해지는 게 아니구나' 



이게 진리다. 남을 깔아뭉갠다고 해서 내가 높아지지 않는다. 내가 좋은 사람이기 위해서, 내가 잘난 사람이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잘나고 나 스스로 돋보여야 한다. 나 스스로 빛나야 한다. 빛나고 돋보이는 사람은, '나 빛난단 말이야!' 소리지르지 않아도, 어떻게든 빛나기 마련, 사람들은 그런 사람의 빛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이 고등학생은 그걸 깨달았다. 십대의 고등학생도 깨달은 걸 쇼펜하우어는 몰랐다. 그걸 몰라서 자기보다 인기 많은 헤겔을 협잡꾼... 이라 불렀지. 인생이여... 아아, 어리석음이여.

철학이란 무엇인가, 열등감이란 무엇인가, 어리석음이란 무엇인가, 인기란 무엇인가....



쇼펜하우어 님.

고딩도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뚱뚱해진다고 해서 내가 날씬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님도 얼른 깨달으삼..



생각해봤는데 이거 시리즈 다 사야겠다. 도서관에서 빌렸는데 도서관 책장에서 꺼내자마자 막 재채기 했어. 제가 먼지 알러지가 있습니다. ㅠㅠ

변증법 때문에 이 책 빌렸는데, 거의 마지막에 변증법 얘기도 나와서 너무 좋았다. 친구가 '이제 원숭이를 읽을 시간!' 이라고 했지만, 아... 내 머리는 쉬기를 원해... 나는 쉬겠네 그림을 걸지 않은 작은 미술관처럼. (응?)






일요일이 가고 있다. 벌써 저녁 여섯시라니. 오전에는 조카들이랑 [토이스토리4] 보고 울었다 ㅠㅠ

이제 남은 시간을 책읽으며 고요히 보내야지. 커피랑 빵이랑 과자도 좀 먹고.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도 마저 읽고, [성의 변증법]도 좀 읽고 그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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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9-06-23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시리즈 탐나는데요. 저도 읽어볼게요. 토이스토리가 그렇게 감동적이에요? 어른들을 위한 만화라더니. 전 저녁으로 즉석떡볶이를 먹었더니 속이 뒤집어지네요. ㅡㅡ 주말 마무리 잘 하세요. ^^

다락방 2019-06-23 18:51   좋아요 0 | URL
토이스토리 저도 처음 봤는데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 알겠더라고요. 1편부터 3편까지 저도 안봤거든요. 안보고 4편 봐도 충분히 좋았어요!

블랑카 님도 속 빨리 편해지시기를 바라고 ㅜㅜ 주말 저녁 마무리 잘하세요! :)

단발머리 2019-06-23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래요. 헤겔도 그랬군요. 헤겔도, 헤겔조차도. 헤겔 너마저...
하긴 ‘원숭이 권하는 친구‘에게서 들었던 ‘마르크스 너마저...‘도 흥미진진했죠.
한결같아요, 남자들은...... 변함이 없어. 시대를 초월한 한결같음.

다락방님 이제 남은 시간 계획 너무 좋은대요. 나도 따라하고 싶어요~~~
커피랑 빵이랑 과자를 먹고,
요가책 페이퍼 마저 쓰고, [성의 변증법]도 좀 읽어야지^^

syo 2019-06-23 21:39   좋아요 0 | URL
🐵?? 🐒?!

단발머리 2019-06-23 21:48   좋아요 0 | URL
그 이야기 써주세요.
마르크스가.. 아내가 친정에서 데리고 온 가정부와의 사이에서..
아... 다락방님 서재에 좀 안 어울릴수도 있겠네요... 😞

syo 2019-06-23 21:4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도 그 글 보시고 댓글 다셨던 것 같아요 🙄

단발머리 2019-06-23 22:01   좋아요 0 | URL
아하하~~~ 그랬었나요?
syo님 기억력 엄청 좋네요.
그렇게 암기력이 좋으셔서... 샤샤샥!!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부럽당!

다락방 2019-06-24 13:22   좋아요 0 | URL
마르크스는 뭐였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기억이 안나지만 뭐 어쨌든 마르크스고 걍 남자인거죠. 하늘 아래 대단한 남자는 없는 것 같아요. 다른 남자도 없거요.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아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비연 2019-06-24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걍 남자 ㅎㅎㅎㅎ 웃프네요..ㅜ

다락방 2019-06-24 13:22   좋아요 0 | URL
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루속히 ‘다른 남자도 있다‘는 기대를 저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건 갖다 버려야 돼요. 남자는 걍 남자일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