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자평] 가만한 나날

















그때 내가 몇 살이었는지 모르겠는데, 아마도 이십대 후반이었던 것 같다. 잘 따져보면 몇 살이었는지 나오겠지만 어쨌든 대략 이십대 후반쯤. 그 때 혼자 좋아하던 남자가 있었다. 나보다 몇 살 많았는데(기억이 안나네 젠장 ㅋㅋㅋㅋㅋ 세살이었나 네살이었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는 꽤 친했고 매일 연락했고 자주 만났다. 추운 겨울에는 내 손을 자기 주머니에 가져가 넣어주기도 했다. 나는 그 남자가 너무 좋아서 가슴속에 막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 같고 혼란스럽고 매일이 고민이고 그랬더랬다.


그러던 어느 하루, 그는 어김없이 밤에 전화를 걸어왔고 그렇게 우리는 통화를 했는데, 그가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고 공무원 준비를 하겠다는 거다. 그는 자기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잘 되지 않았고, 그래서 안정적인 공무원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것.


"부모님께는 말씀드렸어?"

"응. 말씀드렸지."

"앞으로 힘들겠네."

"그치. 열심히 공부해야지."



이 대화를 하는 순간 나는 갑자기 내 안에서 그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뭔가 너무 길고 멀었다. 공부를 한다니, 언제까지? 안정적 직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불안정한 상황으로 가다니. 나는 급격하게 사랑이 식는 걸 느끼면서, 내가 한 사랑은 가슴으로 한 사랑이 아니라, 느낌으로 한 사랑이 아니라, 머리로 한 사랑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 사랑이 고통으로 가는 길이라면, 힘든 길이라면, 오 노, 거절합니다, 가 어쩌면 이렇게 단칼에 되는지! 어쩌면 그와 나는 공식적인 연인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는 연인이 아니라 친구였으니까. 그는 내가 부르면 와주었지만, 그러나 우리는 연인이 아니었으니까. 마음을 접는 건 나 혼자만의 몫이었고, 그것은 어렵지 않았다.



며칠 전에 혼술을 하면서 텔레비젼 채널을 돌리다가 <연애의 참견>이란 프로를 봤다. 신청자의 사연을 듣고 패널들이 각자 참견해 말을 해주는 방식이었는데, 내가 보았을 때의 신청자는 공무원준비를 4년간 한 남자를 기다렸다고 했다. 그렇게 열심히 기다렸는데, 막상 합격하고 나서 그는 바람을 피웠던 것. 직장 동기 그리고 전여친. 또다른 사연은(이건 아마 그전에 보았던 것 같다), 돈 없는 남자친구에게 용돈을 줘가며 뒷바라지한 여자의 이야기였다. 돈 없어 기죽을까봐 조금씩 용돈을 자주 주고 가끔은 큰 금액을 주기도 했는데, 어느날 부턴가는 남자친구가 돈을 요구하기도 하더라. 그런데 그 돈을 다른 여자와 데이트 하는데 쓰고 있었다. 하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오래전에 알던 지인 중에도 그런 경우가 있었다. 여자는 직장에 다니는데 남자는 공무원 준비를 한다고 해서 밥도 사주고 가끔 용돈도 주고, 시간 많이 뺏으면 공부하는데 지장있을까봐 밥만 사먹이고 용돈만 주고 돌아왔는데, 그 날 밤에 친구들과 그 돈으로 클럽에 갔다는 걸 알고는 완전 빡쳤던 경우.




김세희의 단편집 《가만한 나날》의 첫 단편 <그건 정말로 슬픈 일일 거야>에서 '연승'은 직장을 그만두겠다 했다.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한 '진아'는 연승이 자리를 잡고 또 안정된 생활을 하게되어 안도했는데, 연승은 더 늦기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며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겠다는 거다. 그래서 직장을 그만둔다고. 진아는 이 일을 친구에게 얘기했다.



진아는 이 얘기를 친구 화영에게만 털어놓았다. 연승이 영화를 찍겠다며 회사에 사표를 냈다고. 그러자 화영이 말했다.

"야,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

"무슨 소리?"

"인생 종 치는 소리." (p.12)



아, 정말이지... 급격하게 애정이 식는다. 직장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다큐멘터리를 찍겠다고 하면, 그러면 생활비는 어떡하지. 집에다 손 벌릴 것인가, 진아가 뒷바라지 해줘야 되는 거 아닌가. 아, 갑자기 너무 싫어지는 거다. 진아도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대학시절부터 지속해온 연애건만, 이 연애가 계속될까?


물론 연승에게 반드시 불안한 미래만 보장되어 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어쩌면 탄탄하게 커리어 쌓는 멋진 감독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아아, 싫다. 싫어... 아직 사회생활한지 얼마 안된 이 젊은 커플에게 이 무슨 낭패란 말인가. 내가 진아였다면 사랑이 짜게 식는 걸 느끼며 세이 굿바이 했을 것 같다. 나는 너의 뒷바라지나 해주며 젊음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


여자친구가 뒷바라지 해주는 모든 남자들이 여자 돈 뜯어먹고 취직한 다음에 바람피우는 건 아닐 거다. 착실하게 공부해서 취업하고 그 힘든 시간동안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맙다고 더 잘하는 남자들도 있을 거다. 그런데 내가 너무 배신하는 남자들의 경우를 많이 보았다. 아 각박한 세상이여...



나는 상대가 어떤 직업을 갖든 별로 상관은 없고, 지금 당장 돈이 없어도 딱히 상관이 없다. 어쩌면 그건 내가 지금 이런 상황, 직장에 오래 다니고 안정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거다. 다만, 나는 나의 상대가 자기 몫을 충실히 하려는 사람이길 원한다. 그것만 갖춰져 있다면 지금 당장은 한 달에 백만원을 번다한들 어떤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향이 '내가 먹을 건 내가 챙긴다'라면, 나는 내가 가진 걸 나눠 써가면서 살아갈 의향이 있다. 이건 정말로 중요하다. 사람은 어려울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계속 도움만 받으며 살 순 없다. 그래서 자기 능력을 자기가 가져야해. 그 능력이란 게 대단한 게 아니라, '내 몫은 내가 하겠다!'라는 강한 의지를 의미한다. 아무리 돈많은 그레이랑 결혼해서 그레이가 직장에 대표로 꽂아주고, 전망 좋은 곳에 집 사주고, 옷가게 털어온 것마냥 옷을 좌르륵 온 집안에 걸어놔주면 뭐하나. 그레이랑 헤어지면 얄짤없는데. 그 때가서 '나 어떡하지' 할 순 없는 것이다. 그 때가 되어도 똭- 일자리를 찾아서 똭- 돈을 벌어가지고 삼시 세끼 밥을 먹을 수 있어야 하는 거야. 무조건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연승도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르바이트 해서 어떻게든 자기 밥벌이를 하면서 꿈을 좇는 사람일지도.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아닐지도 모르고.




책 속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내 마음에 들진 않았다. 어쩌면 이렇게들 답답할까 싶을 정도였어. 그러나 한 십년 전의 내 이야기라고 보면 그럴 법도 했다. 직장에 있어서도 그리고 연애에 있어서도 이들은 당황스러워하고 갈등한다. 이게 맞는건가, 이대로 괜찮은가 끊임없이 불안하고, 그렇게 성장한다.



소설들보다 끝에 실린 작가의 말이 더 좋았다.




첫 번째 독자인 남편에게 감사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를 닮아 가는 내 모습이 좋고, 나를 닮아 갈 당신을 위해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내 삶의 중요한 동력이다. 그는 자신에 대해 아무렇게나 막 쓰라고 말하는, 소설가의 남편으로서도 귀한 덕목을 갖고 있다. 다만 그는 나를 객관적으로 보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 책이 잘 팔릴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그가 너무 실망할까 봐 걱정이다. (p.294-295)




그야말로 소설가의 남편이 되기에 귀한 덕목을 갖추었구나. 글을 쓰는 게 중요한 사람들은, 아마도 다들 그렇겠지만, 글 쓰는 일을 응원해주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인생의 큰 축복이 되는 것 같다. 글을 쓰면서 내 글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다면 좋겠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글을 읽고 좋아하는 것만큼 큰 기쁨이 또 있을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삶의 중요한 동력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다.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은 마음, 그래서 나를 한껏 자랑스러워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 더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그 마음이 내게도 중요한 동력이다. 나는 항상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랑스러운 사람이길 원했다.

학창시절 여동생이 전교1등하고 장학금 받고 그러는 게 나는 너무 자랑스러웠다. 다른 사람들은 시기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냐고 했는데, 전혀. 나는 막 자랑하고 다녔다. 내가 일등한 것도 아닌데. 그런 한편, 나 역시 여동생에게 자랑스러운 마음을 갖게 하고 싶었다. 이런 자랑스러운 마음, 동생도 가졌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어야 해, 라고.


그런데 언젠가부터 여동생은 내게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언니가 내 언니인게 너무 좋다고, 자랑스럽다고. 계속계속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어야지. 자랑스러운 언니가 되고, 누나가 되고, 이모가 되고, 딸이 되어야지.




그런데!!


작가의 말이 참 좋으네, 소설보다 더 좋다, 하면서 책장을 넘겨 '신샛별'의 <작품 해설>을 읽는 순간 '?????????????????????????????????????????????????' 이렇게 되어버렸다. 이 부분에서였다.



'나'는 루미가 자신과 법적 부부 관계를 맺은 이유가 단지 '낮은 금리'의 혜택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고 의심한다. 일생을 돈 버는 기계로 살아온 아버지의 최후에 자신의 부족한 경제력을 잇대어 보면서 이 소설의 남성 화자는 결혼에 대한 약속, 즉 루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신뢰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맞벌이 가정이 늘어나면서 부양의 책임에 균형이 생겼다고는 해도 한국 사회가 남성에게 부양의 의무를 상대적으로 더 많이 부여하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면, 이 소설이 포착한 남성 화자의 불안에 공감할 여지는 충분하다. (작품해설, p.320-321)



네??? 아니, 이 소설이 왜 갑자기 부양의 의무를 짊어진 남성의 불안.... 으로 해석되는거지?



그러니까 '나'는 '루미'와 동거중이다. 루미는 논문을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제적으로 남자에게 의존하진 않는다. 남자의 아버지는 지금 요양원에 있는데 술을 마시면 안되는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으며 고집이 세다.




엄마와 누나는 병원에서 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아버지가 마치 집에 두고 싶지 않은 가구라도 되는 것처럼 치워 버리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그들은 요양 병원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누구에게 가장 좋다는 건지는 언급하지 안았다. 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계속 거기 있길 바랐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p.166)



남자도 마찬가지. 아버지처럼 고집이 세고, 아버지처럼 간 수치가 너무 나빠 술을 마시면 안되는데도 계속 술을 마신다. 이러니 루미가 빡이 쳐 안쳐.



"20대에 이 정도 간 수치는 만 명 중에 한 명 있을까 말까예요. 젊다고 방심하면 큰일 나요."

이건 지난 건강 검진 뒤에 의사가 전화를 걸어와 한 말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루미에게 들려줬고, 그녀는 그 뒤로 내가 술을 마실 때마다 질겁했지만 요즘은 포기한 상태다. 하루는 일어나 보니 냉장고 문에 내 간 수치와 혈압, 몸무게가 적힌 노랑 정사각형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나는 루미가 보는 앞에서 그걸 거칠게 떼어 낸 다음 구겨서 던져 버렸다. (우리가 물나들이에 갔을 때, p.176)



아, 벌써부터 뽝- 스트레스가 오지 않나. 그렇다면 아버지를 요양원에 맡기기까지 엄마와 누나는 어땠을까. 그 긴 세월을 어떤 사람과 어떻게 보낸걸까. 엄마와 누나가 인정 없는 사람이라 아버지를 요양원에 가둔걸까?



식당을 나와 다시 아버지는 앞서 걷는다. 운동장이 휑한 초등학교 앞을 지나, 교차로를 지나, 좁은 길로 접어든다. 목욕탕이 있는 길이다.

"오늘은 루미 있잖아요. 그냥 집으로 가요."

그러나 아버지는 입을 다물고 길 한가운데 고집그럽게 서 있다. 루미가 다가와서 내 팔을 만진다.

"내가 이거 갖고 어디 가 있을게. 목욕하고 와."

나는 아버지와 루미를 번갈아 보고, 전기장판을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 내 종아리에 기대 세운다. (p.174)




아들하고 목욕하고 싶었을 수 있다. 아들이 있어야만 비로소 목욕탕에 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들이 여자친구와 함께 왔는데, 어떤 말도 없이 그저 묵묵히 목욕탕으로 향한다니. 대체 저 배려없고 예의없는 고집스러움은 뭐란 말인가. 저 성격으로 평생 살아왔다는 게 아닌가. 나는 배려하지 않지만 너는 나를 배려해야 해, 가 깔려있는 이기적임.



아버지는 아들에게 루미도 네 엄마랑 똑같다, 이기적이다, 라고 욕을 한다. 그러나 남자는 '루미는 엄마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루미는 엄마와 다르다. 엄마는 아버지가 술에 취해 목소리를 높이면 똑같이 소리쳤고, 아버지가 식탁에 있던 엄마를 향해 담뱃갑을 던졌을 때는 벌떡 일어나 앉아 있던 의자를 집어던져 버렸다. 내가 흥분하고 소리 지를 때 루미는 입을 다문다. 작은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고, 그러다가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루미는 엄마와도 다르고, 우리 가족 누구와도 다루다. 그녀는 조용하지만 야심에 차 있다. 계획을 세우고, 실천한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우리가 물나들이에 갔을 때, p.178-179)




뭐라고? 술에 취해 아내에게 목소리를 높이고 담뱃갑을 던져? 평생을 그런 식으로 살아오니 이제 엄마와 누나가 아버지 연락도 받기 싫어하는 거 아냐. 그런데 이 남자를 보라지. 제 아버지랑 다를 게 하나도 없네. 소리지르는 남자라니, 정말 최악이다. 같이 사는 여자에게 한 공간에서 소리를 지르다니, 정말 최악이야. 진짜 끔찍하다. 그 상황에서 루미는 얼마나 답답하고 공포스러웠을까.




남자는 아버지의 말년이 이렇게 된 것이 속상하다. 엄마를 원망한다.




부산에 집이 있고 가족이 있는데 왜 말년을 이렇게 보내야 하는지, 속이 답답해진다. 엄마와 누나는 아버지를 자기들 눈앞에서 치우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엄마가 원망스럽다. (p.178)




그러나 루미는 다르게 본다.



루미는 다른 입장이었다.

"난 너희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언젠가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평생 얼마나 시달렸겠어?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은 거지. 왜 그걸 참아야 돼?'

이런 말도 했다.

"그러는 넌 도망쳤잖아. 그렇게 말할 권한이 없지. 아버지 꼴 보기 싫어서 서울로 대학 왔다며?" (p.178)




아니 이사람아...자네는 젊을 때부터 아버지 곁에서 도망쳐놓고, 이제와 엄마와 누나가 아버지를 모른척한다고 원망하는거야? 돌았어?



"내가 아버지처럼 되면 너도 날 떠날 거야?'

루미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나는 그녀가 언젠가 결혼식을 올릴 생각이 있긴 한지, 아버지 때문에 피하는 게 아닌지, 나를 남편으로 여기긴 하는지 묻고 싶지만, 쉴 새 없이 찰싹이는 맑은 물을 바라보면서 가까스로 숨을 삼킨다. (우리가 물나들이에 갔을 때, p.186-187)




남자는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 엄마와 누나가 아버지를 저버린 게 늙고 병들어서라고. 아니, 그는 폭력적이고 고집스러워서이다. 평생 시달리다가 이제 더이상 참을 수 없게 된거다. 아버지처럼 되면 자기를 떠날 거냐고? 남자는 지금도 충분히 자기 아버지처럼 살고 있기에 나는 루미에게 떠나라고 말하고 싶다. 그건 그가 늙고 병들어 돌보아주기 싫어서 떠나는 게 아니라, 그런 고집스러움과 지긋지긋하게 말을 듣지 않는 걸 견디기 싫어서이다. 어디서 떠난 사람을 죄인 만들어, 그간 자기가 한 짓은 생각 안하고.




오늘따라 루미의 얼굴이 어려 보인다. 막 세수한 것처럼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에, 귓불 언저리에 솜털이 빛난다. 평소 화장을 거의 하지 않아서 학교에서도 대학생으로 오해받는 일이 자주 있다고 한다. (우리가 물나들이에 갔을 때, p.169)



루미의 지금이 그런것처럼, 남자의 어머니도 어려 보이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졌던 적이 있을 것이다. 귓불 언저리에 솜털도 빛났던 시절이 분명 있었을 거다. 그러나 지독하게 고집스런 남자를 만나 살아가는 동안 가슴속에 화만 쌓였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던지는 담뱃갑을 맞고 가만있는 여자가 아니라, 어머니는 의자를 집어던지는 여자였다. 아버지의 행패를 말린 것도 아니고 오히려 도망쳐놓고 이제와 여자에게 '나중에 나를 떠날거야?' 묻는다니, 뻔뻔하기 짝이 없다. 만약 여자가 떠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잘하면 된다.




책은 읽는 사람의 몫이고 거기에서 무얼 느끼고 받아들이는가도 읽는 사람의 몫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여기에서 '부양의 의무를 지고있는 남성화자의 불안' 에 공감....한다는 해설이 나오는걸까? 나는 여기서 폭력적이고 고집스런 남편과 평생을 살아야 했던 여자들의 홧병이 느껴지는데?


보통 소설 뒤에 실린 해설이라면 반드시 읽는 건 아니지만, '읽는 게 나에게 도움이 될것이다'라는 생각으로 훑어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부양의 의무 남자 고통... 이런 거 보는 순간 뭔가..... 읭? 하게 되어버렸어. 하아-




아무튼, 김세희 작가님, 소설 열심히 쓰시라. 응원해주는, '자신에 대해 아무렇게나 막 쓰라'고 말하는 남편이 있으니, 그 힘을 받아 쓰고 또 쓰고 또 쓰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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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4-18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대한 관심은 생기지 않던데, 중간에 다락방 님이 말씀하신 글쓰는 사람에 대한 응원의 마음 그 부분 글은 참 좋네요. 공감가기도 하고요. 다락방 님도 계속 열심히 쓰시고, 또 책 내세요. 다음 책은 한때 연애 흑역사를 겪은 D모 여인의 페미니즘적 연애성공기를 그린 소설? 이런 거? 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4-18 10:55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소설보다 작가의 말이 더 좋더라고요. 후훗.

음....D모 여인의 페미니즘적 연애성공기..음..... 음... 소설이니까...음.............음...... 그것은 제가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왕 쓸거면 19금으로 쓰는 쪽으로.... 래핑되어 있는 책으로다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19-04-18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말, 좋아하는 1인으로서 이 책 ‘작가의 말’ 진짜 뭉클하네요. 김세희라는 이름을 기억해두어야겠어요.

책은 자고로 래핑되어 있어야하죠. 아, 기다려집니다. 래핑된 책비닐을 북북 찢게 될 그 어떤 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4-18 15:14   좋아요 0 | URL
작가의 말 참 좋더라고요. 해설은 그에 못미쳤지만 말입니다.

살면서 한번쯤은 래핑될만한 책을 써봐야 하지 않을까, 뭐 그렇게 생각합니다. 음.. 그 때는 필명으로 써도 좋겠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9금 소설을 한 번쯤 쓰고 싶은데 쓸 수 있을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