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씩 책이 잘 안읽히는 때가 온다. 책이 잘 안읽히고 그래서 별로 읽고 싶지도 않은 그런 때. 내게는 요즘이 그런 때인지라 책을 못읽고 있는데, 그럴 때 만난 책은 당연히 진도가 안나가고, 그렇다면 이 책과 내가 만날 운명이 아닌건가.... 싶어지면서, 책이 먼저 안좋아서 나에게 책 안읽히는 때가 온것인지, 하필이면 책 안읽히는 때에 이 책이 내게로 온것인지...뭐가 먼저인지를 모르겠는 뭐 그런 상태이다. 게다가 어제 퇴근길에는 심지어 책을 회사에 두고 갔어. 음... 지하철 안에서야 비로소 가방 안에 책이 없다는 걸 알고는 음... 이것은 읽기 싫은 나의 무의식의 반영.. 같은 것인가..... 라고 생각했다. 읽기 싫다는 나의 저 깊은 안 쪽의 생각이 책을 안챙기는 행동으로 나타났다. 음....


아무튼,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 그러나 포기하는 책은 바로 이것이다. 그래, 나는 포기를 택했다. 이 책을 읽기를 중단하자. 다른 재미있는 책을 읽자. 그래야 책 읽기를 지속할 수 있다...


















2018년만해도 내가 베트남에 몇 번을 갔지? 세 번 갔나, 네 번 갔나?

아무튼 내가 베트남을 여러차례 다녀오고 베트남 또 가고 싶어하는 사람으로서 베트남의 문학을 읽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딱 골라잡았는데, 이 책이 진도가 안나가는 거다. 아아, 진도가 안나가는 거 붙잡고 있지 말고 과감히 내치자. 지금은 때가 아닌 것이야... 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운의 문제가 아니라 이 책의 잘못일런지도 모르겠다.




장군은 부인의 말을 못들은 척했습니다. 그녀는 아이 다섯을 낳은 후에도 주판을 튕기는 듯한 사고방식, 훈련교관의 척추, 처녀의 몸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1권, p.12)



처녀의 몸..

처녀의 몸..

아이 다섯을 낳았지만 처녀의 몸.....



언어에는 힘이 있다. 그 단어가 가진 고유한 힘. 이 책에서 '아이 다섯을 낳았지만', '처녀의 몸' 이라고 하는 순간, '처녀의 몸'이라는 워딩을 내뱉어 버리는 순간, 그 반대의 언어를 떠올리게 한다. 뭐야, 칭찬의 의미로 처녀의 몸을 썼으면, 반대되는 건 아줌마의 몸이라는 거야? 처녀의 몸이란 워딩을 내뱉는 순간 처녀를 올려침과 동시에 처녀가 아닌 사람을 내동댕이 치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처녀와 아줌마, 여성 모두에 대한 혐오가 저 안에 들어있는 거다. 그렇다면 올려침이 칭찬이라 볼 수 있을까? 처녀의 몸이라고 내뱉어 버리는 순간 그것은 혐오가 된다. 여자의 몸을 처녀의 몸이라고 칭하는, 묘사하는 순간 그렇지 않은 몸도 생겨버리기 때문에. 하아. 처녀의 몸이라니.. 화자는 만약 그런 몸이 아닌 여자를 본다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또 어떻게 내뱉을까?


처녀의 몸이라니... 맙소사..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냥 읽으려고 했다. 그렇게까지 의욕이 없진 않았어. 아아, 이런 거 일일이 걸고 넘어지면 나는 정말 세상에 읽을 책이 없을거야... 그렇게 읽어나가다가, 아니, 씨부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나 이 욕 안하기로 했는데 ㅠㅠ) 이런 문장을 만나고야 만것이다.




우리가 떠날 때쯤 마침내 비가 그쳤습니다. 뇌수종 환자 같은 해병대원 3인조가 여자의 질처럼 어두컴컴한 곳에서 비틀비틀 걸어 나왔을 때, 우리는 습지의 어귀에서, 그러니까 노천 맥줏집의 출구인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뒷골목에서 마지막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1권,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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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문체가 조용하고 차분해서 내가 좋아라 하는 타입이다. 나는 방방 뜨는 가벼운 문체를 싫어하기에 이런 문체는 내가 좋아라 하는 성질의 것이야. 그런데, 처녀의 몸은 넘어가려고 했는데, 여자의 질처럼, 이라니. 하아-

나는 책날개의 작가 소개를 봤다. 작가는 2016년에 이 책으로 퓰리처상을 비롯해서 이것저것 상도 많이 받았더라. 어둠에 대한 묘사를 고작 여자의 질처럼이라고 하는 작가... 어둠을 묘사할  때 생각나는 게 여자의 질밖에 없었나. 도대체 나는 이런 묘사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 왜 이런 식의 묘사를 할까? 그 머릿속엔 뭐가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걸까? 어둡구나, 여자의 질같다...이런 생각하나? 어떻게 어둠에서 여자의 질이 연관될까? 어느날 섹스중에 상대의 여자의 질을 들여다 보았더니 어두웠나? 아, 이곳은 어둡구나, 좋은 비유를 할 수 있겠어. 뭐 이런 생각한건가? 세상에 내놓는 글에 여자의 질처럼.. 하아- 나는 이 문체가 좋고 소설이 우아할 것 같아서 계속 읽고 싶었는데, 뭐랄까, 그냥 맥이 툭, 끊겨버린 것 같다. 소설의 흐름에 이 부분은 지극히 사소하고 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러니 무시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무시하고 넘어갈만한 걸 도대체 왜 써놨는가.


잘가요, 동조자, 나는 당신을 포기합니다. 베트남 소설 어떤건지 읽어보고 싶은데 지금은 이걸 읽을 기운이가 없다. 세상에 많고 많은 게 소설이고 책인데 이렇게 턱 걸리는 걸 읽어낼 자신이 없어. 모르겠다. 내가 지금 책을 잘 못읽겠는게 이 책의 영향인지, 이 책이 하필이면 이럴 때 내게 걸려든건지.


굿바이-







그래서!


영화를 봤다. 하하하하하. 이거 개봉했을 때 되게 보고 싶었는데 놓쳤다가, 어제 옥수수에 무료로 떴길래 오오? 하면서 보았는데, 와, 오늘 아침 출근길에 보면서 너무 무서워서 ㅠㅠㅠㅠㅠㅠㅠㅠㅠ



adrift


'표류하는' 이라는 뜻의 단어. 그러니까 이 영화속에서 여자 주인공 '태미'는 표류한다. 아.. 그 외로움과 허기, 육체적 고통 앞에 내 신경줄이 진짜 타다닥 끊어져버리는 줄 알았어.


'태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와 여행하며 다닌다. 여행 하는 틈틈이 일을 하고, 그 돈으로 세계를 돌고 있는 중. 그렇게 다시 너무 좋았던 타히티 에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마찬가지로 여행이 삶이고 삶이 여행인 남자 '리차드'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리차드는 자신이 직접 요트를 만들어 그 요트를 타고 항해를 하며 살고 있다. 하아- 나는 예고편으로 그냥 남녀가 사랑에 빠지고 같이 여행하고..뭐 그런건줄 알았는데 여자가 바다 위에서 표류하며 버텨내는 걸줄은 몰랐어. 너무 힘들었네 진짜 ㅠㅠ


아무튼 리차드와 태미는 사랑에 빠지고, 둘다 여행을 좋아하는만큼 함께 항해하기로 한다. 아니, 왜 하필 항해인가. 진짜 이것도 맞아야 하는거지, 나는 내가 아무리 사랑하는 남자가 우리 항해하며 살자 라고 하면, 그것이 설사 프로포즈라 한들 '아니'를 말하겠다. 바다 위에서 얼마가 될지 모르는 시간을 지내는 것도 싫고 항해하는 내내 나와 그와 둘이서만 있는 것도 싫다. 나는 사랑도 연애도 좋고 즐겁고 행복하지만, 세상이 필요해. 내 집안에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면, 그와 웃고 이야기하는 시간도 너무 소중하지만, 집 밖으로 나가 친구를 만나고 마트에 가고 커피를 마시고 도서관에 가고 익숙한 사람들을 만나고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내게는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항해를 하면 그 사람하고 나랑 둘이서만 계속 붙어 있어야 되는건데... 아니, 난 못해. 내가 아무리 당신을 사랑한다해도 그렇겐 못해. 자신의 요트로 홀로 항해하던 남자라면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 게다가 남은 삶도 그렇게 살아갈 사람이라면 진짜 노땡큐..사랑하는 사람과 단둘이 사는 삶과, 사랑하는 사람 없이 세상과 사는 사람 둘 중에 택하라면 나는 고민없이 후자인 것을...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디에서 살아도 누군가를 만들 것이다. 좋은 이웃을 만들고 좋은 지인을 만들것이야. 왜냐하면, 그걸 내가 원하니까. 



리차드와 태미는 항해하며 보내기로 하면서 우리 어디갈까, 여기 가볼까 저기 가볼까 그러던 와중에, 한 미국인 노부부로부터, '우리 요트를 미국까지 갖다 줘, 돈 주고 돌아오는 항공권 1등석으로 끊어줄게' 라는 요구를 받게 된다. 노부부는 갑자기 영국에 가야하는 상황이고, 자신들의 호화요트를 미국까지 가져다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 리차드는 태미에게 말했다.



"지구를 반바퀴 돌아 당신을 만났는데, 놓치고 싶지 않아."


지구를 반바퀴 돌아 당신을 만났으면 놓치면 안되는거야, 밥통아. 보고있냐?



아무튼 그렇게 리차드와 함께 이 호화요트를 타고 미국으로 가기 위한 항해를 시작한다. 그러다 허리케인을 만나게 되고...



사라진 줄 알았던 리처드가 저기에 있는 걸 발견하고 열심히 헤엄쳐서 그를 망가진 요트 위로 끌어 올린 뒤, 태미는 살기 위해 노력한다. 리처드는 이미 갈비뼈가 부러지고 다리도 부러져서 움직일 수 없는 상황. 그 넓은 바다 위에서 태미 혼자 좌표를 계산하고, 배를 몬다. 남은 식량을 찾고 구조 요청을 하기 위해 애를 쓰는등 살아남기 위한 모든 행동을 태미 혼자서 해야 한다. 리차드는 꼼짝할 수도 없는 상황이기에. 음식도 다 떨어지고, 태미는 살기 위해 바닷속으로 뛰어들어 물고기를 잡는다. 그렇게 홀로 바다 위에서 41일간 표류하다 그녀는 커다란 배를 만나 구조된다.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으며, 태미는 지금도 여전히 항해중이라고 한다.



홀로 바다 위에서 식량을 마련하고 좌표를 계산하며 내가 지금 어디쯤 있나 생각해보고(방향키가 고장난것 같아!) 또다시 닥쳐올 폭풍에 대비하는 태미는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하루를 또 하루를 버텨가는 것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오늘 아침 출근길에 태미와 리차드가 폭풍우를 만나는 장면에서 너무 무서운거다. 춥고 외롭고 무섭고.. 그보다 더 무서운 건 바다 위에 홀로 남게된 태미였다.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해야하는 태미. 그렇게 혼자 살아남는 태미. 포스터 보면 무슨 세기의 로맨스..같은 걸로 얘기해놓은 것 같은데, 뭐, 사랑이 살아남는데 도움이 되긴 했지만, 이것은 여자 혼자 살아남는 이야기이다. 그 넓은 바다 위에서. 아, 진짜 .. 너무 무서웠다. 그 고독이. 



살아남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끝까지 버티고 살아줘서 고마워요.



동조자는 1권의 33쪽 까지 읽고 그만 읽기로 결정하고 다른 책을 오늘 들고왔다.

사무실 책상 위에는 어제 사온 앙버터가 남아 있다. 앙버터 먹어야지. 사실은 이미 먹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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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겟타 2019-01-18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따금씩 그런 고민을 할때가 있어요.
평소에 참 좋아하던 방송인, 정치인.. 혹은 지인인데 젠더의식이 결여된 어처구니없는 발언을 보고 있자니
와~ 이 사람은 좀 아닌데? 이 사람의 이런 생각까지도 품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었어요.
그 사람의 어떤 면(탁월한 감각, 언변, 지적능력)을 보고 좋아했지만 어떤 면(결여된 젠더의식)에서는 도저히 동의를 못한 경우에 과감히 떨쳐낼 수 있을까? 그런거를 일일히 다 하다보면 진짜 좋아할 사람은 적어지고 방송도 들을 것이 없게되는 것은 아닐까?
고민 끝에 그사람에게 품었던 애정을 단칼에 떨쳐버릴 수는 없겠지만 서서히 멀어지는 훈련(?)을 통해 결국은 포기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일상에서 누구에게 아픔을 주는 말을 하지는 않았는지도 생각하게 만드네요.

다락방 2019-01-18 12:17   좋아요 1 | URL
평소에 좋아하던 사람으로부터 어떤 실망스런 언행을 목격하게 됐을 경우, 저 역시도 고민을 합니다. 지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그런데 뭔가 어떤 넘지말아야할 선 혹은 자신만의 기준 같은게 있잖아요. 저와 다른 생각을 하거나 다른 걸 좋아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살아온 환경이 다를 수 있다고 받아들이는 편이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건 얘기가 다르죠. 뭐랄까, 이건 안된다, 가 확 찾아오는 것 같아요. 그런 경우에 저는 서서히 멀어지기 보다는 확- 정나미가 떨어지더라고요. 결여된 젠더의식은 제게 넘지 말아야할 선이에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놓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곁에 있습니다. 너무 좋아요!

그나저나,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는 열심히 읽고 계십니까? 네?

블랙겟타 2019-01-18 14:30   좋아요 0 | URL
어쩌면.. 제가 아직도 나이브한 생각을 가진 걸 수도 있겠네요..

아.. 네!. 감기때문에 이번주는 조금 늦게 읽어서 이제야 막 올리게 되었네요. ^^;;;

clavis 2019-01-20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핫.앙버터 맛있겠네요.락방님의 솔직함에 만세를 불러봅니다.

다락방 2019-01-21 09:31   좋아요 1 | URL
앙버터 맛있어요! 비록 버터를 덩어리째 씹어 엄청난 고칼로리이긴 하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