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1권을 읽으면서도 할 말이 많았지만 건너뛰고, 오늘 출근길부터 2권을 읽기 시작했는데, 내가 에스메랄다 때문에 정말이지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일전에도 <stupid cupid>노래 올리면서, '누구나 한 번은 어리석은 사랑에 빠진다'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아주 오래전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아아, 어리석은 사랑은 생애 꼭 한 번쯤 숙명인 것인가..하는 생각을 했다.
에스메랄다는 집시를 싫어하는 부주교의 명에 따라 성당 종치기인 카지모도에게 겁탈당할 위기에 놓인다. 그 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시인, '그랭구아르'가 그녀를 구해주고자 하지만 한 대 맞고(두 대였나) 뻗어버리고, 중대장인 '페뷔스'가 나타나 그녀를 구해준다. 에스메랄다는 이 일로 페뷔스에 대한 연정을 품게 된다. 하아-
오래된 영화들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게, 위기에 빠진 여자를 구해줌으로써 점수를 따는 남자였다. 나를 구해주는 남자 라는 건 확실히 매력적이다. 나에게 해를 가하려는 남자보다 나을 거야 뭐 두말하면 잔소리니까. 그러니 많은 동화속에서는 그렇게나 백마탄 왕자나 기사가 나타나 여자를 구해주는 걸 써낸거겠지. 그렇지만,
그 당시에 다른 남자의 겁탈로부터 구해줬다고 해서 이 남자는 정의로운 남자일까? 좋은 남자일까? 훌륭한 남자일까? 내가 사랑에 빠져도 좋을 사람인걸까?
페뷔스는 집시 에스메랄다를 구했지만, 구한 건 사실이지만, 구하는 과정에서 그녀를 '갈보'라 부른다. 겁탈하지 않았지만 여자를 갈보라 부르는 남자가, 좋은 남자일까?
게다가 그는 중대장으로서 이곳 저곳을 다니며 술과 여자를 즐기며 다녔다. 귀족 약혼자가 있지만 시들시들하고 입버릇을 비롯한 생활패턴이 천박해진 게 드러날까 노심초사 하는 남자다. 그래도 그 중대장이라는 신분과 잘생긴 외모 때문에 귀족 여자들은 그의 눈에 들고 싶어하고 그와 대화하고 싶어한다. 약혼녀를 비롯한 여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이 남자 하나를 두고 서로 긴장하고 있는 상태에서, 저 멀리, 에스메랄다가 춤추는 게 보였고, 여자들은 그에게 '일전에 니가 구해준 적이 있으니 그녀를 불러보라'고 말하고, 이에 페뷔스는 그녀를 불러 자기들앞으로 오게 한다.
막상 그들에게로 다가온 에스메랄다를 보자 여자들 모두 긴장하고 적의로 똘똘 뭉친다. 에스메랄다가 너무 예뻐서. 그래서 그녀를 다같이 적으로 삼고 멸시하려 든다. 나는, 위고가 이 책에서 이런 식으로 여자들을 묘사하는 게 불편했는데, 1권에서는 종치기이자 꼽추인 카지모도를 순전히 외모 때문에 저주하고 욕하는 여자들이 등장한다. 여자들이 더 그렇다고 말하면서. 나는 내내 궁금했다. 정말 흉측하게 생겼다는 그 이유만으로 여자들은 저주하고 욕하는가? 정말 그래?
위고가 그려내는 여자들은, 이제 신분이 다른 여자 하나를 불러놓고 단체로 모욕한다. 거기엔 중대장이 그녀들 앞에서 에스메랄다를 정말 예쁘다고 말한 게 컸다.
플뢰르드리스는 짐짓 상냥한 체하는 멸시 어린 태도로 중대장에게 대답했다. "제법 예쁘네요."
다른 아가씨들은 수군거리고 있었다. (p.23)
아가씨들은 그녀의 면전에서 그녀의 외모를 평가하고, 외모로는 그녀를 깔아뭉갤 수 없자 그녀가 입은 옷을 지적하고 그녀의 싸구려 귀금속들을 지적한다.
요컨대, 이 대갓집 규수들 앞에서 한낱 보잘것없는 광장의 무희 따위가 무엇이겠는가! 아가씨들은 그녀가 거기에 있는 데는 전혀 아랑곳도 하지 않는 것 같았으며, 그녀 앞에서, 그녀에 관해, 그녀 자신에게, 큰 소리로, 마치 무슨 꽤 불결하고 꽤 천하면서도 꽤 예쁜 것을 이야기하듯 지껄이고 있었다.
집시 여자가 그렇게 마늘로 찔러대는 것을 못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때때로 수치심에서 오는 홍조와 분노의 섬광이 그녀의 눈이나 볼을 타오르게 하고, 경멸의 말이 그녀의 입술 위에서 주저하는 것 같았고, 독자가 이미 그 버릇을 알고 있다시피, 그녀는 멸시감으로 입을 삐쭉거리곤 하였으나,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까딱 않고 서서 그녀는 체념한 듯이 슬프고 부드러운 눈으로 페뷔스를 지긋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눈길에는 또한 행복감과 애정도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초겨날까 봐 두려워서 꾹 참고 있는 것 같았다.
페뷔스로 말하자면 그는 웃고 있었고, 교만과 동정심 섞인 태도로 보헤미아 아가씨의 편을 들고 있었다.
"저들이 멋대로 지껄이게 내버려 두구려, 아가씨!" 그는 그의 금 박차를 짤랑짤랑 울리면서 되풀이했다. "물론 당신 옷차림이 좀 괴이하고 야성적일지도 몰라. 하지만 당신 같은 아리따운 처녀가 아무려면 어때?" (p.27-28)
아, 너무 무례한 사람들이다. 사람 면전에서 외모를 평가하고 지적하고..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그곳의 분위기는 그녀에게 얼마나 수치이고 억압일까. 그럼에도 애정을 품고 있는 페뷔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라니, 나는 에스메랄다에게 따끔하게 말해주고 싶었다. 아니야, 그 남자 아니야, 그 남자 어차피 그 안에서 같이 동조하고 있는 남자자잖아. 그 남자 형편없는 남자야, 그 남자를 사랑하지마. 나는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이미 사랑에 빠진 그녀에게 내 말은 들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stupid cupid> 라는 노래에 대해 글을 썼을 때는 영화 《프린세스 다이어리》를 보고난 후였다. 그 영화 속에서도, 기억은 잘 안나지만, 주인공이 어리석은 사랑에 빠졌었다. 그러다가 제자리를 찾았고.
나 역시 어리석은 사랑에 빠졌던 적이 있다. 크- 심지어 내가 어리석은 사랑에 빠졌을 때는, 프린세스 다이어리의 주인공보다, 에스메랄다보다 더 나이도 많았다. 프린세스 다이어리의 주인공은 십대 였고, 에스메랄다는 고작 스무살이야. 나는... 하아.
왜 어리석은 사랑에 빠지는가.
내가 사랑하게된 상대가 나쁜 남자인 걸 알지 못해서 그랬다. 나쁜 남자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그렇게 형편없는 남자일 줄은 몰랐지.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그런 남자일 리가 없어, 라는 생각으로 나는 사랑을 했다. 아예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이미 그 안에 들어가 있을 때는 내가 잘못된 줄 몰랐다. 아니, 알면서도 쭉 갔다. 훗날 돌이켜 그것이 사랑이었나, 물어보면, 그것은 사랑인 줄 착각한 것이었던 거라는 답이 스스로 돌아왔다. 내 이 나쁜 사랑은 이미 내 운명 안에 있었던 것 같다. 처음 사주를 보러 갔을 때 다짜고짜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더랬다.
나쁜 사랑을 했었네.
그것이 내가 가진 내 평생의 비밀이다.
에스메랄다와 페뷔스의 이야기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겠다. 페뷔스가 자신의 한심함을 깨닫고 좋은 남자가 되어 에스메랄다랑 사랑을 하게될까? 별로 그럴 것 같진 않다. 아마도 이 어리석은 사랑에 빠진 에스메랄다만 상처를 받고 다치겠지. 내가 페뷔스의 형편없음을 지적한다고 해서 에스메랄다가 내 말을 듣고 자신의 사랑을 그만둘까? 그도 역시 아닐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지금 자신의, 자신만의 사랑을 하고 있으니까 일단 혹독하게 그 사랑을 치러내겠지. 우리가 나쁜 남자를 굳이 겪어낼 필요는 없지만, 그런 과정들이 나쁜 남자를 앞으로 안만나게 걸러내주기는 하는 것 같다. 걸러내다보면 만날 남자가 없겠지만..
갈보란 단어를 욕으로 쓰는 남자 자체에 대해서도 나쁜 남자라 만나지 말라고 말하고 싶지만, 페뷔스는 그걸 에스메랄다에게 했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남자에게 '날 구해준 남자'라며 연정을 품고. 너무 가슴이 답답하다. 아니야, 그 남자 아니야, 그는 좋은 남자가 아니야, 그는 사랑에 빠질 가치가 없어, 그 어리석은 사랑에 빠지지마... 빠져나와..... 그러나 내 말은 에스메랄다의 귀에 닿지 않을 것이다.
에스메랄다는 결국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게 될까? 어리석은 사랑이었음을 깨닫고 현실로 돌아오게 될까? 빅토르 위고가 그렇게 그려냈을까? 빅토르 위고는 어쩐지 에스메랄다에게 그보다 더한 비극을 안겨줄것만 같다. 이미 자루 수녀로 그걸 암시한 바가 있어... 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