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브라운밀러'는 이 책을 쓰게된 동기를 밝히면서, 이 책을 쓰기 전의 자기가 얼마나 강간에 무지했는지에 대해 고백한다. 그 고백은 나의 것과도 닮아 있는데, 강간에 대해서라는 것만 빼면, 나에게도 역시 빻았던 시절이 있기 때문이었다. 개념녀가 되고 싶어했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고, '나는 다른 여자랑 달라'라는 식으로 어필하고 싶었던 날들이 분명히 있었다. 여기서 내가 '다른 여자들' 이랑 다르고 싶어했다는 것은, '다른여자들'을 나보다 열등하게 봤다는 걸 의미한다. 나는 그렇게 열등하지 않아, 나는 달라, 나는 개념 있다니까? 그러다가 개념녀로 인정받으면 '거봐, 나는 다르고, 이 사람은 내가 다른 걸 알잖아' 하면서, 그러면서 뭔가 어쩐지 찜찜한 게 잇었는데, 그런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던, 그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두꺼운 강간에 대한 책을 펴낸 '수전 브라운밀러'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단다. 수전 브라운밀러도 나도 그런 시간을 보내왔다. 그렇다고 지금 완벽하게 훌륭한 인간이 된 건 아니지만, 그 때로부터 우리는 멀리 왔다. 그리고 더 멀리 갈 것이다. 수전 브라운밀러가 이 책을 써낸 것 그리고 내가 이 책을 읽고자 한 것, 이 모두가 우리가 더 멀리 가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일전에 지하철에 앉아 있다가 옆자리 아저씨가 카톡으로 야한동영상을 전송봤는 걸 봤다. 옆자리라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벌거벗은 두 남녀가 엉켜 있는 거였다. 어떻게 지하철 안에서 저걸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을까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아저씨는 그 영상을 카카오톡으로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회사 상사의 친구들이 회사에 방문했을 때, 방문을 닫고 카톡으로 야한동영상을 주고 받으며 낄낄댄 적도 있었다. 동영상 속의 신음소리는 바깥으로도 새어나왔다. 그 당시 사무실 밖에는 여자직원 한 명만 있었는데, 방 안에서 남자들이, 그렇게나 크게, 직장에서, 신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얼마전 트윗에서는 한 까페에 손님들이라고는 자기를 포함한 여자 두 명이었는데, 스피커에서 신음소리가 나는 걸 들었다고 했다. 사장은 남자였다고.


어느 해수욕장에서였나, 일하던 직원이 동영상을 보는데 해수욕장 바깥의 스피커를 통해 그 소리가 들려 손님들이 항의했다는 기사도 봤었다.



나는 이 남자들이 어떻게 이렇게 행동학 수 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직장에서,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그렇게나 당당하게 발가벗은 두남녀가 엉켜 있는 영상을 볼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트윗이나 인스타그램의 선정적인 계정에는 남자들이 주루룩 팔로잉을 하고 있다.  작은 속옷으로 몸을 간신히 가린 여자들의 사진을, 남자들은 그렇게나 줄줄이 모여서들 보고 있었다. 각자 다른 자리에서 그러나 같은 걸 보고 있어. 그런 사진들 속의 그 긴 팔로잉 목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아 이들과 나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먼가, 하는 생각을 새삼스레 했다. 나는 강간에 대한 책을 읽고 있는데, 여기 이렇게나 많은 남자들은 간신히 가릴 곳만 가린 여자들의 벗은 모습을 좋다고 달려들어 보고 있다. 이 거리는 얼마나 먼가. 이 책을 읽는 내가 월등하고 이런 사진들을 달려들어 보는 남자들이 열등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나는 한 쪽에, 여기에, 내가 서 있는 이곳에, 나와 같은 많은 여자들이(아주 간혹 남자들도)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하고, 어떻게 해야 한걸음을 더 내디딜 수 있나 고민하고 있는데, 저기에는 저렇게나 많은 남자들이 이 잘못된 시스템과 구조를 계속 유지하고자 한다는 데 있는, 그 거리감이었다. 우리가 저들을 이길 수 있을까? 벗은 여자를 보고 싶어하고, 더 벗기고 싶어하는 저들을, 그게 잘못됐다고 말하는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잘못된 것, 그릇된 것은 언제나 힘이 더 센데?



구조를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들, 지금처럼 여성을 성적대상화 시키고 소유할 수 있는 것인양 생각하는 사람들은, 나같은 사람들이, 그게 잘못됐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싫고 짜증날까? 늘상 해오던 것인데,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은데, 그런데 그게 틀렸다고 말하다니, 얼마나 기분이 나쁠까? 이 책을 읽는 사람들과 현재의 구조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의 사이의 거리는 아주 멀지만, 아마 앞으로도 더 멀어지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을 쓰는 동안 가장 자주 받은 질문은 짧고 노골적이며 불쾌한 것이었다. "강간당한 적 있어요?"

나도 짧게 받아친다. "없습니다." (p.4)




일전에 정희진 쌤 강연을 들으러 갔을 때 선생님도 똑같은 얘길 하신 적이 있다. 자신이 여성학 강의를 한다고 하면서 별의별 질문을 다 듣고 별의별 말을 다 듣는데, 그 중에 하나가 "강간당한 적 있어요?" 라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그 질문자들의 무심함과 무지함, 예의없음에 정말 깜짝 놀란 적이 있었는데, 수전 브라운밀러에게도 역시 그런 질문들이 들이닥쳤었단다.


강간당한 적 있어요?


어떻게 저런 질문을 할까? 어떻게 저걸 질문이랍시고 할 수 있을까? 수전 브라운밀러가 이 책에서 지적한대로, 여기에는 '니가 당했으니까 이런 일을 하지' 라는 생각도 있을 것이고, 그 질문 자체를 함으로써 상대를 깔아뭉개고 입을 막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정말이지, 끔찍하고 잔인하고 징그럽지 않은가.



여성의 입장에서 강간을 정의하면 한 문장으로 가능하다. 한 여성이 어떤 남자와 성관계를 하지 않기로 선택했는데 남자가 그녀의 의사에 반해 행위를 계속하면 그것이 바로 강간이라는 범죄 행위이다. 여성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는 문제인데도, 여성의 관점을 반영한 이런 정의가 법에 적용된 적은 현재까지 단 한 번도 없다. (p.10)



여자인 '내'가 원한 적 없는데, 남자와 성관계를 하게 됐다면, 그것은 성관계가 아니라 '강간'이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해 경찰에 신고하거나 주변에 얘기하면, 심판을 받는 건 강간을 저지른 남자가 아니라, 피해자인 내가 된다. 나의 평소 행실부터 강간당하던 날의 모든 행동들까지, 과연 나는 순수한 피해자인지 그들에게 증명해 보여야 한다. 혹여라도 내가 그동안 행실이 정숙하지 못했다면, 평소에 남자들을 좋아해서 자주 만나거나, 섹스를 즐기거나, 짧은 치마를 입고 잘도 돌아다녔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남자 하나 인생 조져서 내 인생 펴려고 하는 꽃뱀으로 몰리고 만다. 그 때, 그 당시에, 내가 원하지 않은 성관계를 했는데, 그런데 나는 세상 둘도 없는 나쁜 여자가 되어 심판받는다.



아직 이 책에 읽어야 할 부분이 아주 많이 남아있는데, 그런데 벌써부터 나는 이 책을 읽는 나와 지금의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사람들과의 어마어마한 거리를 느낀다. 이 책을 읽어갈수록 그 거리는 점점 더 벌어지겠지.


나는 자주 환멸을 느끼겠지.


자, 그래도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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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19-01-07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시작되셨다! (전 아직도 책이 도착을 안해용.. 밀린 페미사이드 리뷰를 써야지 해놓고 새해니까~ 이럼서 암것도 안하고 잇네요 ㅋㅋㅋ)

다락방 2019-01-07 14:54   좋아요 0 | URL
어제 색연필 들고 줄 그어가며 읽기 시작했어요.
아니, 책 왜 안오는거죠, 쟝쟝님? 같이 읽어야되는데 흙흙 ㅠㅠ

자자, 부지런히 따라와요. 냉큼 따라와요. 컴온!

단발머리 2019-01-07 15:00   좋아요 0 | URL
제가 좋아하는 거... 그거 나왔네요.
컴 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19-01-07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작하셨군요, 다락방님!
저도 이제 부지런히 읽어야겠어요. 앞에 쪼금 읽고 금방 쉬는 시간...ㅠㅠ
곧 출발합니다!!

다락방 2019-01-07 14:55   좋아요 0 | URL
네네, 저도 부지런히 읽겠습니다. 이번엔 1등해야지, 라고 생각하지만, 또 1등 못하겠지 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 자, 우리 계속 마주치고 만납시다!

심술 2019-01-09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위 사람들이 눈치 줘도 꿋꿋이 지하철에서 야동 보는 사람들 있더군요.
<초딩 아들과 페미니스트 엄마의 성적 대화>라는 책에도 지하철에서 야동 보느라 주위 사람들 괴롭게 만드는 ‘영감탱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영감탱이‘는 이럴 때 쓰면 딱이다 싶어 제가 쓴 표현이고 그 책에서는 ‘어느 할아버지‘란 표현을 썼던 걸로 기억합니다. 물론 홍준표는 장인을 영감탱이라고 불렀다가 여론이 나쁘게 되자 영감탱이를 ‘경상도에서 나이 많은 남성을 친근하게 부를 때 쓰는 말‘이라고 하더라마는.

90년대 중반 언젠가에는 김포공항 사무실에서 남자직원이 야동 보는데 실수로 소리가 김포공항 모든 스피커로 나간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직 인천공항이 없을 때였죠.

다락방 2019-01-09 07:51   좋아요 0 | URL
저도 목격한 바 있지만,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야동 보는 걸 목격하는 사람들이 꽤 많더라고요. 어떤 심리인지 모르겠어요. 그걸 대놓고 본다는 게, 나는 숨기는 게 없다는 어떤 쿨함일까요? 아 너무 짜증나요.
최근에 해수욕장 사건 훨씬 전에도 공항에서 그런 일이 있었군요. 맙소사... 뭐랄까, 언제나 상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곤 하는데, 일어나고나면 딱히 놀랍지도 않아요. ㅡㅡ;;

심술 2019-01-09 10:16   좋아요 0 | URL
예, 현실이 소설보다 더 소설같을 때가 많아요.
얼마 전에도 손경이 ‘아들 성교육하는 법‘ 읽고 유튜브로 손경이 검색해 보니
사람들 성고민을 손경이와 손경이 아들 사진작가 손상민이 듣고 조언해주는 게 있어서 봤더니
나이 터울 꽤 되는 동생 둔 대딩이 ‘여름 더울 때 에어컨 킨 방에서 가족이 같이 자는데 부모님이 나랑 동생이 자는 줄 알고 섹스한다‘는 고민을 올리더라고요.
돈 아끼려 한 방에만 에어컨 틀고 애들이랑 같은 방에서 자는 거야 저도 얼마든지 이해하지만 그래도 애들 없을 때 하든가 모텔에서 하든가 모텔값도 내기 싫으면 애들 나가 놀게 하고 해야지 이건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손상민도 저와 같은 생각인지 ‘부모님한테 퍼부으라‘고 조언하더군요.

모르겠습니다. 은하선 ‘그놈들 섹스는 잘못됐다‘ 읽으면 농촌에서 자란 은하선 지인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지인 부모는 밭일하다 말고도 밭에서 즉석으로 섹스해서 그 동네 사람 치고 그 부부 섹스하는 거 못 본 사람은 없었다는 얘기가 나오던데 이걸 쓸데없는 문명의 억압을 벗어난 사람 본연의 자연스런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게 좋은지 도덕적으로 분개하고 기겁해야 맞는지 연초부터 헷갈립니다. 문맥을 살피면 은하선은 ‘성욕은 자연스러우니 억압하지 말자‘고 옹호하는 쪽이었는데 글쎄 누가 맞는 걸까요? 저도 쓸데없는 성적 억압은 반대하는 쪽이지만 그래도 ‘야동은 혼자, 섹스는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곳에서‘주의입니다.

참, 다락방님은 손경이 ‘딸 성교육하는 법‘을 현재 서재 장식으로 쓰고 계신데 읽으신 건가요 아니면 읽어야지 하고 올려두신 건가요? 다락방님께는 이 책 딸 아니라 조카 태미 때문에 읽으(신/시려는) 거죠?

손경이, 손상민 동영상은 www.youtube.com/watch?v=79hetoP0IWY 고요 3:15에 제가 말한 고민이 나와요.

다락방 2019-01-09 10:26   좋아요 0 | URL
아 티티비 광고하던 시절에 올려두었던 건데요, 타미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저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또 타미 엄마를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아직 사지는 않았는데요, 왜냐하면 제가 아들 성교육하는 법을 사두고도 아직 읽기 전이라(남자 조카도 있습니다), 이거라도 읽고 사야하지 않나 싶어서요. ㅎㅎㅎ
그러니까 읽어야지, 하고 올려둔 게 맞다고 볼 수 있죠.


은하선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심술님 댓글만 읽고 판단하자면 저 역시도 은하선의 말에는 딱히 동의할 수가 없네요. 그나저나 심술님 그간 서재활동 안하시면서 책도 많이 읽고 영상도 많이 보셨나봐요! 후훗. 새해에는 읽은 책과 본 영상에 대한 이야기를 서재에서 많이 해주실 겁니까?

심술 2019-01-09 11:38   좋아요 0 | URL
제가 워낙 게으름뱅이라 새해 서재활동 열심히 할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목표는 열심히 하는 것인데 잘 될지는 장담 못 하겠어요.

아, 다락방님께는 타미 말고 남자조카도 있군요.
타미보다 서재 출연 빈도가 낮아선지 제 기억으론 오늘 이 댓글로 첨 만납니다.
손경이 책은 아직 읽으신 거 없고요.
‘아들 성교육하는 법‘은 쉬우면서도 핵심을 잘 찌른 좋은 책이었어요.
‘딸‘ 편도 언젠가 읽어야지 맘먹고 있는데 한국 들어갈 때까지 당분간은 못 읽겠네요.